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5·16 군사정변대한민국에서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쿠데타로, 1960년의 4.19 혁명 이후 박정희 소장을 위시한 육군사관학교 8기 세력들이 일으켰다. 대한민국 군사독재의 시작점이자 군사반란 사건으로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점에서 6.25 당시 7북한군이 침략을 벌인것과 동급으로 볼 수 있다.

명칭의 경우 보수층은 5.16 군사혁명 이라고 부르며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980년대 까지는 군사혁명 이라는 명칭을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었다. 반면, 진보층은 군사정변, 쿠데타, 심하면 군사 반란 이라는 명칭을 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박정희는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일본 군국주의를 연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실패한 쿠데타인 2.28 사건을 연구하여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2.28쿠데타는 수상 사이토 마코토(그 문화통치로 유명한 최장기 총독 연임한 그 양반)를 골로 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텐노가 밀어버려서 실패했다. 그래도 아주 의미가 없는 건 아닌데, 그 덕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요단강을 건너버리고 군국주의의 길로~ 그리고 그 다음은 도쿄가 불타고 일본국토가 황폐화 되고 핵폭탄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야 신난다~!

사실 5.16 군사정변이 첫번째 쿠데타 시도는 아니었다. 첫번째 쿠데타 시도는 한국전쟁 와중이었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부산 정치 파동이 발생했고, 훗날 반공포로 문제에서 보듯 이승만미국 관계는 영 껄끄러워 벤 플리트 장군과도 쿠데타 세력은 미리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파동 와중에 군을 동원하려던 이승만의 출동 명령을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거부했던 당시 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은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포섭 대상이 되으나, 역시 군인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워 쿠데타 가담을 거부하였고 거기다가, 미국 마저도 유사시 이승만을 제거한다는 상비작전을 세워 이승만을 조질려고 했으나 곧 관계가 회복되면서 포기, 일단 첫번째 시도는 불발된다.

허나 1960년3.15 부정선거 로 말미암아 4.19 혁명이 터지면서 혼란한 상황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모의하였다. 그 중에는 수틀리면 이승만 제거까지 계획하였으나, 목표였던 이승만 정부마저 4.19혁명으로 나가리(이승만 하야 선언) 되어서 또다시 불발된다.

이후 군부는 일단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는데 4.19직후 한국은 오랜만의 자유와 해빙기를 맞이하여 혼란의 카오스 상태라서 집권 민주당 신구파 갈등에 자유당 처벌이라던가도 지지부진 했고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경제는 여전히 똥망시망이었으며 미국이 원조 정책만 바꿨다 하면 리타이어 당하기 일수였다. 거기다가 각지에서 데모가 성행하는 등 혼란하였다.

이 꼴을 지켜보던 반란 세력은 앗싸~! 를 외치게 된다. 이 덕에 혁명 1주년을 맞이하여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즉 처음의 반란 거사일은 4월 19일이었던 셈, 하지만 시위는 없었고 그날은 조용히 지나간다.

모든 쿠데타가 그렇듯 처음엔 졸라게 엉성한 계획이었다. 장면 총리 는 CIA 한국 지부장 실버, 이종찬 참모총장, 재무장관 김영선, 군부에선 박병권 소장에게서 쿠데타 음모를 보고받았다.

4월 22일에는 쿠데타 가담자 이종태 대령 이 이를 군 수사당국에 밀고한다.

하지만 쿠데타 계획이 지속적으로 보고 내지는 밀고되고 있는 중이었지만, 엄청나게도 모두가 씹어버렸다. 사실 이종찬 장군에게 보고받았고 이후 장면 총리는 후임 장도영 총장에게 조사를 하라고 지시 했었지만 장도영 총장은 총리님께서 시켜서 하지만 쿠데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며, CIA나 주한미군 사령부는 함부로 움직였다간 내정간섭을 일으키게 되어 외교마찰이 일어날 것이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여간 저 중에 누구 한 명 관심을 더 가지고 조질 수만 있었다면 아마 박정희도 유신도 없었을 터.

