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
Graf Zeppelin-klasse Flugzeugträger
Bundesarchiv RM 25 Bild-27, Flugzeugträger "Graf Zeppelin", Stapellauf.jpg
진수되는 그라프 체펠린
선박 정보
종류 항공모함
건조 2척
운영 나치 독일
진수 1938년 12월 8일
퇴역 1947년 8월 16일 격침(그라프 체펠린)
생산량 1척
정원 1,760명
제원
엔진 중유 보일러 12대
4축 4엽 스크루
추진력 200,000 마력
속도 35 노트(최대)
무장 SK 15cm L/22× 16 / × 105cm Flak 38× 12 / SK C/30× 22 / MG C/30MG× 28
항공기 Bf 109T ×10
Ju 87C ×13
Fi167 ×20
전장 262.5m
선폭 31.5m
흘수 8.5m
배수량 23,200톤
28,090톤(만재)
Graf-Zeppelin-1.jpg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Graf Zeppelin-klasse)은 나치 독일이 계획하고 건조를 진행한 크릭스마리네의 정규 항공모함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건조[편집 | 원본 편집]

그라프 체펠린의 용골

1939년, 나치 집권하 독일국은 베르사유 조약이 채워놓았던 군비 제한을 끊어 내며 국방군의 본격적 재무장을 시작하였다.

이에 해군 크릭스마리네도 기조에 맞춰 독일의 해양력 확장을 위한 해군 함대 전력의 재건에 들어가며 전함을 비롯, 대형함들의 건조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해전은 거함거포주의에 입각한 포격전 양상이었고 전함의 제해권 장악은 당시 해양력과 해상 전력의 기본 내용이었다. 그러나 1차대전 이후 새롭게 대두된 항공기의 존재로 해상에서 비행기를 이용한 작전과 항공모함은 주류 열강 해군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런 시류에 맞춰 크릭스마리네 역시 항모 부대를 편성하고자 하는 Z계획을 입안한다.

그러나 1차대전의 패전으로 대형 함정들의 건조, 운용 능력을 상실당했던 독일국은 항공모함이란 신예 함종을 시행 착오를 거치며 건조해 본 경험이 없기에 후발 주자로써 외국 항공모함과 기술을 참고 도입하는 방향으로 항공모함 확보에 주력하기로 했고 세계 최초의 항모였던 영국 해군의 커레이저스를 참고하여 개발에 들어간다. 거기에 마침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항모의 원조 국가였던 영국만큼 항모 건조와 운용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기에 독일은 제트 엔진 기술을 비롯한 자국의 우월한 항공 기술과 기갑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항모 관련 기술 중 부족한 부분을 도입하기로 한다.

크릭스마리네의 Z계획은 가칭 항모 'A'부터 시작해 항모 B와 C,D (Flugzeugträger A,B,C,D)까지 4척을 건조하여 북해에서 영국 해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개발은 진행되었다. 그리고 1935년, 히틀러의 건조 승인이 떨어짐에 따라 우선적으로 항모 A가 첫 건조 개시에 들어가게 되었고 1년 뒤인 1936년 킬(Kiel)의 도이체스 베르크 조선소에서 항모 A의 용골이 놓이게 된다.

전쟁 발발과 난항[편집 | 원본 편집]

진수되는 체펠린

항모 A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약 3년간의 건조가 진행되었고 A가 진수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항모 B의 건조도 정상적으로 착수돼 1940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된다.

이후 1938년 연말(12월 28일), 항모 A는 더 이상 항모 A라는 가칭 대신 그라프 체펠린이란 정식 이름을 단 채 바다와 첫 대면을 하였고 독일의 항공모함 보유는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몇달 후 벌어진 사건은 체펠린과 자매들의 운명을 180도로 바꿔놓게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란 전쟁의 시작에서 항모 건조에 투자될 예산들은 모두 전비로 전환되며 체펠린급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이미 항모 C와 D가 전쟁으로 백지화 되었고 건조가 진행중이던 B, 그리고 홀로 남은 체펠린의 미래도 불투명했고 결국 1940년 내려진 해체 명령이 떨어졌으나, 시기 적절하게 독일이 점령한 노르웨이 연안을 방비할 함정 소요가 생김에 따라 체펠린은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갑판 공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건조가 중단된 항모 B는 크릭스마리네의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의 명령으로 해체돼 자원으로 재활용 된다. 그러던 와중에 지구 건너편에서 일어난 진주만 공습은 체펠린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주었고 항공모함을 단순히 비행기만 싣고 왔다갔다 하는 배인줄 알던 히틀러의 인식을 단번에 뒤집곤, 살아남은 체펠린의 완공을 지시하며 그렇게 해체당할 뻔한 체펠린은 간신히 살아남게 된다.

