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文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1년 3월 2일 전라남도 제주도 애월면 하귀리(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에서 강성휴의 아들로 출생헀다. 본관은 곡산 강씨이다. 그는 8살 때부터 2년간 한문을 배웠고, 12살 때 일신보통학교에 입학해 1년간 보통학교 정도의 학과를 수업한 뒤 퇴교하여 농업에 종사했다. 16살 때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오사카 남구 금구소학교 야학부에 입학하여 5학년까지 수업하고, 이후엔 금구소학교 부근의 화하류 전기제작공장에서 직공으로서 노동에 종사했다.
일본에서 전기제작공장에 근무하던 중, 동향 출신의 사회주의자 김귀영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감명받고, 일본제국주의의 타도를 위한 실천 방침으로써 무산아동들에게 항일의식을 주입하기로 박영순과 뜻을 모았다. 병고로 회사를 퇴직하여 귀향한 뒤, 1933년 8월 하귀리에서 야학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1934년 12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이웃 마을에서 김홍규, 김을봉 등이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했다. 이후 60여 명의 학생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하고 식민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이 달성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한편으로 학생들의 항일 의식을 효과적으로 고취시키기 위해 이천만가(二千萬歌), 혁명가, 단결가 등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2천만가 1절: 2천만 동포여 일어나라 일어나 손에 손을 들고 검을 쥐고 빼앗긴 우리들의 자유와 권리를 원수의 손에서 탈환하기 위해 전 세계를 들어 평등생활을 무산자 혁명으로 용감하게 싸워라.
2절: 붉은 피로 청산을 물들여라 반도의 강산을 붉게 하여 적국의 참호를 타파하고 자유의 총성을 연발하기까지 전 세계를 들어 평등생활을 무산자 혁명에 용감하게 싸워라.
3절: 노소를 불문하고 남자도 여자도 어린 아동까지 일어나라 묘 안에 묻힌 시체도 만산에 우로를 받은 초목까지도 전 세계를 들어 평등생활을
무산자 혁명으로 용감하게 싸워라.
혁명가 동지여 모여라 혁명부대로 모여라 살기 위해 우리들은 불쌍한 조선민족
모여라 모여라 혁명부대로
단결가 1절: 단결의 힘은 우리들의 무기다 우리들의 무기는 단결이다. 지켜라 우리들의 단결을
2절: 백색 테러스파이 배반자도 우리들의 단결은 두렵지 않다. 지켜라 우리들의 단결을
3절: 우리들의 피와 땀과 기름으로 살찐 악마와 같은 자본가 지주도 우리들의 단결로 파괴하라
지켜라 우리들의 단결을
이 일로 1935년 가을 체포된 그는 10월 1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자 공소하였고,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1] 이후 1937년경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이송되었다가 1937년 7월 22일에 기소유예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2] 이후 중국 상하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8.15 광복 후 귀향하여 제주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7년 7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문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