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정치

계파정치(系派政治)는 정치적 이해관계 또는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뭉친 정치세력들이 계파(파벌)를 구성하여 이루어지는 정치이다. 조선 중기 이후 붕당 안에서 서로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된 당파도 계파정치의 조상격으로 볼 수 있다.

특징[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 있어서 계파는 항상 존재하여왔다. 다만 대한민국의 현대화가 워낙 급박스럽게 이뤄졌고, 광복 이후 이데올로기에 따라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공산주의가, 남쪽은 민주주의가 성립되면서 자연스럽게 특정 정치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이 이뤄지면서 계파정치가 녹아들게 되었다.

3김 시대[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서 계파정치가 가장 활발하면서 동시에 정치사에 큰 영향력을 준 시기는 바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전성기를 보낸 3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은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아 투쟁을 지속했고, 박정희 서거 이후 혼란스러운 국정을 틈타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제5공화국에서도 끊임없는 민주화 투쟁을 지속하였다.

김영삼이 이끄는 정치세력은 상도동계, 김대중이 이끄는 정치세력은 동교동계라 불렸는데 이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자택이 위치한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들은 아침마다 자택에 모여 조찬을 함께 하거나 취미활동 등[1]을 같이 하면서 단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달리 말하면 보스정치라 불렸는데 워낙 김영삼, 김대중 두 거물들의 존재감이나 위상이 대단하여 다른 정치인들의 다양한 주장이 나오기 어려울 만큼 영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양김보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했던 김종필 역시 3당 합당 과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면서 나름대로의 지분을 확보하였다. 이후 김영삼이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민주계에 주류를 내준 공화계가 소외된 끝에 민자당과 결별을 선언하고 충청권을 기반으로하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다시 대권 도전을 위하여 복귀하면서 여당의 후보였던 이회창에 맞서기 위하여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연대하여 이른바 DJP연합을 결성 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일조를 하였지만, 역시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약속했던 내각제가 실현되지 못하였고 2년여 만에 김대중과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 야당으로 돌아갔다. 김종필은 각각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기여를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양김에게 이용을 당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계파정치의 명암[편집 | 원본 편집]

계파정치는 계파의 수장을 중심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단일대오를 갖추기 쉬워 영향력을 강하게 발휘할 수 있다. 특히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도 김영삼, 김대중 등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갖춘 인물들이 구심점이 되어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반면 계파의 수장의 의중에 따라 정치가 행해졌기 때문에 내부에서 정당한 비판을 쉽게 할 수 없다거나, 워낙 거대한 세력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특정 정치인의 사당(私黨)화가 되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계파의 수장이 현실 정치를 떠나게 될 경우 후계자가 마땅치 않다면 계파 내부에서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이 쉽게 나타나고 한솥밥을 먹던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상황도 자주 표출하게 된다. 이를 언론에서는 계파갈등이라고 언급한다.

한 계파가 당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거나 집권기에 큰 실패를 겪은 경우 다른 계파에 의해 선 긋기나 탄압당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친박계가 다른 계파한테서 손절을 당한 것 등이 있다. 사실 한 정당의 생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일부 올바른 말을 한 사람이 있음에도 해당 계파라는 이유로 탄압당하는 것이 비민주적이다.

대한민국의 계파[편집 | 원본 편집]

인물 중심[편집 | 원본 편집]

