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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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장례 행렬.jpg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

六十萬歲運動. 1926년 6월 10일 조선 마지막 국왕 순종(純宗)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만세운동. 3.1 운동을 잇는 시위였지만,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일제 당국의 탄압이 조기에 가해졌기에 3.1 운동에 비해 대규모로 확대되지 못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화통치(文化統治)를 선포했다. 조선인 언론과 집회를 어느 정도 허용했으며, 헌병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개편했다. 또한 도, 부, 면에 자문기관 성격의 평의회나 협의회를 설치하고 이들 기관의 의원 일부를 선출직으로 정하면서 한국인들의 지방자치 참정권 보장을 천명했다.[1]여기에 회사령이 폐지되고 일본과 한국간의 관세가 철폐되었다. 또, 3·1 운동을 촉발시킨 큰 원인 중 하나인 쌀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선포했다.

이러한 문화통치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많은 지식인이 이 시기에 친일파로 전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3.1 운동 이후 해외 각지에서 들끓었던 독립운동도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잃어갔다. 만주의 무장투쟁 진영은 일제의 간도 참변, 소련의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일본 정부와 만주 군벌 장쭤린 간에 삼시협정(三矢协定)이 체결되면서 중국군이 한인 독립군을 체포해 일제 당국에 넘겨주는 일이 빈번해지는 바람에 입지가 매우 취약해졌다. 한편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 좌익과 우익 계열의 대립 등으로 활력을 상실하였고, 급기야 1923년 1월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정을 아예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간의 극한 대립이 벌어지면서 민족진영의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 설립운동 등 일련의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탄압과 분열책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킨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 이래로 세계 각지에 전파된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하여 일제 경찰과 헌병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독서회 운동, 국민계몽운동을 통해 차츰 조직과 연대를 갖췄다. 그 결과 1924년 전국 각지에 산재한 단체들을 통합한 조선노농총연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었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창설되었다. 조선노농총연맹은 전국의 167개 단체 대표 204명이 모여 통일된 노동자ㆍ농민조직으로 결성되어, 강령으로 '노농계급해방', '완전한 신사회실현', '자본가계급과 철저한 투쟁', '노농계급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향상 도모'를 내세웠다. 가입단체가 늘어나 260여 개에 이르고, 회원수가 5만3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후 각지의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갔다.

조선공산당은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 화요회, 북풍회, 무산자동맹회 등이 연합하였다. 이들은 피압박 약소 민족의 해방투쟁에 적극적인 소련의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고,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들어 공산혁명을 조선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일본 제국주의 통치의 완전한 타도


2. 8시간 노동제

3. 부녀의 정치, 경제, 사회적 권리의 평등

4.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5. 일체의 잡세 폐지

6.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7. 민족개량주의 등 기만 폭로

8. 제국주의 약탈전쟁 반대

9. 중국 노동혁명지지

10. 타도 일본제국주의, 타도 일체 봉건세력, 조선민족해방 만세

이후 경성전차승무원 파업, 평양인쇄직공 파업, 평양양말직공 파업, 목포제유노동자 파업, 전남 암태도 소작쟁의 등 조선 각지에서 산발적인 노동 투쟁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3.1 운동의 뒤를 이을 대규모 민족운동을 벌이려 했다. 그들은 3.1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세력인 천도교에 접근했다. 당시 천도교는 1922년 5월 교주 손병희가 사망한 뒤 향후 노선을 놓고 대립이 벌어진 끝에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었다. 권동진 등이 주도하는 구파는 비타협적 민족 노선을 추구했고, 최린 등이 주도하는 신파는 타협적 민족 노선을 취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은 이중 구파와 손을 잡고 국민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 결과 1926년 3월 10일 경성 장사동 권동진의 집에서 천도교 구파 인사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회동하여, 장차 대규모 민족운동을 함께 일으키기로 합의했다.

만세운동 계획[편집 | 원본 편집]

그러던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창덕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조선 총독부는 순종의 장례식을 6월 10일에 거행한다고 공표했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고종의 장례식을 3.1 운동의 계기로 삼았듯이, 순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경성에 모일 때를 노려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5월 10일, 공산주의자 권오설(權五卨)과 박내원이 회동했다. 권오설은 천도교청년동맹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박내원에게 6월 10일에 만세운동을 벌이려 하니 천도교 인사들과 접촉하여 협조를 부탁하라고 권했다. 박내원은 즉시 권동진, 박인호, 이종린, 박내홍(朴來弘) 등 천도교 구파 원로들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알려서, 그들로부터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사회주의 계열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과 인쇄직공 민창식, 이용재, 연희전문학교의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이광호, 경성제국대학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등은 6.10 만세운동투쟁지도위원회를 구성하고 권오설을 책임자로 선출했다. 그들은 투쟁계획과 방법, 격문인쇄, 운동자금 등을 논의한 끝에 다음의 사항을 결정했다.

