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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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永大.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강영대는 1885년 10월 28일 부친 강명화(姜明化)와 모친 송씨 사이의 첫쨰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둘째 아우 강영소, 셋째 아우 강영문(姜英文), 넷째 아우 강영상(姜永商), 다섯째 아우 강영렬(姜泳烈), 여동생 강봉강(姜鳳姜)이 있었다. 1905년 5월 29일 21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이민갔고, 그곳에서 미주 공립협회에 가입하고 1908년 11월 공립협회 대표로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와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1909년 2월 10일 국민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7월 14일부터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 주필을 맡았으며, 흥사단에 가입해 단우번호 22번을 부여받았다.

1910년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개칭될 때 공립협회는 북미지방총회로, 합성협회는 하와이지방총회로 재편되었다. 그는 로스엔젤레스 지방회로 이전했고, 북미지방총회 대의원을 역임했으며, 1909년 9월부터는 레몬트학생양성소 학생이자 양성소 학무원, 1910년 라성지방회 대의원, 북미지방총회 학무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1911년 11월 청지방총회(水淸地方總會) 대표원으로 선출되어 1912년 중앙총회 제1차 대표원회에 참석했고, 1914년 9월 클래몬트 학생양성소 감독, 1915년 중앙총회 대표원회 의장, 1917년 북미총회 대표원, 1924년 민립대학기성회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9년 11월 시카고에서 동생들과 함께 카페테리아 사업에 동참하여 1930년 말 강씨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창립해 지배인을 맡았으며, 동생 강영소가 창립한 로렌스 카페테리아(Lawrence Cafeteria)의 지배인도 겸임했다. 강씨 형제의 사업은 1931년 중반 윌슨 가에 윌슨 카페테리아(Wilson Cafeteria)를 새로 개업할 정도로 번창했다. 한편 강영대는 1929년 시카고지방회로 이전한 뒤 1934년 시카고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흥사단 사업에 적극 참여해 국방 공채 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을 꾸준히 지원했다. 그러나 1934년 강영소가 사망한 뒤 사업이 부진하자 결국 다른 사업가들에게 카페테리아를 넘겨줬으며, 1948년 7월 20일에 시카고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강영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가족 관계[편집 | 원본 편집]

강영소 가족.gif

뒷줄 왼쪽부터 강영대, 강영상, 강영문, 강영각. 앞줄에 강영소 부부와 아들.

  • 강명화(姜明化, 1868~1933): 강영소의 부친. 1900년 1월부터 1902년 8월까지 증산군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재임했고, 1905년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주한 후 공립협회에 가임하여 활동하는 동시에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2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17년부터 사업차 칠레, 멕시코, 샌프란시스코, 한국 등을 오갔다. 1933년 2월 3일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한 달만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소(姜永韶, 1886~1934): 강명화의 둘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결성했다. 이후 1909년 대한인 국민회에 가담해 하와이 대표로 활동했으며, 1910년 10월 미국 본토로 이주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샌프란시스코 지방대의원, 신한민보사 사무원 등을 역임했으며, 1913년 5월 안창호흥사단을 조직했을 때 단원으로 참여했고, 1916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황사용과 함께 하와이로 파견되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을 원조할 것을 호소했고, 1919년 7월 18일 하와이 국민회와 독립단의 합동식을 거행했지만 양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바람에 통합이 결렬되었다. 이후 1919년 11월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재선출되어 미주지역 한인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이후 시카고에서 형제들과 함께 '강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창립해 왕성한 사업을 벌이면서 한인 사회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문(姜英文, 1888~1965): 강명화의 셋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이 하와이로 이주했을 때, 고향에서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 봉강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1914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하여 9년만에 가족들과 재회했다. 이후 시카고에 자리를 잡아 하워드 식당을 경영했고 형과 함께 시카고 한인 교회를 이끌었다. 1938년 단우번호 299번으로서 흥사단에 입단했고, 1946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흥사단 미주위원부 서무원으로서 활동했다. 1947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을 맡았고, 1961년과 1962년에 이사부장을 맡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의 여동생 박영복과 결혼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상(姜永商, 1892~?): 강명화의 넷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1919년 대한인 국민회 오하이오 주 지방회 발기회원으로 참여했다. 형 강영소와 함께 국민회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고, 재미한인사회에서 임시정부 재원의 대부분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형제들과 함께 시카고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1944년 이후로 소식이 끊겼고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201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 강영렬(姜泳烈, ? ~ 1922): 신한민보 1922년 2월 9일자 <강영문 씨의 참보> 기사에 따르면, 강영렬은 강명화의 여섯 형제 중 다섯 째이며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2년 경에 독립군끼리 이념 문제로 대립하며 서로를 죽이는 것에 절망해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동족을 죽일 수도 없으며 그들에게 죽기로 애원하니 자살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고 한다.
  • 강영각(姜泳珏, 1897~1946): 강명화의 여섯번째 아들.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12살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업랜드 소학교와 클레아몬트중학교를 재학했고 포모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0년에 하와이로 돌아가 와히아와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1925년에 영문격월간 '한인소년'을 창간했다. 이후 포모나 대학을 졸업한 뒤 형 강영소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국민회에 가담해 여러 잡무를 맡았고, 1931년 흥사단에 입단해 단우 번호 261번을 획득했고 1944년에 제12반 하와이 반장이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쓰일 자금을 지원하다가 1946년 2월 4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그의 유족이 현재까지 살아있으며, 그 중 딸 수산 강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가문이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을 통보받았다.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강봉강(姜鳳姜, ?~?): 강명화의 막내 딸. 독립운동가 양우조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