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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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일이 아닌데
깡그리 잊어버린 일이 있다.
먼 곳의 일도 아닌데
아득히 제쳐 놓은 일이 있다.
남의 일도 아닌데

누구도 생각 않는 일이 있다.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첫머리의 합창

개요[편집 | 원본 편집]

1923년 9월, 일본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8.3의 지진을 말한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1923년 9월 1일 도쿄 앞의 사가미만 남쪽 30km 지점에 있는 오시마의 화산이 연기를 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사가미만의 바닥이 기울어지면서 만의 북쪽 해변은 남동 방향으로 3m가량, 오시마는 북동 방향으로 3.6m가량을 이동하는 대규모 단층이동이 일어난다. 이 단층운동의 결과로 사가미만 아래 48km 지점의 지하에서 대규모의 충격파가 발생하였으며 이것이 이 지진의 본진에 해당하게 된다.

이 지진으로 오시마 북쪽 해저는 약 450m가량 융기하였고 남쪽 2km 지점의 해저는 1,440m나 침강한 것이 확인되었다.

피해 규모[편집 | 원본 편집]

관동대지진으로 사망자 91,344명이 발생하고 부상 및 실종이 15만여 명, 소실 가옥은 46만5천 호에 이르렀다.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반경 200km 이내 도시와 촌락의 7할 정도가 피해를 보았다. 특히 본진이 일어난 시간이 오전 11시 58분으로 통상 식당과 가정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화덕에 불을 지필 당시였으며, 거의 모든 가옥이 목조로 이루어진 일본의 특성상 지진에 의해 파괴된 가옥에서 추가 화재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지진으로 수도관마저 파괴되어 제대로 된 진화가 불가능하였으며, 목조주택이 많은 도쿄의 경우 전체 건물의 3분의 2가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화재도 18시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지진의 여파로 쓰나미가 발생하여 요코하마항을 파괴하였고, 도쿄의 두 하천인 아리강과 스미다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대를 쑥대밭으로 휩쓸어버리기도 하였다. 이 쓰나미는 태평양 건너편 방향으로도 진행하여 지진 발생 사흘째인 9월 4일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 일대에 6m 규모의 거대한 해일이 덮치며 피해를 일으켰다.

일제의 재일 조선인 학살[편집 | 원본 편집]

지진이 발생한 9월 1일 오후부터 관동지방의 경찰서를 중심으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주로 “불령선인들이 우물 속에 독약을 풀고 방화, 강도, 강간을 저지른다.” 또는 “불령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수준의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당시 경찰들은 지진으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이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뜨렸으며, 급기야 9월 3일에는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 명의로 “도쿄 부근의 지진을 이용하여 조선인은 각지에서 방화하고, 불령의 목적을 수행하여,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려 방화를 저지르는 일이 있음. 이미 도쿄에서 계엄령을 일부 시행하는바, 각지에서 충분하고 엄밀하게 시찰하도록 하고 조선인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도록 할 것”이라고 전국 각지에 급전을 보내기까지 한다. 사실 이쯤 되면 출처 불명의 유언비어가 아니라, 지진으로 인한 공황상태에서 재일 조선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일제의 정권을 유지[2]하고자 한 야비한 술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선동으로 일본 국민들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을 색출하여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각 집마다 한 사람씩 보초를 내도록 했다. 하지만 형은 이 모든 생각에 비웃음을 보낼 뿐, 아예 순번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죽검을 들고 나갔더니, 고양이 1마리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하수관에 나를 배치해 주었다. 그들은 거기에 나를 배치하며 “조센징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숨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우스운 일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동네 우물 중 한 곳의 물을 마시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이유인즉 그 우물 둘레에 쳐진 벽 위로 하얀 분필로 이상한 부호가 적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센징이 우물에 독을 탔음을 표시하는 암호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추론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실 그 부호는 바로 내가 휘갈겨 놓은 낙서였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행동이 이러하거늘 나는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된 존재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쓴 자서전 내용 중

이러한 결과 재일 조선인만 최소 6천에서 1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자경단은 조선인인지 알아내기 위하여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ゅっせん)’나 ‘大根(だいこん)’처럼 한국어 화자가 하기 어려운 말을 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죽였는데, 이 때문에 다른 지방에서 왔거나 발음이 조금 별스러운 일본인이 애꿎게 죽기도 하였다. 심지어 중국인이나 한국식 이름과 비슷한 외자 성씨 일본인[3], 외국인 기자들까지도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일본 당국은 이러한 자경단의 광기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정권 유지 차원에서 방조하기까지 하였으며, 덤으로 일본의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 반정부 인사 등을 비롯한 좌파 계열 인물들을 엮어서 이참에 학살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살사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심지어 일본 정부는 이러한 사실이 한반도에 알려지면 다시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사망자 숫자도 몇 명에 불과한 것으로 숨기고 한동안 한국인의 일본 입국을 금지하까지 하였다.

한편 사다코 왕비와 그녀의 예비 맏며느리 구니노미야 나가코는, 지진으로 인한 일본인 희생자들을 위문하고 그들을 추모하며 애도하는 와카(和歌)[4]를 발표하였다. 역겹고 가증스럽다 본래 나가코는 1923년에 히로히토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대지진으로 인하여 고통 받은 민심을 생각한다며 이듬해로 미루었다.

각주

  1.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의 학살을 다룬 김의겸의 희곡이다.
  2. 1919년 한국의 3.1 운동을 겪으면서 일본 정권 민중봉기에 대한 미연의 공포를 느낀 것으로 알려진다
  3. 아마미 제도 출신
  4. 일본의 전통 시(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