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석

姜海錫.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4년 1월 18일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수기옥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6~1927년 전남청년회연합회(全南靑年會聯合會)와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의 위원으로 청년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광주 야체이카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장석천의 측근으로서 1927년 11월 광주청년동맹(光州靑年同盟)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학생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 출신들을 지도하면서 광주 학생운동계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던 1928년 4월 이경채가 항일격문을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후 이경채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된 뒤 3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1928년 7월 21일 면소 처분을 받았다.[1] 그러나 광주학생항일운동 발발 후 학생시위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1930년 12월 22일 겨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2]

이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직후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의 부위원장, 학무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5년 11월 20일부터 시작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는 해남군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46년 2월 15일부터 약 2주에 걸쳐 열렸던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는 농민조합전국총동맹의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73년 4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강해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6년 6월 22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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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