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희주

郭喜主.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10월 2일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면 서정리(현재 전라남도 여수시 서정동)에서 출생했다. 전라남도 목포의 정명여학교에 재학중이던 1921년 11월, 동아일보를 읽던 중 워싱턴 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조선 민족대표자도 반드시 이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11월 13일 오후 4시 천귀례·김나열·박음전·문복금·김연순·박복술·주유금·김옥실·김귀남·김자현·이남순 등 동교생 열두 명과 학교 기숙사에 모여서 독립운동을 개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방법으로 다음 날 14일 정오 오포(午砲)를 신호 삼아 각자 대한제국기를 휴대하고 교문을 나와 목포 시가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할 것을 협의하였다. 곽희주 등은 그날 정명여학교 기숙사에서 대한제국기 수십 매를 함께 제작하였다.

11월 14일 오전 수업 종료 후, 정명여학교 학생과 교사 등이 휴식 중인 정오에 오포를 신호로 20명 모두가 국기를 손에 들고 동교 정문을 나왔다. 이 가운데 11명은 각자 휴대한 국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동교 정문으로부터 목포부 남교동 방면으로 행진했다. 만세 시위를 본 다른 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가지고 뒷문을 나와 휴대한 국기를 흔들거나 손을 들어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고창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녀는 1921년 12월 28일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22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다.[1]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2년 7월 23일 만기출소하였으며, 그 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곽희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