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봉

姜錫奉. 호는 야정(野丁).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0년 9월 23일 전라남도 목포시 북교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0년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귀국하면서 하와이 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新韓國報)>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장일환(張日煥), 서광선(徐光鮮), 서광조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1918년 2월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었고 그해 3월 16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서상봉, 곽우영, 서화일(徐化一), 박여성(朴汝成)[1], 박복영(朴福永), 양병진(楊炳震) 등과 함께 기독교 중심의 시위 계획을 수립했다. 1919년 4월 8일, 그는 청년 학생 및 기독교인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경고문, 태극기 등을 제작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해 남교동 시장 일대를 피로 물들였고, 주동 인사들이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 역시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16일에 열린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출판법 위반은 무죄)을 선고받았다.[2]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3]

1921년 출옥 후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이때까지 신봉하던 기독교를 버리고 목포무산청년회에 참여했고, 1925년에 전남청년대회 준비위원,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이 주도한 전조선노농대회의 준비위원에 발탁되었고, 1926년에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 참석해 전남도당을 재건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1927년에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광주청년동맹과 신간회 광주지회의 간부로도 활동했다.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중앙검사위원 후보가 되었으나, 곧 일제 당국의 조선공산당 검거 선풍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일본으로 피신했고, 1934년 귀국한 후에는 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하지 않고 목포에서 여객선 운항업, 해산물 수출업에 종사했다.

8.15 광복 후에는 전남지부 부위원장과 전남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겨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미군정은 이런 그를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고 2년간 투옥시키기도 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7월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광주에서 광주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가 곧 반동분자로 몰려 투옥되었고, 광주가 대한민국 국군에게 해방된 뒤에는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문제시되어 취조받기도 했다. 이후에는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청호리에 은거했고, 1956년 10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강석봉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엔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독립유공자 공훈록[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