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경과

사건 경과[편집 | 원본 편집]

간조,만조 정보의 출처는 국립해양조사원입니다.

2014년 4월 15일 : 비극이 시작되다. [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476
실종 0
사망 0
  • 18시 30분 출발 예정 시각. 그러나 짙은 안개로 출항이 지연되었다.
  • 21시경 2시간 30분의 지연 이후 인천항에서 출항했다.

2014년 4월 16일 : 세월호 침몰 [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300
사망 4
  • 7시경 현지 어민이 사고해역에 정박해 있는 세월호를 목격했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아 마을로 돌아갔다고 나중에 증언하였다.
  • 7시 50분경 사실상 배가 침몰하기 시작한 시각이다.
  • 8시 49분 세월호가 49분 37초부터 49분 56초까지 19초간 오른쪽으로 45도 변침했다. 해수부 관계자는 이 구간에서 외방경사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 8시 52분 탑승한 학생의 신고(시신으로 발견)가 전남소방본부로 최초로 접수되었다.
  • 8시 55분 세월호에서도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에 구조요청을 하였다.
  • 8시 58분 해경에서 세월호에 탑승한 최 학생의 신고를 접수하였다.
  • 9시 7분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는 세월호와의 교신 이후 세월호 근처 항해중인 중국 상선 1척과 한국 상선 2척에게 세월호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상교통관제센터들은 세월호의 상태가 어떤지 주변 선박에게 물어보는 등 세월호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 9시 10분 해양경찰청의 구조본부가 가동되었고, 직후 해경은 목포항공대 소속 헬기와 인근 전 경비함정 16척을 구조작업을 위해 현장에 출동시켰다.
  • 9시 18분 세월호가 좌현으로 50도 정도 기울어졌다.
  • 9시 23분 세월호가 선내 방송 불가로 승객들에게 퇴함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는 어떻게 해서든 승객들을 탈출시킬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 9시 30분 헬기가 도착하여 6명의 승객을 구조한 뒤로 본격적인 구조가 시작되었다. 구조에는 SSU, 해군 UDT/SEAL, 육군 특전사의 잠수요원들과 미 해군 와스프급 상륙모함 6번함 본홈리처드(LHD-6)가 수색, 구조 작업을 위해 투입되었다.

민간에서는 인근 라배도나 대마도(大馬島. 對馬島(쓰시마섬)이 아니라 진도군에 있는 섬이다)등의 어민들이 생업을 미뤄둔 채 어선 40여척을 동원해 구조하러 왔고 근처에 있던 식수공급선, 어업지도선, 자치단체 행정선, 낚싯배 등 구조활동이 가능한 배는 모두 사고해역으로 달려갔다.

  • 10시경 구조 헬기를 본 선사 여직원 박OO(23) 씨가 승객들에게 탈출하라고 외쳤고, 대부분의 승객들은 이 때부터 대피하기 시작했다.
  • 10시 14분, 박수현군이 마지막 사진들을 찍었다. 그때까지도 아이들하고 일반인 승객들는 구조을 기다리고 있었다.
  • 10시 17분, 한 여학생이 마지막 카카오톡을 보냈다
  • 10시 20분, 박군이 자기 단임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하고 배을 탈출할려고 했는데 물쌀땜에 박군만이 나왔다. 그가 마지막 생존자였다.
  • 11시 18분경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운채 2시간 20분 만에 완전히 전복되어 선수 일부만 남겨둔 채 침몰하고 말았다.
  • 12시 30분 구조 후 병원으로 호송되었던 남성 1명이 사망했는데, 단원고 2학년 학생인 정OO군으로 밝혀졌다.
  • 14시경 이 때부터 생존자들의 증언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침몰하기 직전에야 바다로 뛰어내리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선내방송은 계속 "위험하므로 선내에서 그대로 대기하라"라고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 15시경 해경은 기존에 집계되어 있던 구조자수의 집계가 중복집계로 인해 오류가 발생했음을 중대본에 통보한다.
  • 17시 해군과 해경이 수심이 낮은 부분의 선실부터 수색에 들어갔다.

수색대는 선실 3곳에 진입했으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선실에는 물만 차있었다고 전했다. 수색은 시계불량과 조류가 다시 빨라짐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 18시 30분경 사망자 1명이 추가로 발견 단원고 2학년 학생 권OO군으로 확인되었다.

환경공단 소속의 인양능력 2000t급 해상크레인이 진해에서 출발. 18일 20시 30분경 도착 예정.

  • 18시 40분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이 구조 수색 계획을 브리핑하고, 수색활동의 모든 상황을 해경에서 지휘, 브리핑하기로 하였다.
  • 19시 20분경 사망자 1명이 추가로 발견
  • 19시 40분 대우조선해양 소속의 인양능력 3200t급 해상크레인이 거제도에서 출발. (18일 05시 40분경 도착 예정.)
  • 20시 30분 삼성중공업 소속의 인양능력 3350t급 해상크레인이 거제도에서 출발. (18일 20시 20분경 도착 예정.)

