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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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공산성
공산성.JPG
공주 공산성
건축물 정보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2번지
대지면적 371,621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12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경주 공산성(公山城)은 백제가 수도를 웅진(현 공주시)으로 삼았을 때 백제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산성이다. 금강 바로 옆의 야산과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본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돌로 쌓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 성의 명칭은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웠다.

특성[편집 | 원본 편집]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 치성, 고대, 장대, 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 영은사, 연지, 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꽤 오랜 세월 사용된 성인데다 국가의 수도 또는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계속해서 자리한 곳이다 보니 성의 모습도 해당 기간만큼 뒤섞여 있는 측면이 있으며, 유물도 꽤 다양하게 나오는 편이다.

이야깃거리[편집 | 원본 편집]

  • 백제의 사비성 함락 당시 의자왕이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으며, 이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 거점이기도 하였었다.
  • 백제 멸망 이후 세월이 한참 지난 뒤 통일신라시대인 822년에는 김헌창의 난에서 김헌창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었다.
  • 조선시대 이괄의 난 당시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 왔었다.
  • 2011년 10월 공주대박물관이 공산성 내부 저수조를 발굴하다 가죽제 찰갑을 발굴했다. 이 갑옷에는 "정관 19년"(貞觀十九年)이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있으며 이외에 식별이 가능한 글자 20여자와 갑옷 뒷면에 제작자가 한 것으로 추정되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