  • 동교동계
    김대중을 중심으로 뭉친 계파이며 명칭은 김대중의 자택이 위치한 마포구 동교동에서 유래했다. 동교동계는 김대중이 사실상 해체 선언을 하면서 역사 속으로 남게된다.
  • 상도동계
    김영삼을 중심으로 뭉친 계파이며 명칭은 역시 김영삼의 자택이 위치한 동작구 상도동에서 유래했다. 매우 오래된 계파로 현재는 동교동계와 마찬가지로 해체되었다.
  • 친노
    노무현을 중심으로 뭉친 계파이다. 노무현 사후 문재인을 중심으로 하는 친문으로 결집하였다.
  • 친이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친 계파이다. 의외로 민주계 출신이다. 대선 과정에서 지리멸렬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손쉬운 대선이 예측되었고,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결정되면 17대 대통령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분위기 속에 경쟁자였던 박근혜와 감정싸움을 동반한 극한의 경선을 치렀고, 대통령 당선 이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대놓고 박근혜 계파에 대한 공천학살을 벌이는 등 계파갈등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다가 박근혜 탄핵 이후 새누리당에서 갈라져 나온 바른정당의 창당 멤버들이 대부분 친이계였고, 이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는 과정에서 막후에서 실세로서 영향력을 발휘한 핵심 인사들(일명 윤핵관)도 대부분 친이계 핵심 인사들이다.
  • 친박
    박근혜를 중심으로 뭉친 계파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공천학살로 당내 지분이 크게 줄어드는 수모를 당하였고 급기야 박근혜는 친박연대라는 정당을 따로 창당하여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인사들이 다시 새누리당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물밑에서 지원하였다. 이명박에 이어 18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는 기다렸다는 듯 20대 총선에서 친이계를 대놓고 배척하면서 친박 위주로 공천을 진행하였다. 친박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면서 사실상 공중분해 수순을 밟았고, 박근혜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탄핵이 인용되어 파면되면서 사실상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처지가 되었다.
  • 친문
    문재인, 이낙연을 중심으로 뭉친 계파이다. 노무현 사후 그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던 문재인이 민주당의 유력한 정치인이자 구심점으로 떠올랐고, 박근혜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19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일약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계파로 자리잡게 되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낙연이 사실상 친문의 후계자라는 평[6]을 받고 있었고 실제로도 문재인의 적통을 내세워 경선에 출마했고, 20대 대선 경선에서 친문은 이낙연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경쟁자였던 이재명에 대한 비토를 강하게 표출하는 등 당내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선 결과 이재명이 이낙연을 누르고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이낙연이 승복 선언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내분을 키웠고, 이낙연 지지자들도 가세하여 불복시위를 하기도 했고 이재명도 19대 대선 경선 과정에서 당시 유력한 후보였던 문재인에게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난과 비판을 했던 만큼 친문과 이재명의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재명이 2022년 하반기 사법 리스크로 위태해지며 친명이 불리해지자 친낙, 친문이 다시 세력을 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낙연이 6월 말에 귀국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친문에서 친명으로 전향했던 지지자들이 다시 친낙으로 전향할 가능성은 예측할 수 없다.
  • 친명
    20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재명을 중심으로 뭉친 계파이다. 이재명 본인이 민주당의 비주류에 속했던 인물이어서 그를 지지하는 국회의원의 숫자 자체도 적고, 당내 기반도 약했지만 친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이낙연과 치열한 경선을 거치면서[9]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당내 소장파 의원들이 다수 합류하여 당내 지분을 제법 확보하게 되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주류 계파이다. 그런데 2022년 하반기 이재명 측근부터 시작한 검찰/경찰의 조사와 사법 리스크로 인해 친명의 눈치를 봤던 반명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려하고 다시 민주당 내의 친명, 친문 갈등이 커졌다.
  • 20대 대선에서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윤석열을 중심으로 뭉친 계파이다. 윤석열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갈등을 거치면서 정권 심판론과 맞물려 전통적인 보수 세력에 의해 형성되었다. 대선에서 윤석열이 20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자연스럽게 정권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비록 정치적 경력이 없는 굴러온 돌이었지만 뒷받침을 해주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세력은 윤핵관[10]이라 불린다. 물론 윤핵관이라는 별칭은 이들을 콕 집은 부정적인 뉘앙스 및 이들을 비판하는 논조가 담긴 명칭이다. 현재 국민의힘의 주류 계파이다.
  • 이태규, 최연숙, 권은희
    안철수를 중심으로 뭉친 민주계 계파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을 구성하기도 했으나 기존의 민주당 세력과 갈등이 있었고 국민의당을 창당하게 된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큰 성과를 얻기도 했고 잠시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비박계와 바른미래당으로 합당하고 안철수가 이탈하여 또 다른 국민의당을 창당한다. 국민의당은 다시 국민의힘과 합당을 하였고 이후 국민의힘에 부정적이었던 권은희는 친안에서 이탈했다. 친안은 친윤과 다툼보다는 함께 협력하는 노선으로 가고 있다. 국민의힘의 다수 계파보다는 약간 왼쪽으로 향해있다. 강성 보수에서는 '간철수'로 비난을 하고 친민주당 세력은 변절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특정 정파 중심[편집 | 원본 편집]

