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누리려면 의무를 다해야 한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통념이다. 이 통념에 따르면 권리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다함으로서 얻는 보상이라는 개념이다. '권리를 누리려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통념은,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의무를 이행해야만 권리를 올바르게 이행할 자격이 있으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무임승차자들이다' 라는 논리를 펼치게 된다.

오랜 반공주의우파권위주의, 독재주의 정권 하에서 좌파자유주의 이념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이 개념은 사실상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자칭 리버럴이나 자유주의 세력을 자칭하는 사람들(가령 루리웹이나 오늘의 유머)등에서도 정작 권위주의 우파의 잔재인 이 통설을 받아들여 여성징병제양심적 병역거부 사안에서 여성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데 쓰인다.

문제점[편집 | 원본 편집]

세계 인권선언만 보더라도, 권리를 누리기 위해 의무를 다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권리는 그저 인간으로서 주어질 뿐이다.

인간의 권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며, 의무를 이행함으로서 '획득'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이들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결과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가령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1]은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인권, 생명권, 재산권을 보호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중증장애인이 아니라도,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하면 5급과 6급은 사실상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2] 의무에서 면제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행하지 않은 의무에 대해서 어떻게 권리를 보장받는단 말인가? 이들은 특권층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의무의 이행과는 별개로,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 저들이 어떻게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가에 대해서 정당화하는 논증을 만들지 못하는 한, '권리를 누리려면 의무를 다해야 한다'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강력한 반례에 부딛히기 마련이다.

또한, 권리를 누리려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이 정당화된다면,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의무를 더욱 성공적으로 이행한 사람은, 더 강력한 권리를 누려도 상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가령, 부자들은 아무리 정부가 우파 성향이라서 소득세를 감면해준다 하더라도, 서민, 빈민들보다 더욱 많은 세금을 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많이 벌기 때문에 부과되는 세금의 절댓값이 서민, 빈민들보다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서민, 빈민들보다 더욱 강력한 권리를 누려서, 가령 똑같이 범죄자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에도 국가의 경찰력으로부터 더욱 엄중한 보호를 받고, 전시에도 서민, 빈민들보다 더욱 우선적으로 보호받아도 상관없는가? 군복무의 예시를 들자면, 특전사나 공수부대 등에서 병역을 이행한 남성들은 후방의 땡보 부대에서 병역을 이행한 사람보다 더욱 우수하게 의무를 이행했고, 현역들은 사회복무요원보다 더욱 우수하게 의무를 이행했으므로 이들에게 권리를 차등 적용해도 될까? 이에 동의할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권리를 누리려면 의무를 다해야 한다' 옹호론자들이 반론하기 이전에, 그 부자들은 서민, 빈민들보다 더욱 의무를 우수하게 수행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더 우수한 의무 수행자에게 더욱 우선적 권리를 주면 안 되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물론 이 명제를 반대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인간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권리를 누리려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통념은 일종의 존경성 정치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사회적 다수자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통념에 부합하고 일치함으로서 자신들이 '다수자들로부터 존경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 수행할 것을 요구하는 의무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대한민국식 존경성 정치 논리에서는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존경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징집되어 군생활을 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고, 곧 그의 정체성(여호와의 증인 신도, 평화주의자 등의 신념이나 정체성이 포함될 수 있다)을 부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에 퍼져있는 또 다른 통념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 같은 경우에도, 일부 동성애자들이나 무성애자 등의 성소수자들 입장에서는 존경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정상가족을 형성하는 것은 곧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고, 심지어 일부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하지 않은 채 이성과 결혼하였을 경우, 많은 경우 불행한 결혼생활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그 성소수자와 결혼한 이성의 피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이다.

종교적 관용이 자리잡지 못하고, 특정 종교 근본주의 또는 극단주의가 강한 곳에서도 이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가령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다수인 사회에서는, 그 사회에서 존경성을 획득하는 법은 오직 무슬림이 되어 샤리아 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 심지어 무슬림이라도 다른 교파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존경성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참고 문서[편집 | 원본 편집]

  • 스파르타: 바로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이들에게 권리를 주지 않은 케이스다. 이 나라에서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병역을 완수해야만 했으며, 아예 그럴 능력이 없는 장애인들은 처음부터 제거당했다. 게다가 스파르타는 '의무를 수행하게 시키고도 권리를 주지 않은' 케이스였는데, 반자유민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페리오이코이' 계층은 군복무의 의무는 있었으나, 이 의무를 이행한다고 해서 참정권을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각주

  1. 역사적으로, 아무리 극악한 군국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중증 장애인들을 징집한 적 없다.
  2. 엄밀히 말하면 신체검사 5급은 제 2 국민역으로, 완전한 병역의무의 면제가 아니라, 전시에는 군수산업에 징용되는 등의 병역이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6.25 전쟁 시기 이후로 대한민국이 전시 체제에 돌아간 적은 없으며, 신체검사에서 5급을 받은 남성들은 '형식적'으로만 의무가 주어졌을 뿐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괜히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 5급이 면제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