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택

강인택.jpg

姜仁澤. 호는 춘산(春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2년 8월 2일 함경남도 홍원군 학천면 풍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은식이 설립한 경성 오성학교를 졸업했고, 천도교에 입교했다. 1919년 3월 3일 홍원군 천도교 교구당에서 홍원군 천도교구장 강남섭으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자 적극 찬동하고 동지들과 함께 운동 방법 등에 대해 협의했다. 그 결과 3월 16일부터 3일간 읍내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후 강인택은 천도교 신자들에게 이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동월 13일 독립선언서 약 1,000매를 인쇄하는 등 운동준비를 비밀리 진행했다.

이윽고 3월 16일, 홍원 읍내 시장에서 군중에게 조선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후 조선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어 6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강인택은 1922년부터 천도교 문화 운동을 주도했고,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중앙집행위원, 재외조선인노동상황조사회(在外朝鮮人勞動狀況調査會) 위원,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이사 등을 역임하며 조선인의 교육문제와 재외 조선인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했다.

1923년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의 준비위원, 1924년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 등에 참가하여 청년운동과 언론운동에도 관여했으며, 1924년에는 조선기근구제회 결성을 도왔다. 1927년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여해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천도교가 분열되자 천도교 혁신파의 입장에 서서 천도교유신청년회에 가담했고 1930년에는 단체명을 천도교혁신청년동맹으로 개칭했다.

8.15 광복 후인 1945년 한국민주당 발기인을 맡았으며, 1952년 제5대 체신부장관을 역임했고 1954년에 제4대 감찰위원장을 역임했다. 1962년 11월 13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강인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2010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