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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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道屹.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2년 10월 25일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노은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초 맹시정(孟時楨) 등 풍산지역 교인들과 함께 경성에서 교주 손병희가 주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3월 13일 하지경리 천도교실에서 풍산에서의 만세시위를 어찌 준비할지 논의한 끝에 3월 14일 만세시위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3월 14일 당일, 그는 맹시정 등과 함께 천여 명의 신자들을 모아 교당 안에서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 뒤 군중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태극기를 높이 흔들었다. 경찰이 교당 안에 들어와 내쫓으려 했지만, 군중은 이를 물리치고 시가행진을 하며 헌병분견소 앞까지 이르렀다. 이에 헌병대가 총격을 가했고, 군중 2명이 현상에서 사망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일로 체포된 고도흘은 1919년 7월 14일 1심에서 징역 8개월, 벌금 30원, 노역기간 30일을 선고받고 공소했다. 1919년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되었다.[1] 그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지만, 1919년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2]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고도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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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