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윤

孔德允(또는 孔德潤).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9년생이며,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 사덕리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멕시코로 노동이민하여 멕시코 메리다에 거주했다. 그러다 1912년 와하케뇨 지방의 에네켄 노장에서 노동자를 모집하자 이주하였다. 이후 와하케뇨지방회가 조직되자, 1912년 6월 동 지방회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7월경에는 동 지방 거주 한인 2세들의 교육을 위해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세우자, 찬성원으로 의연금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1917년 6월 와하케뇨가 멕시코 내전에 휘말리는 바람에 지방회는 폐쇄되었고, 그는 메리다로 피신했다.

1922년 10월 멕시코 메리다지방회에서 1923년도 임원을 선정할 때 부회장 후보자를 맡았다. 1925년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그해 2월 대한인국민회 창립기념식과 8월 29일 국치긴며식을 주관하며 연설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하여 1926년 1월 ‘임시정부 제1호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다. 1926년 메리다 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7년 5월 1일 메리다 지방회 주최로 열린 순국선열 추도식에 참석핬고, 1940년에는 지방회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14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여러차례 지원했다. 이상의 내용은 <신한민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1]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공덕윤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이후 2021년 9월 22일 LA총영사관 윤완주 영사가 센디에이고에서 공덕윤의 둘째 아들 데이비드 공 살라스 씨에게 대통령표창장을 전수했다. 윤 영사는 “25년 전 샌디에이고로 이주했다는 아드님은 표창을 받고 무척 감격하셨다”면서 “연세가 91세의 고령으로 한국어를 전혀 못 하시는 데도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며 애국가 1절을 거의 완벽하게 부르시더라”라고 전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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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