郭權膺(또는 郭權應).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1월 7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리면 망덕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개신교 장로회 신자로, 1919년 2월 26일 이일영, 김이제, 정일선 등과 함께 평양희 6개 장로회 교회에 통지서를 보내, 고종의 봉도식(奉悼式)을 거행하는 숭덕학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했음을 알렸다. 장로계가 주도한 숭덕학교 집회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고종의 봉도식을 간단히 치른 뒤 독립선포식을 거행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독립선포식은 김선두(金善斗)의 사회로 정일선의 독립선언서 낭독, 곽권응의 인도 아래 애국가 봉창, 강규찬(姜奎燦)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독립선포식이 끝난 뒤 황찬영, 윤원삼 등과 함께 천여 군중에게 수백 개의 태극기를 배포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시위대는 장대현, 관후리를 지나 종로 큰 사거리로 행진하였고, 그곳에서 천도교 측과 기독교 감리교계 시위대와 합세했다. 이에 일본 군경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고, 곽권응 등을 체포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했고, 1919년 9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로 감형되었다.[2] 이후 서울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1950년 6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곽권응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헀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