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大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5월 10일 경상남도 함안군 북면 소포리에서 출생했다. 1929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하던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 발발 후 경찰이 조선인 학생만 처벌하는 것에 분개했다. 이리하여 동창생인 심홍택, 강상덕, 황한희 등과 회합하고 학무국장 및 교장에게 제출하기 위한 진정서 2통을 작성했다. 진정서는 조선학생전위동맹 선전부장이자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 학생인 김순희가 제시한 "광주학생 사건에 관련하여 검거된 자를 석방하고, 언론 집행 출판의 자유를 부여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29년 12월 9일 동창생인 최진한이 교장에게 제출했고, 강대성은 진정서를 필사하여 수십명의 학생들에게 낭독한 후 동맹휴교 하자고 권유했다. 이후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한 뒤, "광주 학생 만세"를 고창한 후 "우리들은 광주 생도에 동정하여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동맹휴교를 단행하자"고 연설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30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로부터 퇴학 통보를 받았다.
이후 일본의 조도전대학으로 유학하였고, 1936년 6월 25일 도쿄 신전구에서 명치대생 박용칠, 우삼흥, 일본대생 장재성) 등 30여 명과 함께 조선유학생연구회를 결성했다. 그는 2월 1일 임시총회에서 조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강연회 개최 및 조선인 학생에 대한 민족의식 함양에 노력했다. 그러나 1938년 5월 19일 우삼흥이 체포되었고, 이어서 그도 체포되었다.
1939년 12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관해 기소유예 불기소 판결을 받았다.[1] 이후 만주로 건너가 길림시 강북고 영명정에 거주했다가 일본군으로부터 '국방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945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범죄혐의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2] 8.15 광복 후 부산에 거주하였고, 1956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강대성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