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광복 후 전남 광양경찰서 앞에서의 행진.jpg

8.15 광복 후 전남 광양경찰서 앞에서 행진하는 시민들. 기록사진 작가 이경모(1926~2001) 촬영.

八一五光復.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한반도가 조선 총독부로 대표되는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사건. 대한민국에서는 이날을 기념하여 양력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하였고, 1948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북한 역시 해방절이라 하여 이날을 기린다. 일본에서는 천황이 종전선언을 발표한 날이라 하여 종전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한민족은 심한 수탈에 시달렸다.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강제 동원하였다. 1942년 당시 한반도에 거주하는 인구는 2552만 5,409명이었는데, 그 중에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은 약 160만 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1945년 광복 당시에는 약 210만 명으로 늘어났다. 50만 명이 일본으로 이주한 것인데, 그중 36만 5천명은 강제징용된 이들이었다. 여기에 국내에서 일본군에 각종 명목으로 징용된 이는 약 414만 명에 달했으며, 일본군 군인으로 징발된 인원은 육해군 도합 21만 명에 달했다. 여기에 수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적 쾌락을 충족하기 위한 위안부로 끌려갔다.

또한 혹독한 식량공출제 시행으로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한반도 주민 중 68.1%에 달했던 농민들은 거듭된 징발로 먹을 것을 구할 게 없어지자 풀을 뜯어먹고 나무껍질을 벗겨가며 목숨을 연명했다. 도시에서는 전시식량 배급제가 시행되었으나, 쌀은 군량으로 소비되었고 잡곡만이 한국인들에게 지급되었다. 각급 학교의 학생들도 공사판에 강제로 끌려가서 막노동을 해야 했다. 이러한 전쟁동원으로 얼마나 많은 수가 죽었을지는 현재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략 수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한민족을 수탈하며 전쟁을 수행한 일본제국이었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1940년대는 이미 본토에도 폭격이 가해지고 1945년 3월 이후에는 도쿄 대공습으로 일본이 불바다가 된 상태였다.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유럽 전쟁은 마무리되었고 일본에게 유의미한 동맹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해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가 이를 거부한다고 선언하자, 미군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리틀보이)을 투하하여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고 14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음에도 일본은 항복 의사를 표하지 않았고 8월 8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팻맨)을 투하하여 8만~9만에 달하는 인명 피해의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 8월 9일 소련이 전격적으로 만주 침공을 단행하자, 일본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로 하였다.

8월 15일[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遠藤)는 본국으로부터 천황의 종전선언이 곧 있을 것이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조선에 거주하는 80만여 명의 일본 민간인과 군인의 신변보호 및 안전 귀국을 위해 국내 지도급 인사들과 협상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여운형, 송진우 등과 접촉하여 행정 이양 교섭을 벌였다. 송진우 측이 이에 불응하자, 여운형을 불러서 행정권 이양 문제를 논의했다. 여운형은 일본인들의 무사 귀환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5개 조항을 요구했다.

1.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당시 소련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 일대로 쏟아져 들어왔고, 8월 17일이면 경성에 도착할 게 확실해 보이는 상황이었기에, 총독부로서는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여운형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일본군 전체에 일본 민간인의 대피를 도우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후 정오에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내용의 벽보가 시내에 나붙었다. 그날 정오 예정대로 천황의 종전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발표되었다. 그러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이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종전 발표 방송이 잡음이 심했고 난해한 한자어가 섞인데다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문어체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15일 매일신보.jpg

8월 15일 당일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도 '항복'이라는 직접적 표현은 없었다. 1면에는 조선의 해방을 전하는 보도가 아니라 전쟁에 패한 일본의 입장만 다뤘다. 실제 1면 상단의 머릿기사는 `平和再建(평화재건)에 大詔渙發(대조환발)'이라는 제목의 일본 천황 詔書(조서)가 게재되었다. 이 조서에는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臣民)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어 일본의 항복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또한 1면 하단에는 미·영·지·소 4개국의 `공동선언수락통고'를 실어 우회적으로 연합국의 승리를 전했고, 일본 총독 아베의 `輕擧(경거)를 嚴戒(엄계)하야 냉정침착하라'는 유고를 게재했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은 이 유고에서 "지금껏 30여년 간 일본과 조선은 한 몸으로 지내 왔고 전쟁에서도 함께 싸우며 고생해온 사이였다. 그랬는데 이제 전쟁을 그만두게 되었으니, 지금 이 소식이 충격적일 것임은 모르는 바 아니나, 경거망동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했다.

매일신보는 16일에도 1면에만 기사를 싣고 2면은 백지로 발행하였다. 1면 중앙의 눈에 잘 띄는 위치에는 '사상관계자 등 석방'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각 형무소와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사상범을 필두로 경제위반, 노무관계 위반자를 석방하기로 되었다는 기사를 4호 활자로 편집했다. 그러다 신문사가 건국준비위원회에게 완전히 넘어간 8월 17일자에 비로소 "새날은 왔다. 삼천리 근역에 광명과 희망이 가득하고 3천만 동포의 가슴이 환희와 감격이 넘쳐흐르는 가운데....."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렇듯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종전방송을 알아듣는 이도 얼마 안 된데다 언론들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기에, 일제가 패망했고 한반도가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는 걸 금방 알아챈 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8월 15일 당일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나와 만세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다만 마포 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들이 오후 늦게 석방되기 시작하면서 경성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국왕이었던 히로히토 천황의 육성 방송이다. 일본 왕실 특유의 문체, 완곡 어법을 사용한 탓에 일본인 조차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8월 16일[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8월 16일 마포형무소에서 석방된 항일운동가들의 만세시위.jpg

8월 16일 오전 9시, 총독부는 전격적으로 전국의 형무소들에 정치범들을 전원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리하여 일본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징역, 예비구금 등 각종 이유로 갇혀 있던 정치범들이 대거 석방되었다. 한국인들은 그제야 일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걸 깨닫고 거리 곳곳에서 뛰쳐나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안재홍은 8월 16일 오후 3시 10분부터 약 20분간 경성중앙방송을 통해 "호애의 정신으로 결합, 우리 광명의 날 맞자"라는 요지의 방송을 하며 일본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권고했다.

휘문중학교에서 연설하는 여운형.jpg

한편, 여운형은 즉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치안대를 조직했다. 그는 16일 오후 1시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5천여 시민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20분간 연설했다.

조선민족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엔도(遠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던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을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때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건국준비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하기로 했던 약속을 일방적으로 거둬들인 뒤, 미 군정청이 정식으로 발족할 때까지 본래의 권한은 그대로 존속했다. 이후 1945년 8월 26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입성하였고, 9월 2일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일반 명령 제1호를 발표해 미소 양군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이리하여 한민족은 광복 직후부터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이후 미소 양강의 대립이 심화되고 한국 정치계의 이념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한국은 분단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