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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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武景(또는 姜武京). 이명은 강윤수(姜尹秀).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8년경 전라북도 무주군 풍면 설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이에 통분을 느끼던 중 유지인 심남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받고 그와 결의형제를 맺고 1908년 1월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심남일과 함께 강진, 장흥, 남평, 능주, 영암, 나주, 해남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접전을 치렀다.

그러던 1908년 9월 20일, 장흥 신풍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강무경은 전투 후유증으로 온 몸에 신열이 나고 피로가 엄습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평소 인연이 있던 영암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을 찾았다. 그는 그곳에서 양덕관의 둘째딸 양방매(梁芳梅)에게 치료받았다. 양덕관은 두 사람이 좋은 배필이라고 여기고 이들의 혼례를 치러줬다. 이후 강무경은 채비를 차리고 집을 나서려 했는데, 이때 아내인 양방매가 따라나섰다. 이에 강무경이 말렸다.

여자가 나설 데가 아니다.

그러나 양방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결국 그는 부인이 자신과 함께 따라가는 걸 허락하고, 장흥, 보성, 강진, 해남, 광양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특히 1909년 3월 8일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본진을 장암에 두고 의진을 5개 부대로 나눈 뒤 대항봉, 월임치, 덕룡산, 병암치 등지에 매복해 놓고 협공해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고 순종의 해산 조칙까지 내려지자, 결국 그는 1909년 7월 21일 의병대를 해산시켰다. 이후 심남일과 함께 전남 화순군 능주면의 어느 바위굴에서 은신하다가 1909년 10월 9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그해 12월 15일 대구 형무소로 이송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10월 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라의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천추의 핏자국을 남긴 청강석이 되리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강무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3년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한편 목숨을 걸고 강무경을 따라간 양방매는 남편을 잃은 뒤 남편처럼 의병 활동을 하다가 병사한 오빠 양성일의 딸을 기르며 오랜 세월을 조용히 살았다. 그러다가 1984년에야 비로소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고, 그녀는 그해 8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매장된 남편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6년 9월 28일 96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양방매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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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