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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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錫元.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8년 8월 21일 전라남도 광주군 서로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한 후 귀향하여 광주청년학원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도쿄의 암창철도학교(岩倉鐵道學校)에 입학하였으나 1927년 6월에 그만두고 귀향했다. 이후 1927년 10월에 광주소년동맹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28년 8월 전남소년연맹 창립 총회 때 광주소년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총회는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고 그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며칠간 구금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장재성(張載性), 장석천, 국채진(菊埰鎭)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 투쟁을 지원했으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타지의 동지와 연락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학생전위동맹 간부 차재정과 장석천 등과 함께 서울학생 거사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항일 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해 전국에 발송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지만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2] 출소 후엔 일본에 유학갔으나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귀국했으며, 이후에는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목도한 뒤 서울로 이주해 그곳에서 살다가 1991년 1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석원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1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독립유공자 공훈록[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