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효

姜永斅(또는 姜永孝).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0년생이며, 평안남도 증산군 황상면 무본리 출신이다. 일찍이 하와이로 노동 이민하였고, 1909년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북고나 훌루알로아지방회 의장을 역임하였고, 1914년 하와이 힐로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했다. 1918년 하와이에서 국민보안공동회와 갈리히연합회를 조직하고, 조용하, 조병요 등과 함께 <태평양시사> 발간에 참여했다.

1921년 10월 황사용, 신홍균[1] 조병요 등과 함께 하와이 국민대표기성회를 조직하고 재무로 선출되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촉구했다. 1921년 대조선독립단 부단장, 1922년~1924년 단장 대리, 총서기, 부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 뒤 중국에서 활동하던 박용만에게 송금했다. 1925년 5월에는 호놀룰루에서 <단산시보>를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했다.

1930년 3월 독립운동 촉진을 위해 안원규, 박상하 등 29인과 함께 하와이 한인협회를 조직하고 임시위원이 되었으며, 그해 7월 서기를 맡았다. 1932년 1월 하와이교민단 의사회에 호놀룰루 의사원으로 참가하여 의사회를 조직하고, 의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하와이 국민회부회장을 역임했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후원했다. 1937년 2월 하와이 국민회 역사편찬사료수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2년 펀치볼지방회 대의원, 1943~1944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협찬위원회 서기 및 회계검사로 활동하였다. 1944년 2월 하와이 국민회 총재무 겸 <국민보사> 총재무, 5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재미한인의 통일 공작 실현을 위해 선정한 조사연구위원,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 평의원, 10월 검찰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5년 1월 하와이 국민회 법무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밖에 1909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금, 3.1 운동 기념금 등 여러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은 여러 차례 지원했다. 8.15 광복 이후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내다 1949년 12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강영효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각주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신홍균 (1870년), 신홍균 (1881년)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