金觀濟. 호는 월강(月岡).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경주김씨 상춘공파. 1963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6년 6월 18일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안희제, 남형우, 윤세복, 이시열(李時說), 이원식(李元植), 김동삼, 배천택(裵天澤), 박중화, 신백우, 김태희(金泰熙)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 이시열 등과 함께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그 교사가 되어 교포자제에 대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동창학교가 폐쇄되자 1915년 압록강 대안 봉천성 흥경현 동로홍묘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그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에 일신학교는 흥동학교(興東學校)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과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일제 고관을 암살하고 관청을 폭파할 목적으로 곽재기, 이성우 등과 함께 1917년 12월 상해에서 폭탄을 구입 후 운반하는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1920년 5월에도 이성부와 함께 상해에서 폭탄 13개와 권총 2정을 구입하여 옥수수 자루에 넣고 운반하는 과정에서 일경에 압수당하였다. 이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대구 약전골목에서 복양당 한의원을 설립하고 한의사로 활동했으며, 이육사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다가 불온 인사라는 이유로 검거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며 재판을 기다리다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김관제는 해방 정국을 맞아 복양당의원에서 김창숙 등 항일지사들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한 뒤,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를 수립하고 위원장을 맡았으며, 민족혁명당 남한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좌익 계열 단체에서 몸담은 것이 문제시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감시대상이 되었고, 6.25 전쟁 발발 후 대구에서 특무대 조사를 받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1951년 7월 1일(추정)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관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해방정국과 6.25 전쟁시기 김관제의 막내아들인 김병국 씨 등을 제외한 세 아들(김동찬, 김병렬, 김병욱)은 친일파들이 가족을 감시하고 득세를 부리는 모습이 싫다는 이유 등으로 각각 시기를 달리하여 월북했다. 이중 김병욱은 조선로동당 비서이자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회장을 역임한 김용순과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김병국 씨는 현재 충난 천안에서 거주 중인 원로목사이며, 2015년 11월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여 돌아가신 형들의 후손들, 즉 친조카들과 만나 형제들이 재북했음을 확인했다.
2020년 2월 동아대 석당박물관은 18중인 대학민국임시정부 문건들이 국가등록문화재 제774-3호로 지정되었다고 공개했다. 지정된 자료들 중에는 조완구(趙琬九, 1881∼1954)와 김구(金九, 1876∼1949)가 독립운동가 김관제(金觀濟, 1886∼1951)와 윤상태(尹相泰, 1882∼1942)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와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이 김관제에게 보내는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던 김창숙(金昌淑, 1879∼1962)에 대한 안부를 묻는 편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