1940년 항구에 정박한 그라프 체펠린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살아남은 체펠린이었지만, 이번엔 영국 공군이 그녀를 가만둘 생각이 없었으니, 항모의 완공은 영국 해엽의 제공권과 직결되는 사항이었기에[1] 야음을 틈타 킬 항에 렝케스터 폭격기 3대가 야간 폭격을 감행함으로 체펠린 격침을 시도했고 언뜻 보기엔 체펠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되었지만 안개로 인해 항모를 식별하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얻어맞은 건 그 옆의 전함 그나이제나우였는데다 정작 그나이제나우도 큰 피해는 아니었다.

정작 엉뚱하게도 체펠린의 발목을 잡은 것은 국방군 소속인 루프트바페였는데, 항모에 놓일 함재기의 개발과 함께 항공모함에서 운용될 항공 부대의 창설이 필요한 상태에서 하필 그만 날아다니는 것 관련해서 집착증(?)을 보이던 독일 공군의 제국원수(元帥)와의 접점이 발생하는 바람에 해군과 공군 사이의 알력다툼으로 번졌고 그나마 한발 물러선 괴링이 조종사와 인원을 공군 파견대 형식으로 운영해 인사권은 내주지 않는 대신, 함재형 Bf 109T를 해군에 제공하는 아량(??)으로 합의점을 찾게 된다.

이렇듯 온갖 난항을 겪고도 끈질기게 명줄을 이어오던 체펠린이었지만, 바렌츠 해 해전의 패전은 결국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던 체펠린의 건조를 끝장내고 만다. 바렌츠 해 해전의 실망스러운 패전으로 크릭스마리네에 크게 분노한 아돌프 히틀러는 크릭스마리네가 보유한 대형 수상함 전부를 폐기하라는 명령까지 내렸고 카를 되니츠 등의 분투로 티르피츠 등 몇몇 전함과 순양함들은 생존했지만 이번 운은 체펠린의 편이 아니었다.

소련 항모 체펠린[편집 | 원본 편집]

소련군에 노획된 체펠린

그렇게 95%의 공정률로 완공을 목전에 두고 있던 체펠린의 건조는 취소되었고 단 한번의 항해도, 항공기 발진도 못해본 채 무장까지 떼인 채로 사실상 방치되던 체펠린은 소련군이 독일 내부로 진격해오는 시점에선 격납고를 이용한 목재 창고 등 항모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1945년 4월 슈테틴에 접근한 소련군의 항구 진입을 저지하고자 독일군은 체펠린의 킹스턴 벨브를 열어 자침시켰고 크릭스마리네 함정으로의 체펠린의 함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만 체펠린을 노획한 소련군은 체펠린을 그렇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귀중한 항공모함을 얻어 소련 해군에서 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배수 펌프로 차있던 물을 빼고 체펠린을 부상시킨 소련군은 그라프 체펠린의 함명을 소련 해군 함적인 체펠린(Цеппелин)으로 변경하였고 소련 영내로 이 노획품을 이동시켜 재취역을 위한 조사를 1947년까지 면밀히 진행하게 된다. 문제는 침수되어 있던 기간 동안 진행된 부식과 손상은 그 정도가 심했고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함체를 항모로 완공시켜 운용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대책을 고민하던 소련군은 장차 냉전에서 적으로 마주하게 될 서방권 해군의 항모에 대응책을 마련하는 목적으로 체펠린을 표적 훈련함으로 전환시켰다.

소련군은 실제 상황처럼 내부 연료와 탄약을 적재한 체펠린을 항공기의 폭격과 군함의 포격으로 공격하였고 나름 방어 대책에 투자를 한 함급답게 예상 외로 버티긴 하였으나 결국 발트해의 해저로 가라앉는다.

