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준

高相俊.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12월 17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 중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에 거주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10일, 사립 창영학교 교사 엄창섭이 주도하는 강경 옥녀봉 만세시위에 곽성진(郭性鎭)·석광열(石光烈)·박금봉·추병갑(秋炳甲)·김종갑(金鍾甲) 등과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그는 1919년 3월 8일 강경읍에서 종이 60매, 물감 30전 어치를 구입하여 엄창섭, 추병갑 등과 함께 창영학교에서 태극기를 그렸으며, 9일부터 10일 아침까지는 김종갑, 추성배(秋聖培) 등이 협력하여 2백여 개의 태극기를 완성했다.

3월 10일 아침, 서삼종(徐三鍾)이 태극기를 가마니 속에 넣어 지게로 집합장소인 강경읍 옥녀봉으로 운반했다. 그 후 오후 3시가 되자, 고상준 등은 군중 500여 명과 함께 옥녀봉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으며, 이후 시위는 강경 웃시장(上市場)으로 확산되어 그곳 군중들도 합세했다. 그러나 재향군인과 소방대가 출동해 시위를 진압했다.

고상준은 체포된 후 1919년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했지만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2] 출옥 후 1930년에는 같이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강세형(姜世馨)을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고 하며,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다 1977년 7월 25일 강경읍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고상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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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