1.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의 혁명분자들을 망라하여 대한 독립당을 조직할 것.


2. 6월 10일 기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

3. 시위방법으로 연도 시위대를 분산 배치하여 격고문과 전단을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

그후 투쟁지도위원회는 국외의 임시정부, 병인의용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등이, 국내의 조선공산당·천도교 구파·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학생계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과 연대를 이루고자 하였다. 또한 박내원과 민창식이 격문 인쇄를 주도하여 손재기(孫在基), 백명천(白明天), 양재식(梁在植) 등 천도교 인사들과 민창식(閔昌植), 이용재(李用宰) 등 인쇄직공조합원들을 규합했다. 그들은 우선 인쇄기를 차려놓을 장소로 안국동 36번지의 빈집을 얻었다. 월세 12원씩 3개월분인 36원을 주고 백명천 부부를 입주시켰으며, 양재식을 하숙인으로 위장했다. 이렇게 장소 준비가 끝나자 5월 15일경에 권오설로부터 원고를 넘겨받고 5월 19일 소형과 대형 인쇄기 2대를 구입했다. 소형 인쇄기를 50원에, 대형 인쇄기는 130원에 샀다. 이후 양재식이 활자와 인쇄용지를 사왔고, 박내원은 서양지 2,000매와 잉크를 사왔다.

그들은 격고문과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고, 격문의 지방 배포 및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격문을 조선일보 지사·『개벽』지사·소비자조합·천도교 교구·기타 청년단체 등 전국 각처에 발송하고, 『개벽』·『신민』·『신여성』 등의 잡지에 격문 여러 매를 끼워 보내도록 하고, 또한 각 지역의 만세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하여 파견하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韓獨立運動者(대한독립운동자)여 團結(단결)하라!


一切 納稅(일체 납세)를 拒否(거부)하자!

日本物資(일본 물자)를 排斥(배척)하자!

朝鮮人 官吏(조선인 관리)는 一切 退職(일체 퇴직)하라!

日本人 工場(일본인 공장)의 職工(직공)은 總罷業(총파업)하라!

日本人 地主(일본인 지주)에게 小作料(소작료)를 밧치지 말라!

日本人 敎員(일본인 교원)에게는 배우지 말자!

日本 商人(일본 상인)과의 關係(관계)를 斷絶(단절)하자!

言論 出版 集會(언론, 출판, 집회)의 自由(자유)를!

軍隊(군대)와 憲兵(헌병)을 撤去(철거)하라!

在獄 革命囚(투옥 혁명수)를 釋放(석방)하라!

普通敎育(보통교육)은 義務敎育(의무교육)으로!

敎育用語(교육 용어)는 朝鮮語(조선어)로!

東洋拓植株式會社(동양척식주식회사)는 撤廢(철폐)하라!

日本 移民制(일본 이민제)를 撤廢(철폐)하라!

이들은 전국을 철도선의 구획을 따라 호남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 등 4개 방면으로 나누고, 박내원을 호남선 방면과 경부선 방면의 중심지인 충청남도 대전군(현 대전광역시)에, 민창식을 경의선 방면의 중심지인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현 황해북도 사리원시) 또는 경원선 방면의 중심지인 함경남도 원산부(현 원산시)에 파견하여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구체적 계획도 세워 놓았다. 그리고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을 기해 격문을 배포하고, 10일 국장 당일에 박내원, 권오설, 민창식, 양재식, 이용재 등이 학생, 양말직공, 인쇄직공 중에서 확실한 사람을 선발하여 지나가는 연도에 대기했다가 살포와 동시에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군중을 선동하기로 했다.

발각, 그럼에도 끊어지지 않은 시위 준비[편집 | 원본 편집]

종로경찰서 고등계는 순종 국장일을 앞두고 제2의 3.1 운동이 전개될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운동 88번지에 있는 천도교 주관 잡지사인 <개벽>사를 주목하다가 6월 6일 오전에 기습하여 수색했다. 하지만 별다른 불온 문서를 발견하지 못하자 일단 철수했다. 그날 오후 4시경, 종로경찰서와 헌병대는 다시 동원되어 천도교당 내외를 포위하고 엄중 수색했다. 이번에는 불온 인쇄물이 천도교당내에 은닉됐다는 확실한 정보에 따라 출동한 것이다. 교당 앞 손재기의 집을 수색하던 경찰은 격고문 등 인쇄물을 발견했다.

경찰은 손재기를 신문하여 인쇄물의 출처를 추궁한 끝에 박내원이 시켰다는 자백을 받은 다음 박내원을 체포하여 집중 심문했다. 6일 저녁부터 7일 아침 9시까지 갖은 악형을 가했으나 박내원이 입을 열지 않자, 민창식을 체포해 고문을 가했다. 민창식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인쇄 경위를 자백했다. 이에 박내원은 민창식과 단둘이서 인쇄했으며, 원고는 상해에서 김찬이 집필한 것이고 비용은 평북 출신 김모가 전해주고 갔다고 꾸며냈다.

