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光洵.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 또는 鹿泉).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48년 2월 7일 전라도 창평현 군내면 유천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부친 고정상(高鼎相)과 모친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어렸을 때 백부인 고경주(高慶柱)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고경명의 12대손이자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의 봉사손(奉祀孫)이었다. 그는 10여년 간 학문에 전념하면서도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잘 도와줘 진실로 덕을 좋아하는 군자로 향리에서 화자되었다. 고광렬의 <녹창공행장>은 당시 그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차츰 장성하자 상월정(上月亭)에 올라가 10년 동안 문을 닫고 마음을 다해 육경을 전공하여 은미한 사연(辭緣)과 심오한 뜻을 조목조목 분석함으로써 경의(經義)에 매우 밝아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공부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를 항상 스스로 강명(講明)하였다. 이로써 잡지(雜誌), 쇄록(鎖錄) 등 제가(諸家)의 저작은 절대로 눈길을 두지 않았고, "이는 족히 마음에 해가 될 따름이다. 하필이면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취하겠느냐"고 말하였다. 스스로 뜻을 세움이 확고하여 옛 군자의 지위를 목표로 삼은 것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장성한 뒤 입신양명하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고자 상경했지만 과거가 매우 문란한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해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혼란한 시국을 개탄하며 울분의 나날을 보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벌어지고 뒤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각지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키려 했다. 전라도에서는 1895년 겨울부터 장성의 기우만을 중심으로 의병을 준비했다. 그는 여기에 가담해 호남의 유림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단발령을 철폐하고 옛 제도를 복구할 것이며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을 배격하고 개화파를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전라도 각지에 기우만의 이름으로 격문을 발송하며 의병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다.
1896년 음력 2월 7일, 고광순 등은 장성 항교를 본거지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음력 2월 11일 200명을 이끌고 나주로 이동한 뒤 나주의병과 만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절한 김천일의 사우고지(祠宇故址)에 단을 설치한 후 제문을 바치고 나주의 진산 금성산에 위치한 금성당(錦城堂)에서 제사를 올렸다. 이어 지방의 거점을 확보한 후 군사를 모아 북상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 아울러 북상하기 위한 거점을 광주로 확정짓고 음력 2월 하순 장성 의병이 광주로 본진을 옮겼다. 이때 나주 의병은 후방을 방어할 목적으로 나주에 주둔했다.
조정은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선유사 신기선(申箕善)과 친위대를 파견했다. 신기선은 호남대의소장(湖南大義所將)을 맡고 있던 기우만에게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명을 전했다. 이에 기우만은 음력 28~29일 경에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시켰다. 고광순은 임금의 명령이니 해산하긴 했지만 그 명이 국왕의 본심이 아니라 적신(賊臣)들의 협박 때문에 내려진 것이라고 여기고 동지, 지사들을 규합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1905년 11월,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게 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광순은 이에 분노해 의병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1906년 음력 4월에 일어난 최익현의 의병대에 가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가담하기 전에 최익현 등이 순창에서 관군에게 투항해버려서 실제로 가담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고광순은 백낙구,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 중대사(中大寺)에 집결하여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들은 음력 9월부터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격문을 각지에 발송해 동지를 규합했다.
하지만 고광순은 중형(仲兄)의 장례일로 인해 창평으로 돌아갔다가 거사일에 당도하지 못했고, 백낙구 등은 중대사에서 고광순이 합류하지 않은 채 의병을 일으켰다가 구례 군수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순천분파소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광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은 뒤 완도군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한편 기우만 역시 1906년 음력 10월에 체포되었지만 백낙구와의 연관성을 입증할 물증을 찾지 못한 일제 경찰이 그를 풀어줬다. 1907년 초, 고광순은 김상기, 이항선 등과 함께 기우만을 찾아갔다. 그는 여러 번의 실패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의병을 준비했다.
1907년 2월 12일, 고광순은 남원의 향리 출신 양한규와 연합하여 남원성을 장악하기로 했다. 고광렬의 <녹창공행장>에 따르면, 고광순은 이 무렵 고종의 <애통조(哀痛詔)>를 비밀리에 받고 총리호남의병대장(總理湖南義兵大將)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광순의 의병활동을 기록한 다른 사료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고광순은 양한규와 함께 남원성을 점령하기 위해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했다. 이때 모인 인원은 40명이었고, 의병장에는 고광순이 추대되었으며, 부장엔 고제량, 선봉장에 고광덕,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모 박기덕(朴基德), 호군에 윤영기(尹永淇), 종사에 신덕균과 조동규(曺東圭)가 이명되었다.
