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제

姜世濟.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3월 18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9일, 강세제는 진평헌, 권남선, 김형기, 양재원, 배익조, 모치전, 이학이, 허장완 등 각계 청년 18명과 함께 통영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는 문제를 논의했다. 3월 12일 다시 비밀 모임을 갖고 독립선언서의 기초, 운동의 방법 및 선언서 배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3월 13일 오후 8시경, 그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통영 면사무소 등사판을 가지고 통영읍내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 산양면사무소로 가 그곳에 있는 등사판과 합쳐 2대의 등사판으로 "조선의 형제, 자매들은 대한독립을 외치고 행진곡에 발맞춰서 금강의 꼭대기까지 나아가자"라는 격문을 600매 인쇄했다. 3월 14일 오전 1시 30분경, 강세제, 이학이, 허장완은 통영면사무소에 등사판을 반환하러 갔다가 대기 중이던 형사에게 잡히고, 나머지는 오전 3시 통영읍으로 돌아오다가 붙잡혔다.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받고 항소했으나 1919년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다.[1] 이에 불복해 김형기와 함께 상고하면서, 일본인 변호사 타카하시 쇼오노스케(高橋章之助)를 통해 상고 취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1점. 출판은 활판으로 제작한 것이며, 활판이 아닌 것으로 된 것은 출판이 아니다. 그런데 원판결은 피고인 등이 복사판을 이용하여 본건의 문서를 작성한 것을 인정하면서 이것을 출판법 위반으로 헤아림은 위법이다. 대체로 활판은 고유 글자모양을 갖추고 있는 기구를 이용한 것이며, 복사판은 편의의 방법으로 손으로 쓴 것이니 이것은 완전히 양자가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제2점. 출판이란 어떤 문서를 판에 붙여 출행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며, 어떠한 문서라고 해도 아직 출행하지 않고 저작자의 수중에 있는 동안은 이것으로 출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원심에서 피고인이 문서를 작성, 소지하고 있는 것만 인정하고 즉, 동법으로 헤아림은 위법이다.

제3점. 출판에는 저작자, 발행자, 인쇄자 등을 기록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은 바로 출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연시단서, 광고지 등과 같은 것은 물론 활판에 붙인 것이 많고, 또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이며 세간에 발행하는 것을 매일 보는 부분이기 때문에, 출판물이라고 해도 전기와 같은 것을 구비하지 않은 이상은 이것은 전혀 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원심에서는 앞 서술과 같은 요건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로써 앞 법의 위반이라고 인정함은 위법이다.

원판결이 적용한 출판법은 구한국 융희 3년 2월 공포의 법률이며, 명치 43년 일,한 병합과 동시에 그 효력을 상실해야 하나, 그해 긴급 칙령 제324호에 의해 그해 8월 제령 제1호로써 당분간 그 효력을 갖게 한 것이나, 명치 44년 3월 법률 제30호에 의해 조선에서 시행할 법령에 관해서는 조선총독의 명령으로써 이를 규정할 수 있는 입법위임이 제정된 것이니 당분간, 즉 과도시기 동안 유효했고 법령은 그 필요가 있는 것은 계속의 수속을 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또 계속이 필요 없는 것은 당연히 폐지된 것이라고 해석해야만 한다. 본건에 적용된 출판법은 이것이 계속하여 유효하다는 규정의 공포가 없고, 현재 일본법으로써의 출판법의 규정도 존재하고, 구한국의 출판법은 당연히 그 효력을 상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따라 문의하게 됨은 법 적용 착오의 불법 판결이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1919년 9월 11일 상고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2] 출옥 후 옥고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3년 6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강세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