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제도

- 시기에는 제도가 만들어진 초기였고 귀족들이 있어서 미래와 형태가 달랐다. 정기적이지도 않았고 시험 성적만으로 합격이 결정되지도 않았으며 기준도 마음대로 정했다. 그러다 송나라 시대에 미래와 비슷하게 되었다. 원나라 시대에는 다시 수-당과 비슷하게 되려다 명나라 시대에 송나라처럼 돌아갔고 청나라는 귀족들이 있었으나 명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조하지 않았다.

조선[편집 | 원본 편집]

조선시대 문과백서에 의하면 일부 씨족이 과거 급제자를 독점하였으며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에 의하면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합격자의 53%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2가문이 20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태생적인 상류층 정신[1]이 있었던 양반들은 과거에만 만족하지 않았고 그들의 학문적 실력[2]은 나머지 계층 전체를 능가했다.

양반들은 고려 귀족의 후계였기에 아직은 귀족적 정신이 있었고 과거 제도가 있어도 하층민들과 피를 섞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서얼차대법과 서얼금고법 등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한품서용제[3]로 과거 합격자 역시 신분마다 차등을 두었다. 물론 서얼은 문과 응시가 금지당하여 중인보다도 안 좋은 측면이 있었으나 그들은 지배층의 일원[4]이기도 하여 중인보다 유리한 점도 많았고 전주 이씨 등은 예외였다. 왕족의 서얼은 군호를 받고 적자에 비해 차별받긴 했으나 왕위 계승권[5]도 있었다. 그들은 일반 양반 취급을 받았다.

단순히 제도적으로만 보면 양반들의 귀족 정신이 약해진 후기에 이런 질서가 문란해지기도 했다.

각주

  1. 존 던컨의 조선왕조의 기원에 의하면 주요 양반 가문들의 대다수가 고려시대의 귀족 출신이었다.
  2. 수학만 해도 이미 십차방정식까지 풀고 있었으며 심지어 농업이나 상공업에 관한 학문도 양반들이 더 뛰어나서 지주나 거부로 성장할 수 있었다.
  3. 양반의 서얼과 중인은 정3품까지, 지방 중인은 정5품까지, 지방의 하급 중인인 서리는 7품까지 한계가 있었다. 한품서용법의 기원은 이미 신라의 골품제와 고려의 관리서용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 조선의 귀족 출신 양반들은 평민 이하는 사생아를 낳든, 재가를 하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았고 이것들 역시 같은 과거 합격자라도 자신들과 출신이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는 문화 중 하나이기도 했다.
  5. 사실 계승권은 일반 양반들의 서열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