설계 및 성능[편집 | 원본 편집]

항공기 운용[편집 | 원본 편집]

운용 예정이었던 전투기 Bf 109T

그라프 체펠린은 40대에서 약 50대의 함재기를 운용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비행갑판은 약 242미터에 폭 30미터로 선수 비행갑판 쬐이 둥글게 돌출되어 있는데 이곳에 2개의 케터펄트가 배치되어 있다. 이 케터펄트는 압축공기를 분사해 속도를 얻는 방식인 압축공기 분사식 케터펄트로써 전투기를 시속 140 킬로미터, 슈투카 같은 폭격기, 뇌격기는 130 킬로미터 까지 가속시킬 수 있었고 압축공기를 충전하는 시간으로 인해 새로운 항공기 출격까지 30초 정도를 소모했다.

착함 시 항공기는 비행갑판 후방에 위치한 어레스팅 와이어 4개소를 이용하여 제동을 걸며 비상용으로 엘리베이터에 2개소가 추가로 존재하였다. 이 비행갑판은 중심선을 기준으로 3개의 엘리베이터를 통해 갑판 아래의 격납고와 연결되어 있으며 격납고는 40여대의 항공기를 수납할 수 있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라프 체펠린의 함재기 기종의 비율은 전투기 10대, 폭격기 13대, 뇌격기 20대로, 약 40대 이상, 50대 내의 함재기를 수용하고 작전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기존 루프트바페에서 운용중인 기종의 해상형을 도입해 운용할 계획이었다. 전투기는 Bf 109T 라는 109의 해상형으로 Bf 109E-7형을 기반으로 개발되었고 함재 폭격기를 맡을 기종 역시 성능이 입증된 Ju87, 일명 슈투카의 해상형 Ju87C가 운용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이착함을 위해 제동용 고리가 추가되고 착륙장치가 강화되는 한편 해상 환경에 견딜 수 있도록 내구도 면에서 향상된 기종이었다.

다만 체급 대비 타국의 항모에 비하면 항공 운용 능력이 좋다고는 하기 어려웠는데, 단적인 예로 미국의 렉싱턴급 항공모함이 70대,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이 90대 이상까지 수납하고 작전한 것에 비하면 부족해 보이는 감이 없잖아 있다. 그래도 이는 미군 항공모함을 기준으로 단순히 수량만 판단한 것이며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2]이나 동맹인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들과 비교했을 경우 체펠린과 유사했으며 그리고 넓은 비행갑판과 케터펄트의 배치로 인한 설계적인 함재기 운용능력은, 당시 기준으로 우수한 항모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장[편집 | 원본 편집]

체펠린급은 항공모함이니만큼 적 항공기에 대한 충실한 방공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교적 원거리에서 적 항공기를 저지할 탄막을 105밀리 대공포(105cm Flak 38) 12문이 함교 구조물 앞뒤에 쌍열 포탑 형식으로 3개씩 배치되었으며 탄막을 형성하는 37밀리 대공포(SK C/30)와 20밀리 대공포(MG C/30)는 각각 11문과 7문이 배치되었다.

또한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대함 무장으로 경순양함의 주포와 동일한 150밀리 함포(15cm SK C/28)를 비행갑판 외각에 배치해 적 함선과의 포격전에 대비했다.[3] 이런 결정의 원인은 크릭스마리네가 보유한 수상 함정 수량이 부족하다는 점에 있으며 당장 항모 기동부대를 편성하기는커녕 자기들 할 일부터가 바쁜 순양함이나 충분치 못한 구축함 수량은 항모에게 자함 호위 임무까지 떠맡게 한 것이다.