사실 군사반란 당시 지식인들도 지지 내진 암묵적 동의를 보냈는데, 만약 이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반발했다면 저리 쉽게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진 못했을 것이다. (고 장준하 선생도 처음엔 일단 지지를 표했다)

이는 한국 정치학에서 말하길, 4.19 혁명의 발생은 이승만 정권이 식자 중산층 계층을 물적, 사회적, 정치적인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권을 제대로 분배조차 못하고 자유당 특정 인사들, 특히 이승만의 측근들 위주로 독점하였다. 이를 타개하고 고르게 국민들에게 분배할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 4.19 혁명 이었다는 것. 하지만 이후 들어선 2공화국 정부마저도 그들이 보기엔 1공화국과 별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실망하였고, 장교들의 쿠데타를 처음엔 지지했다고 한다.(아이러니컬 하게도 당대 장교단은 대부분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계층들 중 하나였다. 물론 이해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장교단의 쿠데타도, 장면 정부가 군비 축소를 감행하면서, 선진 엘리트 계급인 장교단이 순식간에 자신의 신분이 하락하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점에서 양 계급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지와 묵인은 결국 박정희 정권이 지속되면서 독재정권으로서의 그 본색이 드러나자 결국 철회되고 반 박정희, 반 유신 으로 변하게 되었다.

허나 16일 당일, 막상 한강 인도교에서 진압군(헌병)과 교전이 벌어지던 때도 박정희(당시 소장)는 어이쿠 맙소사! 우린 이제 다 죽었어! 라고 외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여기엔 마지막까지 정부 측인가? 쿠데타 측인가? 를 놓고 간을 보던 당시 참모총장이던 장도영장군의 탓이 크다고 하겠다.

거기다가 정부군 측도 더더욱 막장으로 빠져들고 있었는데 국방부로 달려가서 진압을 지휘해야 했던 당시 정부수반 장면 국무 총리는 체포될것을 우려해 미 대사관으로 일단 향했지만 미 대사관의 반응은 냉담했다. 여기서 당시 미국정부인 케네디 정부 측은 동북아 반공정책에 못미더웠던 장면내각에 대한 지지 철회를 선언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고, 여기에 맥이 빠진 장면총리는 결국 끝까지 저항하는 대신 카르멘 수녀원에 피신해 버리는 것을 택하고 만다.

한편 장도영 참모총장 명의로 세벽에 혁명공약이 라디오로 발표되었다. 대충 입법,사법,행정 삼권이 군부에 의해 장악, 혁명공약은 반공을 국시로 삼고 또한 반공태세를 강화하고 경제를 살리겠다로 요약 가능하다.

반면 우리 동맹국에서 쿠데타라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탱크를 몰려가서 대가릴 다 날려버리겠어! 역적노무 시키들! 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분기탱천한 맥 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은 윤보선 대통령과 미 대사관을 통해 본국에 진압을 건의한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에 이어 장면 내각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미국 정부측과 윤보선 대통령 모두 거부했다.

16일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당시 국가원수이자 군 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은 (이때 그 유명한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이란 말이 나왔다고.) 서울을 점령한 쿠데타군의 요구대로 반발하는 국방부 장관을 무시한 채 계엄령 선포를 추인하였고 내전과 북괴의 개입을 우려해 대통령은 진압건의를 거부한다.

17일에는 진압군을 지휘했던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은 쿠데타 세력의 강압으로 쿠데타를 지지하게 된다.

장면총리는 쿠데타 군에 의해 서울이 떨어지고 나서야 어기적어기적 나왔고 18일 마지막 국무회의를 열고 계엄령을 추인,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그 또한 사임한다. 이로서 장면내각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은 사실상 망했어요.

그 후 장도영 중장을 의장으로 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 후 정치 깡패 집단 화랑동지회를 조리돌림 시키며(문구는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이정재 등을 박살내고 또 대낮에 춤을 춘 남녀들을 옥내외집회금지령에 따라 징역형을 내렸다. 그리고 구악 일소를 내세우며 위의 정치깡패 처형과 4.19 발포 및 진압 책임자 처벌, 부정축재자와 비리 공무원 을 처벌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모으기도 했지만 아시다시피 곧 부정과 부패의 길로~훗날 4대의혹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그리고 그 장도영 장군을 위시로 한 반 박정희 파벌은 이른바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는(알래스카는 평안도 의 별명이라고 한다) 소위 반혁명 사건을 빌미로 숙청시키고 장도영 장군은 결국 예편한뒤 1963년에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민정이양의 약속대로 대장으로 예편한 뒤 민간인 신분으로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어 집권하면서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관련 인물[편집 | 원본 편집]