이들은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약 40명 규모였고 곡성에서 포수와 무기를 수습해 70명으로 증원한 뒤 남원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들이 남원에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가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가 패퇴하면서 남원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고광순은 어쩔 수 없이 비홍치를 넘어 담양군 평창으로 회군했다. 이후 그는 능주의 양회일(梁會一), 장성의 기삼연과 연합하여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활동 무대로 삼고 일본군에 대항했다. 1907년 4월 25일에는 화순읍을 점령하고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 호를 소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 동복으로 진군하던 중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에게 도마치에서 요격당해 패퇴하고 말았다.
거듭된 실패를 겪은 고광순은 새로운 전략을 추진했다. 그는 화력과 훈련 면에서 압도적인 일제 군경과 맞서 싸우지 말고 ‘축예지계(蓄銳之計)', 즉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고 의병을 기른 후 장기적인 항전태세를 갖추기로 했다. 그는 지리산을 축예지계에 적합한 곳으로 판단했고,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 중 피아골을 선택했다. 피아골은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엔 화개동(花開洞), 서쪽으로 구례, 그리고 북쪽에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험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유리했다. 그는 피알골의 중심인 연곡사에서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일제 군경과 맞설 만큼의 전력을 축적하고자 했다.
1907년 9월 11일, 고광순은 자신을 도독으로 삼고 그 아래에 박성덕과 고제량을 도총 및 선봉으로 삼고, 신덕균, 윤영기 등을 참모로 정하는 등 편제와 전열을 재정비한 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구룡산 아래에 당도했다. 이후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동복을 공략하기로 하고 9월 15일 새벽에 헌병분견소를 공격했지만 일제 군경의 반격으로 도포사(都炮士) 박화중(朴化中)이 전사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일제 측 기록인 <전남폭도사>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9월 15일 오전 6시 폭도 약 60명이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보조원 2명이 교전했으나 중과부적이라 광주로 철수하였다. 미야가와(宮川) 보좌관은 보좌관 6명, 순검 1명을 이끌고 특무조장 1명, 병졸 7명과 협력, 토벌했으나 적은 시체 한 구를 버리고 도주한 뒤였다.
이후 고광순은 의병대를 이끌고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가 연곡사를 의병대 본영으로 삼고 지리산 부근의 영남, 호남 각지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연이어 배포했다. 또한 그는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썼다. 불원복은 '머지않아 회복한다'는 의미로, 언젠가는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또한 그는 고광덕과 윤영기에게 각각 1개 부대를 줘서 유격전을 전개하게 했다.
이 무렵, 김동신이 이끄는 의병대가 무주 덕유산과 정읍의 내장산, 그리고 장성의 백양사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하던 중 순창읍의 우편취급소 및 분파소를 습격한 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구례군 토지면 문수골에 있는 문수암으로 이동했다. 일제 군경은 문수암까지 이르렀지만 의병이 자취를 감추자 문수암을 불태운 후 화개동으로 내려와 주둔했다. 이에 고광순이 파견한 고광덕과 윤영기가 화개동 근방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자, 일본군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은 의병을 철저하게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은 진해만 중포병 20명과 진주경찰서 순사 3명, 순검 6명을 동원하여 10월 16일 새벽에 연곡사로 진격했다. 고광순은 적이 다가오자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한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것으로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너희는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 “
고계량이 답했다.
“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습니까? “
그 후 고광순 이하 40여 명은 일본군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패했고 고광순 이하 25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일본 측 기록인 <진중일지>에 따르면,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1,200발의 탄환을 소모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전투가 끝난 후 연곡사의 14개 건물과 문수암을 소각한 뒤 철수했다.
고광순은 당초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구례에서 명성이 자자한 문인인 매천 황현에게 격문을 써달라고 요청했지만, 황현은 자신의 글솜씨가 명성과는 달리 형편없어서 도움이 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광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기우만이 실패하자 사람들의 원성이 커져 향리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용감하게 국가의 치욕을 씻을 것을 생각한 공은 유유히 길을 떠나 집안 식구들의 생활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의병활동만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형세는 구애받지 않고 그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남루한 모습으로 영남과 호남을 오가면서 의로운 사람이 있단느 소문을 들으면 자신이 좋아서 곧바로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함께 거사할 것을 권고하였다. 사람들은 간혹 비웃기도 하였지만 더더욱 권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미친 사람 같이 슬퍼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다. 그러한 활동이 이미 오래되어 자취가 약간 드러나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위태롭게 생각하였다.
그후 고광순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현은 즉각 현장으로 달려와서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과 함께 무덤을 만들고 그를 위해 추모시를 지었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이후 그의 유해는 창평 향리로 옮겨져 안장되었다가 2012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또한 1958년에 연곡사 옆 서부도 근처 동백나무 숲에 그를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졌으며, 1969년 그의 생가 터에 포의사(褒義祠)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고광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