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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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1년 2월 19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끈 장로회 목사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길선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사서삼경을 수학했으며, 부친의 뜻에 따라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제4회로 졸업했다. 이어 숭실대학교에 진학하여 1911년 제3회로 졸업했다. 그의 숭실중학, 숭실대학 2년 후배인 박윤근은 1975년 평양 숭실동문 좌담회에서 선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길선주 목사의 장자로서 얌전하고 생김새도 깨끗하고 재주가 있어서 숭실에서 인기 많은 스타였다.

길진형은 숭실대학 졸업 후 G.S. 매퀸 교장의 추천으로 선천의 신성학교에서 수학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했다. 1907년 4월 양기탁, 안창호,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해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1]에 시달리다 1912년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 공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신성학교 교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제 경찰의 감시와 통제에 시달리던 그는 도보로 국경을 넘어 만주 안동현으로 피신했다가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에서 휴양하면서 틈틈히 공부하던 그는 안창호와 함께 클레몬트(Clairemont) 국어강습소를 열어 교포 교육에 전념했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악화된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1917년 귀국길에 올라 평양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길진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추운 겨울에도 발가벗겨 천장에 매단 후 전신 구타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