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泌. 자는 달원(達源), 호는 의재(宜齋).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8년 4월 10일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만산고택'에서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강용은 영릉 참봉, 천릉도감 감조관을 거쳐 통정대부에 올라 당상관인 중추원 의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자택에 머무르며 집 옆에 태고정을 짓고 주위의 바위와 소를 만취암, 세심소라 이름붙이고 망미대를 쌓아 망국의 한을 달랬다. 그는 이러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갖추었다. 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이 물러났을 때 함께 관직을 버렸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을 닦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를 후원하기 위해 만산고택의 옆집인 성암재(醒巖齋)에서 임시정부 밀사와 비밀리에 접근하여 독립자금을 전달했다. 1925년경 김창숙 등이 내몽고 지방의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을 건설해 한인들을 집결시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고자 했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하기로 했다. 이때 봉화의 유지였던 강필은 김창희(金昌禧)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취지에 크게 공감하여 2천원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며칠간 경찰의 취조를 받다 풀려났다. 그후 만산고택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내다 1942년 3월 3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임시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건국 - 영주시민신문
- 독립유공자 공훈록[1]
- 봉화 만산고택 - 문화유산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