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우파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기독교 우파(基督敎 右派, Christian right)란 기독교 교리를 바탕으로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을 보이는 우파이다. 반의어로 기독교 좌파가 있다.

성향[편집 | 원본 편집]

보통 기독교 우파는 신은 교리를 어기면 응징한다는 개념이 강하며 자신들의 신을 심판자의 권위를 가진 신으로 보는 경향이 다분하다. 이런 이유로 권력과 자신들이 권력과 야합하는 것을 신의 뜻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으며 통상 전통적 가족관을 중요시하고 보수적인 성적 가치관을 가진다.

그렇기에 성소수자 권리, 낙태, 성매매, 포르노그라피, 자유로운 성행위, 미성년 성교육, 서브컬처 등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며 타 종교와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독교가 주류종교인 서양권에서는 종교적 우파(Religious right)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나라별 기독교 우파[편집 | 원본 편집]

미국[편집 | 원본 편집]

KKK단은 미국에서 생겨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근본주의 단체로 인종 차별을 정당화 하고 있다.

68혁명 이후엔 미국에서 신좌파가 등장해 반문화(counter-culture)를 내세우며 주류 사회의 반항하자 80년대에 우파 내지 극우파들이 이에 대해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 우파, 신자유주의자가 연계하여 네오콘이 탄생했다. 그러나 2008년 경제 공황으로 인해 네오콘은 몰락했다.

미국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인 것 처럼 생각하며, 현대 세속국가인 이스라엘을 성서상에 나오는 고대 이스라엘과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성향을 많이 보인다. 이런 이유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들기를 하는 집단이며[1] 낙태문제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반대를 외친다[2]

한국[편집 | 원본 편집]

한국에서는 주로 개신교 성향(특히 장로교)을 지닌 기독교 우파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는 한국 개신교계 내부에서는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는 사실상의 흑역사로 점철된 개신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개신교를 받아들인 주 계층은 평안도와 원산지역, 그리고 서울지역의 인사들이 대다수였다. 당시 개신교로 개종한 교회 지도층의 성향은 개신교에서 근대 사상의 원동력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계층과 자신들의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긴 계층이 있었으며 후자의 경우 대체로 지역적으로 차별을 받아오던 몰락양반이나 중인, 도교 신자[3]들이었다. 초기 개신교 성장기 당시 이들이 혼재한 상태로 존재하였으며 대체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적인 모습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38년 한국장로교 제 27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문 이 결의는 해방 후 10년이 거의 다 된 1954년 총회가 되어서야 취소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105인 사건3.1 운동을 기점으로 민족독립적 성향은 상당히 희석되고 이들을 지도하던 외국인 선교사들도 "권위에 순종하라"는 로마서의 성경 구절을 내세워서 일제 정권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개신교 지도층의 전반적인 성향이 일제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후 1940년대에 들어서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반일적 성향은 성결교단의 자진 폐쇄와 평양 숭실학당의 자진폐교, 주기철 목사의 순교 등으로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였으며 이후 한국 개신교는 신사참배,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등을 완전 수용하면서 일제 제국주의 침탈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실제로 개신교 재단 대학인 연희전문,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도 모두 신사참배를 수용하여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일제 신사참배에 반발하였던 성결교단조차도 자신들의 규칙 맨 첫머리황국신민의 서사를 넣었고 모든 개신교 교단 총회에서도 동방요배와 대미승전기도문을 낭독하는 것이 기본적인 절차였다.

3.15 부정선거 직전 이승만과 이기붕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는 자유당의 선거포스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문제는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38선 이북지역의 경우 소련군정이 들어서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무신론을 외치자 개신교측은 당연히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던 것. 반대로 남한측의 경우 개신교 인사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인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미국과 선이 닿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는데 때마침 터진 한국전쟁으로 북한 지역에 있던 개신교인들이 대거 월남하면서[4] 이들이 개신교 주류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북한에 있을 때 받았던 탄압 등을 예시로 하면서 북한 공산주의 정권을 사탄의 세력으로, 이에 맞서는 이승만 정권과 미국을 신(하나님)의 세력으로 여기게 되면서 개신교의 우경화와 친미화가 가속화되며[5] 승공정책을 노골적으로 펴게 된다. 실제 한국전쟁 중 한경직 목사가 조직한 서북청년단이 북한지역에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조직화된 대표적인 사례이며, 한경직목사의 자서전에서도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다녔다고 서술하고 있다.

