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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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平. 이명은 고인석(高仁石), 고고찬(高高鑽).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6년 4월 8일 전라도 고부군(현재 정읍시)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2년 서울 보광중학교(普光中學校)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관립법관양성소(京城官立法官養成所)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했다. 이후 1905년 4월에는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다 불교에 심취한 그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전북 부안 내소사(來蘇寺)에 기거하면서 불교를 공부했고, 1911년 7월 대종교에 입교한 후 남도, 동도본사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 후 1919년 2월 18일에는 중국 지린성 연길현 국자가 하장리에 거주하는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金永學), 유예균(劉禮均) 등 33인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이 회의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는 대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고, 같은 해 3월 13일 용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4월, 간도에서 조직된 조선독립기성촉성회에 가담한 고평은 고덕승(高德勝)·이상호(李相鎬)·지송(池松) 등과 함께 인근 지역으로 파견되어 독립만세시위로 인해 체포된 인사들의 빈자리를 보충하기 위해 활동하다 연해주에서 개최된 신국민대회(新國民大會)에서 서일, 구춘선, 서왈보 등과 함께 참가했다. 그리고 연길현 명월구에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해 총재에 이범윤, 총사령에 김현규(金鉉圭), 참모장에 진학신(秦學新)을 추대하고 자신은 의군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 8월 하순에는 종국 토군이 일제에게 매수되어 의군부를 공격하려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150명으로 감사대(敢死隊)를 조직, 노야령에서 전투를 벌여 중국 토군을 격퇴했으며 청산리 전투 후에는 밀산을 경유하여 연해주로 들어가는 북로군정서군을 종군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벌어지자 연길로 돌아와 의군부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그는 연길현 춘양향 합마당에 위치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군정사군무서(軍政司軍務署) 독판(督辦) 서일 휘하에서 김덕현(金德賢)·손범철(孫範哲) 등과 함께 군정회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5월, 고평은 연길현 명월구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總司令)에 김규식을 추대했으며, 자신은 참모장에 선출되어 400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그는 군사훈련과 조직 강황를 병행하고 국민개병제로 병농일치의 둔전제를 실시했으며, 연해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오는 등 군세를 확충했지만 실제로 전투를 벌이지는 못했다. 그뒤 1928년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의 생활정착에 힘쓰다가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고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