  • 박정희 소장(이후 대장으로 예편): 그는 쿠데타 이후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김재규에 의해 죽기 전까지 5~9대에 걸쳐 정권을 집권한다.
  • 장도영 중장: 쿠데타를 대충 진압하는 시늉을 하다가 박정희의 편에 붙었지만 숙청되어 미국으로 망명한다.
  • 김종필 준장(예편 될때의 계급): 초대 중정부장이 되고 제4공화국 때는 국무총리국회의원이 되었다.
  • 김형욱 준장(위와 동일): 은 4대 중정 부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됐으나 후에 김재규가 보낸 중정 요원에 의해 사망했다(추정) 그리고 궐석 재판을 당했다.
  • 박종규 소령: 육영수가 암살되기 전까지 경호실장을 지냈고 이후로도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피스톨 박'으로도 유명하다.
  • 차지철 대위(당시 계급, 이후 소령으로 예편): 국회의원과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
  • 박태준 소장(예편 당시 계급): 이후 포스코를 만든 그 박태준이 맞다. 원래 박정희가 쿠데타 실패를 대비하여 처자식의 안부를 맡기기 위해 참여하지 말것을 지시했지만 참여하였다.
  • 이후락: 쿠데타 이후로 박정희의 신임을 얻고 중정 부장 주일대사가 되었다.
  • 윤필용: 육군 방첩대장 수경사령관이 되었지만 윤필용 사건 이후로 권력과 멀어졌다.
  • 전두환: 5.16 가담자는 아니지만 5.16하면 생각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5.16환영 퍼레이드를 주도한 인물. 하나회의 창설자와 동시에 육사11기 출신중에 가장 빨리 별을 달았고 박정희 정권 시절 수경사 30대대장, 제1 공수특전여단장, 경호실 차장보, 보안사령관이 되었고 박정희의 사망 이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희대의 라이벌(?) 김대중전두환의 운명은 엇갈렸다. 인제군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사무처에 의원 등록하고 나온날이 바로 16일이었다. 그리곤 아시다시피 곧바로 정치활동 금지로 의원자격 박탈, 임기가 만 하루였다(...)안습, 반면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이끌어낸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어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또한 연호에 대한 법률이 개정되어 단기가 폐지되고 서기만으로 연도를 표시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당시 이 사건은 혁명으로 불리웠고, 4·19 민주화 혁명은 졸지에 의거가 되었다. 여의도 광장도 옛날에는 5·16광장이었다.

군사반란 원인에 대한 상반된 이론[편집 | 원본 편집]

베링턴 무어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약간 소외된 엘리트가 쿠데타나 혁명을 하면 성공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권력을 많이 가진 중심부는 이권을 직접 배분하는 기능을 해서 부정부패에 연루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외된 엘리트는 깨끗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 소외되어서 중심부의 견제와 감시망을 피할 수 있다. 불만을 가진 세력이 힘을 합칠 수 있다. 비주류적 성향 때문에 일부 진보 시민사회세력이 암묵적 혹은 공개적 지지를 할 수 있다.

한국 군부는 미군이 교육하고 훈련시키며 잘 조직되었고 엘리트로 채워졌다. 이는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이었다.

민주주의 실패론[편집 | 원본 편집]

혼란스러운 사회가 군부를 정치에 나서게 했다는 입장이라 사회유발론이라고도 부른다. 제2공화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패해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정당은 내부 권력다툼을 하고 시민사회는 혼란한 등 민주주의 공고화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부의 야욕[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군부의 야욕 때문에 무너졌고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당시 군부의 소외된 세력이 야욕 갖기에 충분한 조건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군인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군 관련 기구가 팽창했다. 그런데 전후 군이 점점 축소되어 진급이 정체되었다. 승진에서 탈락하는 군인이 늘어났다. 불만을 가진 소외된 엘리트가 정치로 관심을 돌려 정치에 참여해 이해관계를 도모하고자 하는 야욕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지 민주주의의 실패는 아니다.

민주주의 실패론은 군사반란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이다. 당시 장면정부는 9개월 정도의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 통치해서 이런 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실패를 단정짓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았고 곧 민주주의가 안착될 수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후퇴 되었으며, 군사적인 문화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민주화가 이뤄진 2000년대에도 이런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 민주국가에서 일어나선 안될 일들이 일어났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