1973년 5월 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준곤 목사의 설교문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개신교입장에서 숨 죽이고 버로우타고 있어야 하는 시기가 오나 싶었으나 곧이어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들 역시 반공을 국시로 세우면서 개신교 입장에서는 정교유착을 본격화할 수 있는 계기가 다시 한번 열리게 되었다. 실제 박정희와 반공기독교인으로 명성을 떨치던 김준곤 목사와의 만남이 대표적인 것으로 [6] 당시 학생운동에 골머리를 앓던 박정희가 김준곤에게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반공으로 방향성을 잡는 학생선교단체의 설립과 후원을 얻어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 이후 이들을 위시한 개신교계의 정교유착 작품으로 국가조찬기도회, 구국십자군(구국선교회) 운동[7][8], 전군신자화 운동를 통한 군내 집단세례식의 시작, 현재로도 열기 힘든 초대형 반공 기독교 집회인 엑스플로 74를 개최하게 되면서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게 되며,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의 성장이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즉 정교유착을 하면 교회의 외형과 재산이 성장하는 것이 눈에 띌 정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루어지면서 정교유착이 고착화 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성장해 왔던 개신교의 성장세가 한풀 꺾이게 된 사례가 바로 1997년 외환 위기로 개신교측에서 밀어주던 "장로 대통령"김영삼 정권 말기에 나타나게 된 사건이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 하여도 신자 수는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일시적으로 보여주었는데 이 당시까지는 한국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그나마 신뢰할만하고 사회적으로 구제활동과 같은 선한 역할을 한다는 이미지가 남아있었고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을 장소로 교회를 택한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9]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이전과 같은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2002년 월드컵을 전후로 한 여러 사건들로 미국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가 악화되고 결정적으로 개신교 스스로가 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데다가 일반 대중적 시각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 엽기적인 사건들[10]이나 괴리된 인식의 모습[11]이 개신교 내에서 지속적으로 불거져 나오면서 개신교 인구 성장세 자체가 감소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모습에 위기를 느끼던 보수 개신교계에서는 다시 기독교 지도자(속칭 장로 대통령 만들기)를 세우고 자신들이 사회 주류층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이 탄핵으로 몰락하게 되고 이들과 정교유착이 견고하던 개신교 주류층의 민낯이 일부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반공 프레임이 약해지게 된 개신교 우파들의 주 공격대상이 동성애와, 이슬람교, 천주교 등으로 전환되게 되었으며[12] 내부 결속을 위해 보다 극우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다른 극우 집단과 다를바 없는 가짜뉴스생산기지 역할까지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한국의 기독교 우파 정당으로 알려진 정당은 기독자유당이지만 실제 정교유착현상을 보이는 정당은 자유한국당까지 포함된다. 이외에 한국 기독교 우파의 기타 특성으로 교회 내 여성 지위나 인식이 일반 사회의 인식보다 훨씬 더 전근대적이고 뒤떨어지는 모습이 나타난다. 말 그대로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주로 주장하는 젠더 권력 불평등 문제가 한국내에서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곳이 바로 기독교 내부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이 많고 성소수자에 우호적인 대한민국의 여성인권단체와 대치하면서 안티페미니즘 성향이 강해졌으며, 안티페미협회 등 안티페미니즘 단체와도 연대하는 일이 많아졌다.

주요 인물[편집 | 원본 편집]

참조[편집 | 원본 편집]

다음은 한국의 대표적 주류 교단이자 기독교 우파로 분류되는 장로교의 총회 결의문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이를 보면 한국의 기독교 우파가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유추가 가능하다. 참고로 1959년 장로교 분열 이후 총회는 보수성이 강하면서 대형교단에 속하는 합동교단의 총회를 기준으로 하였다.

