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돈 (1900년)

권오돈 (1900년).jpg

權五敦. 족보명은 권오상(權五尙), 자는 전현(田賢).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10월 12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일리(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서 출생했다. 대한광복회 고문으로 활동한 권준희의 손자이며, 6·10 만세운동을 기획한 권오설의 사촌 아우이다. 그는 1924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화요회(火曜會)계 청년운동단체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에 가입하며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1926년 4월 10일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한 그는 권오설의 지도 아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와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 후 학생운동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붕어하고 권오설과 연결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 만세운동을 추진했을 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탄로나면서 권오설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학생조직의 계획은 발각되지 않아 권오돈 등은 계획대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원래 태극기와 격문 등은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측에서 준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전 발각되어 모두 압수되었다. 이에 권오돈 등은 급히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기 등을 제작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 국장일에 권오돈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같은 해 8월 4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그는 1928년 2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끝내 고문의 여독으로 같은 해 6월 3일 숨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권오돈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디지털안동문화대전[1]
  • 독립유공자 공훈록[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