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 (1890년)

김강(金剛, 1890년 1월 4일~1930년 8월 6일)은 대한민국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0년 1월 4일 전라남도 광주목 효천면 양림리(현재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남구 효천지구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신교 신자로, 1919년 3월 5일 김철(金鐵)ㆍ최병준ㆍ최한영(崔漢泳) 등이 서울에서 돌아와서 독립선언식 광경과 만세시위 정황을 전해주자 바로 청년, 유지 등에게 연락했다. 이날 밤 양림동에 소재한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숭실학교 교사인 최병준과 최한영ㆍ황상호(黃尙鎬)ㆍ강석봉(姜錫奉)ㆍ한길상(韓吉祥)ㆍ송흥진(宋興眞)ㆍ김용규(金容奎)ㆍ손인식(孫仁植)ㆍ김태열(金泰烈)ㆍ최정두(崔正斗) 등과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는 김철에게 서울의 시위 정황을 알려주게 한 뒤 광주에서도 똑같은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해 모두의 찬성을 얻어냈다.

이후 그는 광주 큰 장날인 3월 8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학교 학생 및 주민의 시위참가 선전, 독립선언서의 등사ㆍ태극기의 제작 등 사전준비를 분담하고 추진했다. 그러나 준비 기간이 너무 촉박하자, 다시 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그 계획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ㆍ경고문ㆍ독립가 등을 등사하고 거사 연락을 취하였다. 이윽고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ㆍ숭일학교ㆍ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ㆍ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어,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1천여명이 넘었다. 이때 그는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큰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위군중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장안을 행진했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 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며,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일본 헌병ㆍ경찰은 감히 시위방해를 못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무렵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자, 많은 경찰과 기마 헌병이 김 철 등의 주모자를 연행하였다. 이에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수까지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아울러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공소했지만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다.[2]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0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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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