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륵

갈빗대


계륵은 닭 계, 갈빗대 늑[1]으로 말 그대로 닭갈비를 나타낸다. 고사에 따르면 닭갈비는 먹을 살이 없지만 그대로 버리기엔 아까운 부분이므로 나에겐 필요없지만 주기엔 아까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계륵(鷄肋)은 중국 후한 말의 고사로, 유비가 촉을 정벌한 후 한중으로 진출하자, 이를 막기 위해 위왕 조조가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한중을 놓고 다퉜다. 그러나 뜻대로 한중을 점령하지 못하던 차에 계륵이라는 군령을 내렸는데, 당시 조조군에 종군하던 주부(主簿) 양수(楊脩)만이 이 말의 뜻을 알아듣고 조조가 군사를 물리려는 의중을 파악한다는 이야기다. 즉 내가 가지자니 가치가 없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주자니 아까운 그러한 물건이나 상황을 의미한다.

정사 삼국지[편집 | 원본 편집]

九州春秋曰:時王欲還, 出令曰「雞肋」, 官屬不知所謂. 主簿楊脩便自嚴裝, 人驚問脩:「何以知之?」脩曰:「夫雞肋, 棄之如可惜, 食之無所得, 以比漢中, 知王欲還也.」。
— 삼국지 위서 무제기

정사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나오는 일화다. 건안 24년(219년, 조조는 요충지 한중(漢中)을 놓고 유비의 군대와 격돌하게 되었다. 조조와 유비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한중을 선점한 유비는 주변의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고, 설상가상으로 조조의 상장 하후연황충의 기습으로 목숨을 잃는 등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조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쟁이 장기화되고 ,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면서 조조 역시 한중 공략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철군을 결심한 조조는 어느 날 문득 계륵이라는 군령(일종의 암구호)을 하달하였다. 조조 휘하 대다수 장수들은 이 군령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했으나, 오직 주부 양수만이 이 군령의 의미를 파악하고 스스로 군장을 꾸려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이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어찌 그 뜻을 알았습니까?"라며 물었고, 이에 양수는 "무릇 계륵은 먹자니 살점이 없어서 아쉽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까운 부위며, 이를 한중에 비유한 것이니 위왕께서는 곧 군대를 물리실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삼국지연의[편집 | 원본 편집]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소설적 상상력과 허구를 결합하여 계륵의 고사를 더욱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정사를 따랐으나, 정사에는 없는 세부적인 디테일이 추가되었고, 심리적인 묘사도 추가되었다. 한중을 놓고 유비와 다투던 조조는 한중의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방어를 하는 유비를 물리치지 못하여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게다가 하후연황충의 기습으로 목숨을 잃으면서 크게 흔들렸으며, 마침내 한중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대군을 친히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회군해야 한다는 것도 위왕으로서 체면이 서질 않으니 쉽사리 후퇴를 명령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조조의 밥상에 닭국이 올라왔다. 조조는 식사를 하다가 젓가락으로 집어든 닭갈비를 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때마침 병졸이 다가와서 오늘의 군령(암구호)은 무엇이냐고 물어봤는데, 이에 조조는 계륵이라는 답을 주게 되었다. 조조의 명에 따라 위나라 군중에 계륵이라는 암구호가 전파되었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유독 주부 양수만이 자신 휘하의 병졸들에게 곧 회군할 것이므로 돌아갈 군장을 싸라고 명령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후돈이 그 이유를 묻자 양수는 정사와 동일하게 "닭갈비는 먹자니 먹을 게 없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우므로 이는 한중을 의미하는 것이며, 위왕께서 군대를 물리실 의도이므로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하후돈도 동조하여 자신의 병졸들에게 회군할 준비를 시키게 되었다.

조조는 심란한 기분을 달래려 야간에 군중을 순찰하게 되었는데, 하후돈의 군영에서 분주하게 철수할 채비를 갖추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의아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하후돈은 주부 양수가 계륵의 의미를 파악하였고 그 말이 옳다 여겨 자신도 회군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조조는 격분하여 당장 양수를 잡아오라 명했고, 결국 군중을 어지럽힌 죄목으로 양수를 처형하였다.

조조가 양수를 처형한 것은 물론 자신이 직접적으로 회군을 명하지도 않았음에도 양수가 이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군중을 어지럽혔다는 이유였지만, 이전부터 양수는 조조의 의중을 꿰뚫고 한 수 앞서서 행동을 했으므로 주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었는데, 이를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던 조조가 건수를 잡아 처단한 것으로 묘사된다.[2]

양수를 처단한 이후 결국 조조는 버티지 못하고 철수를 결정하여 군대를 물렸고, 한중을 온전히 보전하게 된 유비는 한중왕에 등극하면서 촉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춘천의 향토음식이라 여겨지는 닭갈비를 떠올리면 의미가 상충될 수 있다. 닭갈비라는 명칭 자체가 닭의 갈빗살을 의미하기 때문에 계륵의 고사가 가리키는 부위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 닭갈비는 소나 돼지의 갈비구이와 유사한 식감을 가지도록 닭의 살을 발라내고 양념에 버무려 불판이나 석쇠에 구워먹는 형태로 변형된 것으로 닭갈비라는 명칭만 빌려왔지 실질적으로 닭갈비 부위와는 상관없는 요리로 볼 수 있다.[3] 만약 실제 닭갈비 부위를 요리하면 먹을 것이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는 닭갈비가 아닌 백숙이나 삼계탕 같은 요리에서 실제 닭갈비 부위를 살펴보면 먹을 만한 부위가 아니라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각주

  1. 갈비뼈를 한자어로 하면 늑골이다.
  2. 정사에서 양수는 회군한 이후 군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나, 계륵의 뜻을 알아차려 조조의 미움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연의는 회군하기 이전에 양수가 처형당한 것으로 각색되었고, 여기에 조조의 시기심을 곁들여 은연 중에 조조를 악당으로 묘사하려는 나관중의 창작이 추가된 것.
  3. 숯불 닭갈비라 불리는 석쇠구이 요리라면 아예 떡갈비와 유사한 형태로 가공된 순살 닭고기 패티가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