함체[편집 | 원본 편집]

함재기 이함을 위한 맞바람 형성을 위해 항공모함은 고속 성능이 필수이며 체펠린 또한 35노트의 속도를 확보하기 위해 12개의 중유 보일러와 여기에 연결된 4축 스쿠류로 20만 마력의 속도를 확보하였다

일각에선 체펠린급의 함체 구조가 일본 해군의 아카기를 기반으로 했다는 말이 있고 실제로도 설계 및 건조 단계에서 일본 기술진들의 협력이 있기도 했다. 또한, 선수 비행갑판 구조에서 보이는 갑판 지지용 기둥 구조물의 유사성 처럼 몇몇 설계적인 면에서 아카기와 닮은 점이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체펠린급과 아카기의 구조는 완전히 다르며 오히려 체펠린급의 설계는 아카기보단 되려 영, 미국의 항모와 가까운 점이 더 많다. 특히 내부 구조의 배치는 독자적이며 갑판과 함교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체펠린에는 아카기엔 장착되지 않은 케터펄트가 존재하며 기관부의 경우 어딘지 불안정한 아카기의 추진기관과는 달리 처음 설계 그대로 진행된 체펠린의 추진기관은 잘 정렬된 편이었다. 더 나아가 일본 항모들 보나 선구적인 부분도 있었는데, 일본 항모의 최종 테크트리라는 다이호 때 가서나 장착되는 아일랜드 형 연돌이 체펠린에는 설계부터 적용된 상태였다.

결론은 세세한 부분에선 일본 기술진들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체펠린급은 독자적으로 설계, 건조된 함급이며 일본 항모보단 되려 영,미의 항모와 유사성이 더 높다.[4]

동형함 및 개량형[편집 | 원본 편집]

함급 중 유일하게 진수된 그라프 체펠린

그라프 체펠린(Flugzeugträger A)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 중 유일하게 진수된 함정으로, 독일의 처음이자 마지막 항공모함이다. 1936년 12월 28일 기공되어 2년 뒤인 1938년 12월 8일 진수되는 과정에서 그라프 체펠린이란 함명을 부여받았다. 체펠린은 경하 33,550톤, 만재 34,000톤의 규모로 비록 취역은 하지 못했으나 독일이 보유한 첫 항공모함이라는 의의가 있으며 전쟁 중 취소 위기와 같이 여러 난관이 있었다. 결국 바렌츠 해 해전 패전의 여파로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 1943년 모든 공정이 중단되었고 방치되다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장애물로 자침 처리된다. 소련군은 노획한 체펠린을 재취역 시킬 계획이었으나 손상도 때문에 포기하였고 표적함으로 소모하며 침몰한다.

Flugzeugträger B

1938년 건조가 시작된 체펠린급의 2번함으로, 1940년 7월까지 진수를 예정하고 공사가 진행중이었으나 1939년 건조가 사실상 중지된 이후 자원을 더 시급한 U-보트 쪽으로 돌리게 된다. 갑판 공사까지 진행된 상태였지만, 1940년 2월 까지 방치되어 있던 항모 B의 해체가 결정됨에 따라 고철로 해체되었다. 진수 전 해체되었기에 함명 대신 가칭으로 불리나 만약 진수되었다면 1차대전의 비행선 부대 지휘관 페터 슈트라서(Peter Strasser)의 이름을 땄을 가능성이 크다.

Flugzeugträger C,D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여파로 Z계획이 반토막 나게 됨에 따라 실제 기공되기라도 했던 B와 다르게 C,D는 취소되어 오직 설계도상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독일은 그라프 체폘린 말고도 항공모함 건조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각각 중순양함과 민간 여객선을 개조하려 했던 베저와 오이로파가 있다. 베저의 경우 어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4번함 자이들리츠의 항모화로 상당부 공정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중단되었고 전후 소련이 자국 중순양함 탈린의 건조용으로 습득하고자 하였다.

둘러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가 패배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항속거리 부족이었던 만큼 그 단점을 메꿔줄 항공모함의 존재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함재기 40대 정도인 항모라 해도.
  2. 일러스트리어스급 역시 적은 함재기 수량이 단점으로 꼽히긴 한다.
  3. 그리 특별한 경우는 아닌 것이, 렉싱턴급 항공모함은 203밀리 함포탑을 배치하기도 했다. 항공모함에 대함 무장이 불필요하단 인식은 전쟁 중 후반대 부터 반영된다.
  4. 체펠린 선수의 갑판 지지용 기둥 역시(잘 보이진 않으나)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 또한 선수의 외형은 참고 대상이 된 커레이저스급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