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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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智錫.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4년 11월 30일 전남 무안군 망운면 목서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9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한근(金翰根)이 고향인 목포로 내려와서 3.1 운동 소식을 전했다. 이에 강지석은 1919년 3월 19일 김순기(金順淇)의 집에서 정순홍(丁淳紅), 박상규(朴相奎) 등 수십 여 명과 함께 무안읍 장날인 2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밤새도록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1919년 3월 20일, 강지석 등은 읍내 각처에 독립선언서와 경고문을 붙여 일제와 친일파들의 자숙을 촉구하는 한편 군중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11시 경, 강지석 등은 남산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다음 읍내를 향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 경, 그들은 무안공립보통 앞을 지날 때 주재원들에게 저지받았으나 이를 뚫고 구무안읍 장터에 도착했다. 읍내 장터에는 이미 수백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주도자들은 그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한편,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중을 주도헀다. 오후 2시경 만세시위대는 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지를 행진하며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때 일제 당국은 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무안군수와 목포경찰서장의 진두 지휘 아래 군경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강지석은 1919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우러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이후 목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3년 3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강지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2018년 5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유해를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독립유공자 공훈록[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