  • 제6회 총회(1917) - 천주교인과 결혼하는 것은 불가하다.
  • 제14회 총회(1925) - 불신자가 혼례에 목사를 청하여 주례를 청할 경우 주례해줌이 불가하다.
  • 제22회 총회(1933) - 여자에게 장로 자격과 치리권은 허락할 수 없다.
  • 제24회 총회(1935) - 여자는 남자가 섞여 있는 교회 회중을 가르치거나 주관함이 불가하다.
  • 제27회 총회(1938) -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 제32회 총회(1946) - 여자 장로 문제는 남북통일 총회 때까지 보류한다.
  • 제36회 총회(1950) - 신조 1조를 위반하여 성경 유오설을 주장하는 자는 엄중 처리한다.
  • 제38회 총회(1953) -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결의를 정부당국과 UN, 미국무장관에게 각각 보내기로 한다.
  • 제39회 총회(1954) - 제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
  • 제43회 총회(1958) - 여장로 피택 청원건은 허락할 수 없다.
  • 제45회 총회(1960) - 목사가 예배 폐회 시 축복기도를 할 때에는 “있을지어다”로 일치.
  • 제62회 총회(1977) - ‘하느님’을 금하고 ‘하나님’으로 부르고, - ‘성서’를 금하고, ‘성경’으로 호칭하도록 한다.
  • 제66회 총회(1981) - 예배 시 복음성가를 부르지 않도록 한다.
  • 제73회 총회(1988) - 불상이 들어 있는 10원짜리 동전의 폐기를 강력히 건의한다. - 찬송가 제261장은 합동 교단에서 부르지 않는다(261장은 김재준 목사가 지은 찬송)
  • 제74회 총회(1989) - 미군 철수 반대 - 팀스피리트 훈련 지지 - 핵무기 철수 반대 - 해외 및 국내 교역자의 방북 반대
  • 제76회 총회(1991) - 개역성경만을 사용해야 한다.
  • 제83회 총회(1998) - 여성안수는 성경을 위배하고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 제84회 총회(1999) - 열린예배개혁주의 신학에 문제가 되므로 교단적으로 금지한다.
  • 제89회 총회(2004) -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반대

유럽[편집 | 원본 편집]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같은 유럽의 흔한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은 대부분 기독교 우파로 분류되지 않는다. 기독교 우파는 세속정치에서 우파~극우에 속하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인데 반면에 기독교 민주주의는 기독교 전통을 옹호하면서도 상당히 세속적이기 때문이다.[13]
  • 90년대 공산권이 무너진 후 헝가리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들이 경제적 과도기로 인해 혼란을 겪자 기독교 우파와 연계한 극우파들이 득세를 이루면서 우경화 되었다. 러시아블라디미르 푸틴도 기독교 우파(러시아 정교회 기반)라고 볼 수 있다.
  • 장 마리 르 펜은 극우성향의 가톨릭 신자로 낙태,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인지 자신의 딸인 마린 르 펜과 손녀인 마리옹 마레샬 르 펜도 극우 성향을 지니고 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기독교 민주주의가 중도우파적 성향이긴 하지만 이들이 꼭 기독교 우파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 우파는 신학 내 보수파, 근본주의자들을 의미하지만 기독교 민주주의는 세속 정치 하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온건하게 지향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둘은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

각주

  1. 한국어 성서에 나오는 블레셋이 바로 팔레스타인을 음차한 것이다. 사사기의 블레셋을 현대 팔레스타인과 동일시하면서 악마화 시키는 것
  2. 미국에서 진보/보수를 가르는 한 축 중 하나가 낙태문제 찬반이다
  3. 초기 개신교 전도사로 유명한 이기풍 목사의 경우 본래 도교 도사였다
  4. 정확히는 한국전쟁 직전에도 꽤 많은 탈북이 있었다
  5. 21세기 들어 열리는 태극기 집회 참여인원을 보면 개신교인이 주축이며 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6. 유신과 함께 온 그리스도의 계절: 박정희와 김준곤
  7. 최태민이 만든 구국십자군의 진실
  8. 개신교 언론지인 국민일보에서는 목사들이 이용당했다고 하였지만 당시 교단차원에서는 참여를 금하였지만 실제로 적극 참가한 인사들을 보면 주류교단의 대형교회 목사들이었으며 이들이 이용당했다고 하기 보다는 주류 개신교 인사들이 적극 가담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9. 실제 이 당시 교회로 들어온 30~40대 실직자 세대의 중 어릴 때 주일학교나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 나누어준 것을 추억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10. 속칭 에어장 사건이 이 시기에 있었다
  11. 한국교회의 교회세습이 본격화된 시기가 2000년대 초반이다
  12. 그렇다고 북한이 빠진건 절대로 아니다.
  13. 애당초 기독교 좌/우파란 개념은 기독교라는 종교 내에서 가르는 상대적 좌우개념이지 세속정치 하에서 가르는 좌우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 교는 프란치스코 교황 등 교단 내 진보파도 동성애에 부정적이거나 모든 낙태에 매우 부정적인 부류가 수두룩한데 오히려 세속정치 하에서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은 (동성결혼은 찬반이 나뉠지언정) 성소수자 차별금지나 시민결합같은 LGBT 권리자체엔 상당히 우호적이며 낙태도 제한적으론 찬성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