2014년 4월 17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88
사망 16
  • 0시 30분 선체 수색작업을 예정보다 30분 앞당겨 해경 특공대 및 해군 잠수부 8명을 투입해 시작했다.

선내 수색 작업은 정조 시간이 끝나는 새벽 1시 반에서 두 시까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아침의 기상 악화를 우려하였는지 새벽 2시 반이 넘었음에도 수색을 계속 진행했다.

  • 1시 50분 한 학부모의 핸드폰에 16일 오후 10시 50분에 발송된 '식당에 많은 이들이 갇혀 있다. 살려달라' 라는 문자가 도착하였다. 생존 주장 문자를 믿고 진위여부 가리기보다 잠수부를 투입해 산소를 주입하겠다고 해수부 관계자는 전했다.
  • 4시 15분 정조 시각(간조)
  • 6시 30분 밤 사이 사망자가 2명이 수습되었다. 이후 단원고 교사 최OO씨와 학생 박OO양으로 확인되었다.

아침 수색 재개.

  • 8시 20분 신원미상의 사망자 여성 2명이 단원고 교사 최OO씨와 박OO양으로 확인되었으나, 박 양 부모님과 작년 담임선생님의 확인 결과 박 양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 9시 30분 민간잠수부 555명이 투입되었다고 정부가 발표하였다.
  • 9시 50분 추가 사망자가 발견되었으며, 몇 시간 뒤에 단원고 2학년 박OO군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오후 9시에 DNA 검사를 통해 이OO군인 걸로 확인.

인근 해역에서 29세 김OO씨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 10시 23분 정조 시각(만조)
  • 10시 50분 해경이 선장을 업무상 과실치사의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하여 사고 원인과 지침 이행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 11시 18분경 세월호가 침몰한 지 24시간이 경과하였다.
  • 14시 20분 구조활동을 돕던 민간다이버 3명이 복귀도중 높은 파도에 휩쓸려 한 때 실종되었다가 5분여 만에 근처 민간어선에 의해 발견, 구조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실종된 게 아니라 잠시 보이지 않았을 뿐 무사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 15시경 객실에 산소를 주입하려는 계획이 강한 해류로 인해 실패.

민간 잠수부가 선내에서 사람을 목격했다는 이야기 역시 오보로 밝혀졌다.

  • 16시 17분 정조 시각(간조)
  • 20시 39분 신원 불명의 여성 사망자 한 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 20시 45분 신원 불명의 남성 사망자 한 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 21시 05분 신원 불명의 여성 사망자 한 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 21시 20분 신원 불명의 남성 사망자 한 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 22시 51분 정조 시각(만조)
  • 23시 11분 신원 불명의 남성 사망자 두 명과 여성 사망자 두 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발견 장소는 사고 인근 해역이다

2014년 4월 18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82
사망 22
  • 0시 17분 신원 불명의 여성 시신 2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 0시 54분 신원 불명의 남성 시신 1구, 여성 시신 2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 4시 51분 정조 시각(간조)
  • 7시 30분 17일 저녁부터 18일 새벽까지 발견된 시신 중 10구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8명의 단원고 학생과 1명의 직원, 1명의 일반인이라고 한다.
  • 8시 32분 크레인선 3척이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중앙안전대책본부는 실종자 가족들의 동의가 나오기 전까진 인양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으며 도착한 크레인선들은 인양 준비작업만 실시하고 있다.
  • 10시 05분 사고발생 49시간 만에 세월호 선체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가 확보되었다.
  • 10시 20분 정조 시각(만조)
  • 10시 50분 해경 잠수부들이 선내에 공기주입 시작.
  • 11시 27분 침몰한지 약 48시간 만에 수면 밖으로 조금 나와 있던 뱃머리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 11시 29분 신원 불명의 시신 1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 12시 조금씩 가라앉는 배의 부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선체 곳곳에 대형 공기주머니를 설치하기로 했다. 外#
  • 12시 33분 신원 불명의 남성 사망자 두 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 13시 03분 삼성 중공업 소속 크레인선(삼성2호, 3,350t급)이 도착해 인양준비작업에 들어갔다.
  • 13시 30분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사망자 명단을 비공개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후로는 실명 전체가 아니라 성씨만 언급할 거라고 한다.
  • 15시 38분 해경 잠수부들이 화물칸을 통해 선내에 진입했다.
  • 16시 05분 구조됐던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교감이 자살하여 진도체육관 뒷편 야산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유서는 20시 경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 16시 29분 정조 시각(간조)
  • 16시 36분 선내에 진입했던 잠수부들이 유도선의 절단으로 진입 14분만에 철수하고 말았다.
  • 16시 42분 세월호에서 기름이 유출돼 주변바다에 유막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 18시 28분 해군 특수구조단 20여 명이 3층 선실에 진입을 시도했다.
  • 19시 20분 3층 레크레이션실에서 공기가 역류하는 현상이 발생해 작업이 잠시 중단되었다.
  • 19시 31분 선장 이준석을 비롯 핵심 승무원 3명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 22시 25분 정조 시각(만조)
  • 23시 08분 해경잠수요원 2명이 선수 3층 격실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각종 수중 장애물 등으로 추가 진입이 어려워 퇴수.
  • 23시 54분 추가 사망자가 발견되었으며, 해경 발표에 따르면 정OO 씨로 확인되었다.

