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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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경기전 입구.JPG
건축물 정보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번지
소유 국유
대지면적 49,589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339호
지정일 1991년 1월 9일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으로 조선 태종 즉위시기에 전주, 경주, 평양의 3 곳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어진[1]을 모시고 이를 어용전이라고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인 1412년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인 1442년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으로 그 이름을 달리 하였으며, 현재의 경기전은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탔던 것을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외에 이 경기전 내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도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이 전주사고는 임진왜란 당시에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고 살아남은 조선왕조실록의 보관소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전주사고 인근에다 조선왕조실록보전기념비를 따로 세워두었다.

전주사고의 모습

경기전 정전[편집 | 원본 편집]

경기전 정전
건축물 정보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번지
소유 국유
문화재 정보
종목 보물 제1578호
지정일 2008년 12월 1일

전주 경기전에서 특별히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놓은 건물이다.이 곳의 어진은 1872년 새로 모사하여 봉안된 영정으로[2] 이 건물 자체가 경기전의 가장 핵심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정전 기능과 내신문 내의 신도(神道)[3] 및 향로를 갖추고 있다.

정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외3출목, 내3출목이고, 5량 구조의 맞배, 겹처마 지붕이다. 살미의 쇠서가 발달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초각 처리되어 안정된 조선 중기의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 배례청은 이익공을 가진 익공계 양식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배례청의 박공면은 정전의 정면 모습이 된다. 정전과 배례청은 화강암 원형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5.8m나 되는 2개의 고주는 종보를 직접 받고 있으며, 양측면의 기둥도 대들보를 받는 고주로 되어 측부재 구조가 간결하고 견고하게 짜여있다. 포작의 내부 살미 조각과 보아지 및 종도리를 받는 파련 대공의 섬세한 조각과 우물천정 단청 등의 의장이 화려한 편으로 다른 유교 건축과 차별화된 권위성을 볼 수 있다.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며 견고하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전수된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는 건축적 품위를 돋보여준다.[4]

경기전 하마비[편집 | 원본 편집]

경기전 하마비
건축물 정보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번지
문화재 정보
종목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2013년 11월 15일

하마비는 과거 높으신 분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이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서 해당 시설에 모셔진 분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표하라는 의미였다. 특히 이 전주 경기전의 하마비는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위패와 어진이 봉안되어 있는 중요시설이어서 사실상 국가 1급 시설물이나 다름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하마비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기전 앞에 있는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이 뜻을 풀이하면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말에서 내릴 것이며,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다른 하마비와 달리 판석 위에 비석을 올려놓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해태가 등으로 떠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단순히 말에서 내려서 가라는 의미 뿐 아니라 경기전을 수호한다는 수호신상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왕의 초상화를 의미
  2. 실제 영정은 보물 제931호로 현재 경기전에 봉안된 어진은 모사본이다
  3. 신도가 있는 또 다른 시설물로는 종묘가 있다. 한 마디로 종묘에 준하는 건물인 셈
  4. 문화재청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