  • 민주자유당
    • 민정계
      3당 합당 이전 전두환과 노태우가 몸담았던 민주정의당의 당파이다. 김영삼 대통령 이후 하나회 숙청으로 입지가 줄었다.
    • 민주계
      김영삼을 중심으로한 상도동계가 민주자유당과 합당하면서 구성된 계파이다. 이후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일약 거대 여당의 핵심 계파로 자리잡게 되었다.
    • 공화계
      김종필이 민주자유당과 합당하면서 구성된 계파이다.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김종필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 후 충청 보수정당의 세력이 된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소장파
    비교적 젊은 사람들로 된 계파. 특정 인물이나 세력을 중심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의 파벌[편집 | 원본 편집]

자유민주당[편집 | 원본 편집]

  • 보수 본류
    요시다 시게루가 기원이다. 기존 평화헌법을 유지한다. 타국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일본의 민주당계 정당이 자유민주당의 보수 본류 출신이 많다.[14]
  • 보수 방류
    기시 노부스케가 기원이다. 자주 국방과 평화 헌법 개정을 목표로 삼는다.

본류와 방류의 구분은 너무 오래되어 현재는 잘 쓰이지 않는다.

중국의 파벌[편집 | 원본 편집]

파벌보다는 인맥 개념에 가깝다.

  •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 태자당
  • 상하이방
  • 저장방(친시진핑)

각주

  1. 김영삼이 전두환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고 정치활동을 제한당하자 민주산악회를 구성하여 자신의 세력들과 함께 등산을 하면서 물밑에서 정치활동을 지속한 사례가 있다.
  2. 김대중 퇴임 및 서거 이후 동교동계가 현실 정치에서 멀어졌지만 박지원은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친 실세였으며 김대중 서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현실 정치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민주당과 척을 지고 호남권 지역정당 색채를 띈 국민의당 출신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 국가정보원의 수장에 임명되는 등, 가히 처세의 달인, 정치 9단이라는 별칭에 걸맞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3. 김대중의 가신이라 평가받을만큼 민주계의 중심인물이었고 김대중 정부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으나 김대중 서거 이후 친노와의 갈등 끝에 친박으로 전향한 후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탄핵 소추로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는 등 보수정치인으로 변모하였다. 박근혜가 탄핵되면서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나게 되었다.
  4. 김영삼 정부에서 총무처(현재의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던 시절, 기자들과의 사석에서 노태우이 약 4,000 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였다는 썰을 풀었고 이 발언이 기사화되었다. 초기에는 노태우측이 강력히 반발하였고 검찰도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분위기였으나, 뒤이어 박계동이 노태우의 비자금 계좌를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5. 친박중에서도 실세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로, 이른바 진박의 핵심 인물이었다. 총선 공천권을 휘두르면서 진박 감별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박근혜 탄핵 이후 국정원 특활비 상납에 연루되어 뇌물죄가 인정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문재인 정부 말기인 2022년 3월 17일에 가석방되었다. 친박의 핵심 인물이었던만큼 재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6. 문재인이 퇴임한 이후에는 이낙연의 이름에서 유래한 친낙이라고 불린다.
  7.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였고, 퇴임 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에 선출되는 등 친문의 후계자로 평가받았다.
  8. 소장파
  9. 언론에서는 두 사람의 치열한 경선과정을 명낙대전이라고 이름붙였다.
  10. 윤석열 핵심 관계자
  11. 법무부 장관. 지지자들은 한동훈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밀고 있지만 한동훈이 법무부 장관으로서는 어떤 사람인지와는 별개로 정치적 센스가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고 정치 입문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없다.
  12. 국토부 장관
  13. 민주당계 출신
  14. 일본은 민주당조차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