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수

姜德壽.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4년 7월 9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 당시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밀양소년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1919년 4월 1일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인 윤차암, 윤수선, 김성선, 박소수 등과 함께 밀양면 내일동 영남루 뒷산으로 갔다. 이때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던 윤수선이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독립만세를 고창했다고 알리자, 그는 친구들에게 밀양에서도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의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들은 4월 2일 밤 밀양공립보통학교 생도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돌아오는 길에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인 정선호의 집에 들러 그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해 승낙을 얻어냈다. 4월 2일 저녁 식사 후, 강덕수와 친구들은 생도들에게 학교 교정으로 모일 것을 권유했다. 이에 20~30명가량의 생도들이 모이자, 이들은 생도들을 학교 화장실 부근에 대기시킨 뒤 대오를 이루어 행진을 시작했다.

박차용이 나팔을 불며 생도들의 선두에 섰고, 강덕수 및 동지들도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학교 서쪽 무안가도를 행진한 뒤 우측으로 돌아 북문까지 행진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시민들도 가두에서 같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급히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무력으로 저지하여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강덕수 등 주동자 14명이 검거되었다.

1919년 5월 5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1] 이후 밀양소년단과 밀양청년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 1월 1일 서문안 교회에서 개최된 밀양신년대강연회에서 밀양소년단 간부 자격으로 "자유적 생활"이란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1925년 11월 18일 개최된 밀양청년회의 밀양청년연맹 조직 관련 회의 때 윤상준, 인용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2월 11일 신간회 밀양지회 집행위원 13인에 선정되었고, 12월 19일 윤치형, 박임수, 윤세주, 정광호, 김병환, 황상규, 안병희, 윤상준, 박병기, 한일근, 김희지, 이건희, 조용숙, 이종하, 안준 등과 함께 16인의 창립 위원으로 선정되어 서무부서의 일을 맡았다. 1938년 6월 7일 밀양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강덕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