그러나 형사들이 "민창식이 3~4인이 인쇄했다 자백했다"며 계속 고문을 가하자, 박내원은 4인이 인쇄한 게 맞다고 시인했지만 김찬으로부터 원고를 넘겨받고 김모로부터 자금을 건네받았다고 우겼다. 그러나 형사들이 속지 않고 고문을 더 심하게 가하자, 죽을 지경에 몰린 그는 결국 권오설로부터 원고를 받았으며 장사동에서 격문 등을 인쇄하였다는 사실도 실토했다. 경찰은 즉시 장사동에 들이닥쳐 권오설 등을 체포했다. 이로서 권오설 등 공산주의 계열과 천도교 계열의 연합 운동계획은 준비 단계에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시위 계획이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었으니, 학생들이 이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시위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6년 4월 26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은 세검정(洗劍亭)으로 춘계야유회를 가던 중, 순종 승하의 비보를 듣고 이 기회를 이용,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했다. 5월 20일 40여 명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 박하균(朴河鈞)의 하숙집에 모여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먼저 준비책임자로 이병립(李炳立)·이병호(李炳鎬)·이천진(李天鎭)·박두종(朴斗鍾) 등을 선출하고, 자금은 박하균·박두종 등이 맡도록 하였다.

6월 8일 이선호(李先鎬)·이병립·박두종·박하균 등이 서대문 솔밭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 30매를 만들고, 다음날 김종찬(金鍾讚) 하숙방에서 이병립이 “2천만 동포의 원수를 구축(驅逐)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은 <시대일보(時代日報)> 배달부 김낙환(金洛煥)을 통해 빌린 인쇄기계로 사직동 이석훈(李錫薰) 하숙집에서 1만 여 매를 인쇄한 뒤, 이선호·박두종·이천진·박하균·유면희(柳冕熙) 등이 각각 자기학교 학생 및 관련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한편,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 학생들도 별도로 시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은 순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등보통학교 학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들은 5월 29일 통동의 김재문 하숙방에서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金性洙)·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였다. 이들은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거사 계획은 일본 경찰에게 걸려들지 않았는데, 당시 그들의 수사망이 공산주의계와 천도교계 핵심 인사들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위[편집 | 원본 편집]

1926년 6월 10일, 수만 명에 달하는 민중이 경성으로 몰려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중 학생 수는 2만 5천여 명에 달했다. 당국은 3.1 운동과 같은 일이 재현될 것을 우려해 육해군 75,000여 명과 2,000여 명의 정사복 경찰을 동원하고, 인천과 부산에는 경계비대를 출동하는 등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오전 8시 30분 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났을 때, 중앙고보생 5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살포하였다.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근처에서는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을지로에서는 박두종 등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간부들이, 동대문 근처에서는 김낙환 등 <시대일보> 배달원들이, 오후 2시 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용철, 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 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격문을 살포했다.

이에 일부 군중이 합세하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려 하자, 일본군경이 급히 투입되어 군중을 강제 해산하였다. 이날 체포된 학생은 210명에 달했다. 이 사실이 각지에 알려지자, 고창, 순창, 청주, 울산, 군산, 평양, 홍성, 공주 등지의 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났고, 이어서 당진, 강경, 진주, 하동, 리원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경의 조기 투입으로 인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이와는 별개로 송학선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다른 일본 정치인들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송진우, 정인보 등은 순종의 유언을 위조하여 만세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만세 시위로 인해 체포된 학생들 중 취조받은 이가 106명, 수감된 이는 53명이었다. 하지만 조선 총독부는 강경하게 처리했다간 조선 민중의 불만이 폭발할 걸 우려하여 시위가 가라앉자 대부분을 석방했다. 남은 11명은 6월 25일 제령 제7호와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하여 11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다. 11월 17일 10명에게 2~3년, 1명에게는 1년의 징력형에 5년간 집행유예를 각각 언도했다. 이에 검사가 상소를 제기하여 1927년 3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다시 열렸다. 그 결과 10여 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았다.

영향[편집 | 원본 편집]

6.10 만세운동은 천도교와 공산주의 계열의 연합하에 대규모 시위의 형태로 일어날 예정이었으나, 실행 며칠 전 정보가 새는 바람에 지도부가 모조리 체포되면서 무산되는 듯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이와 별도로 시위를 독자적으로 준비했기에, 6월 10일 당일 만세시위가 실제로 벌어질 수 있었다. 이 일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햇던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민족운동을 이끌 수 있음을 암시했으며, 이는 3년 뒤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학생들이 조선 전역에서 시위를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각주

  1. 그러나 참정권을 가진 사람은 기업가, 지주, 일본인, 고위 공무원, 지식인 일부 등에 불과했으며, 이렇게 선출된 평의회, 협의회는 자문 정도나 할 수 있는 권한만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