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두영

姜斗永.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8년 7월 19일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4월 3일 여주군 북내면에서 이원기, 원필희, 조경호 등이 주동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현암리, 장암리, 덕산리, 와룡리 등 인근 마을을 돌며 주민들을 규합하고, 경고문 40매를 작성해 각소에 배부했다. 또한 당우리의 공북학교에 모인 8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하여 1919년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로 감형되었다.[2] 그러나 재차 불복해 상고하면서, 상고취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본인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찬성한 적이 없는데 4월 14일 여주군 헌병 분대의 호출에 의해 어떠한 사정인지도 모르고 출두했는데, "너는 이번 독립만세에 찬성한 자가 아니냐"는 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은 없다고 대답했는데, 동 헌병 분대에서 상피고 최영무와 함께 선동한 적이 있는데 어째서 모른다고 답하느냐며 구타당하고, 이에 견디지 못해 상피고 최영무와 함께 동일 만세를 불렀다고는 말했으나 피고는 부르지 않았다. 여주 분대에서의 신문조서를 증거로 하여 초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판결에, 제2시멩서는 8개월에 처분, 판결되었다. 그렇지만 피고는 무죄인 자라고 믿고 상고한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1919년 10월 27일 "여주 헌병 분대에서 피고 등이 고문을 받은 사적은 조금도 이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원심은 동 헌병 분대에서의 피고 등의 신문조서를 본건 단죄의 자료로 한 것이 아니니, 본 논지 중 피고 등이 동 헌병 분대에서 구타 신문 당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공술을 한 것과 같이 변명하는 점은 이유 없고, 기타 논지는 원심의 인정 사실을 부정하고 원심의 전권에 속하는 사실인정을 비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밝히며,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다.[3]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60년 10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강두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