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하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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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京河.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3월 24일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동부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강계 영실중학교(英實中學校) 교사로서,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동료 교사인 정준과 읍내 교회의 장로이자 명신학교(明新學校) 회계인 한봉민과 만나 독립만세운동계획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는 더 많은 동지의 규합을 위하여 기독교측·천도교측과 연락하여 21명의 동지를 확보하였다. 3월 24일 그들과 함께 영실중학교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서명 날인하는 연판장을 작성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명운행으로 하여금 이를 보관케 하였다. 이튿날 다시 회의를 열고 거사일시를 4월 8일 오전 11시로 하고, 행동개시 신호를 읍내 남장대(南將臺) 교회의 종소리로 결정하였다.

그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학생 김성길(金成吉)·문태선(文泰善)·강석문(姜錫汶)·김명하(金明河)·김형준(金瀅濬) 등에게 김성하(金成河)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한 뒤 싸리나무를 구하여 제작한 태극기에 대를 매었다. 또한 이서면교회(吏西面敎會)의 전도사로 있으면서 평양신학교에 재직중인 주하룡(朱河龍)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얻어 김창욱(金昌郁) 등에게 2천여매를 등사하게 하였다. 이같은 모든 사전준비는 읍내 헌병대에서 악명이 높았던 계난수(桂蘭秀) 등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4월 8일 오전 11시 남장대교회의 높은 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려 펴지자, 계획대로 영실중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이준겸(李俊謙)의 집 앞에 모였다. 이에 장봉준(張奉俊)이 대형 태극기 2개를 들고 선두에 서고, 북과 나팔소리에 맞추어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가 선두에 서서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헌병분견소를 지나 북문(北門)을 향하여 시위행진을 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 기마헌병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위협하다가 급기야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은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되었다.

이 일로 체포된 김경하는 1919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6월형을 받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여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기각 판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상고취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누누이 변명한 바 있으나 그 핵심은 피고는 정의인도, 생존존영을 표방한 민족자결에 따른 선언서를 등사하고 ㄷ동지자를 연서하고 지난 4월 8일 조선독립만세를 호창하면서 시가를 행진했는데, 그곳 경과는 경고 없이 발포하고 극악무도한 병졸은 도주하는 자를 추격하여 우리들을 체포하여 유죄로써 신의주지청에 압송하여 동 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의 언도를 받았다. 그런 이유로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햇는데 이 역시 공소 기각되었다. 애초에 일한 합병은 한국인의 본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일본은 열국에 대하여 한국인은 합병을 매우 기뻐하고, 일본은 일본인 조선인을 동일시하고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하늘과 땅의 차별이 있다. 이 10년 동안 정신상 및 물질상의 장애를 받은 적이 많다. 조선인은 일본정치에 대하여 어느 한 사람도 원한을 품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런데 이때 민족자결의 행운이 왔으니 누가 기쁨의 만세를 부르지 않겟는가. 우리 조선은 예로부터 역사, 풍속, 종교, 관습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일본국민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대우는 점점 심해져 법률에 미치고 조선인에 대해서는 태형을 적용하여 마치 금수와 같이 처벌했다. 일본 정부는 마관조약에 따라 조선을 독립시키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

그러나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1] 그러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되어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피신하여 1년간 체류하면서, 산동성 등현에 있던 화북신학교(華北神學校)를 졸업하고 1925년 귀국하여 장로교 목사로서 황해도 신천읍에서 활동했다. 8.15 광복 후 서울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1971년 은퇴한 뒤 미국으로 이민했고,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 8월 대통령 초청으로 경축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귀국했다가 1년 2개월 만인 1996년 10월 29일 서울 보훈병원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김경하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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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