2014년 4월 19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76
사망 28
  • 3시 10분 해경은 파도와 조류로 인해 1시간 지연되었던 구조작업을 재개했다. 35명의 잠수부는 교대로 선체 진입을 재시도했다.
  • 5시 40분 정조 시각(간조)
  • 5시 50분 잠수부들은 선내 4층에서 사망자 3명을 발견해 수습하려 했으나, 부유물질과 잠수시간 초과로 더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내려가 창문을 깨서 시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높은 파도와 조류 때문에 선체 진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시신 유실을 막기 위해 세월호 주변 해역에 그물망을 설치했다.
  • 10시 00분 해양경찰청의 브리핑에 따르면, 선수부분은 이제 수면 아래 10m까지 내려간 상태라고 한다.
  • 11시 13분 정조 시각(만조)
  • 11시 18분경 세월호가 침몰한 지 72시간이 경과하였다.
  • 16시 55분 세월호 침몰 사고 지점 부근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의 시신 1구가 발견되었다.
  • 17시 12분 정조 시각(간조)
  • 17시 48분 3011함 단정이 여성 시신 1구를 발견하여 인양되었다.
  • 17시 58분 31번째 시신 발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원 불명의 여성 시신 1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 18시 00분 유도선을 두개 설치했으나 기상상황의 악화로 수중수색에 진전이 없는 상태.
  • 19시 30분 신원 불명의 여성 시신 1구를 발견하여 인양되었다.
  • 23시 13분 정조 시각(만조)
  • 23시 48분 구조팀이 선체 유리창을 깨고 4층 격실에 있던 시신 3구를 수습하였다. 선내 첫 사망자 수습으로, 수습 시신은 단원고 학생 이OO 군, 김OO 군, 김OO 군으로 밝혀졌다.

2014년 4월 20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54
사망 50
  • 0시 55분 선체 인근에 표류하던 시신 3구가 추가로 수습되었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곧 정정되었다.
  • 5시 35분 격실 내에서 30대로 추정되는 신원미상의 남성 사망자를 수습하였다. 이 남성은 발견된 지 사흘이 넘어도 연고자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 5시 40분 정조 시각(간조)
  • 5시 50분 격실 내에서 3구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하였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최OO 씨와 고OO 씨 그리고 이OO 군이라고 한다.
  • 8시 2분 선체 내에서 시신 9구를 추가 수습하였다.外#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2반의 김OO 양과 한OO 양, 5반의 최OO 군[1]과 7반의 오OO 군과 국OO 군과 97년생 이OO 군과 김OO 군이라고 한다.
  • 11시 48분 해상에서 시신 1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 12시 9분 정조 시각(만조)
  • 12시 10분경 선체 내 진입 루트가 5곳 개척되었고, 선내 진입을 재시도했다.
  • 12시 20분경 4월 16일에 사고 해역으로 가려던 대조영함에서 준비 작업 중 중상을 입은 윤모 병장이 결국 4월 19일 밤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 13시 34분경 시신 2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3시 52분경 문OO군과 김OO군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하였다.
  • 14시 16분경 시신 2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7시 44분 시신 2구를 추가 수습하였다.
  • 17시 55분 정조 시각(간조)
  • 21시 50분경 세월호 선미에 유도선을 연장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 22시 8분 대한민국 정부가 안산·진도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 22시 40분 원격수중탐색장비(ROV) 2대와 미국 기술진 2명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참고로 이때 실종자 가족들은 처음으로 청와대에 가려고 했지만, 진도대교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2014년 4월 21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17
사망 87
  • 0시 3분 정조 시각(만조)
  • 1시 11분경 단원고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5시 45분경 4층 선미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2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6시 45분경 위와 같은 장소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7시 19분 정조 시각(간조)
  • 7시 20분경 격실 내부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2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1시 26분경 검경합동 수사본부가 항해사 3명과 기관장을 체포했다.
  • 13시 9분 정조 시각(만조)
  • 17시 13분경 선내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7시 34분경 선내에서 60대로 추정되는 남성 시신 2구와 여성 시신 1구 그리고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여성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9시 19분경 검경합동 수사본부가 승선자 400여명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보, 사고분석을 위해 시간대별 배열 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세월호 소유회사와 선박오너, 실소유자로 알려진 대주주 등 총 40명의 출국금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 18시 40분 정조 시각(간조)
  • 20시경 선내에서 시신 1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21시 09분경 선내에서 시신 7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2014년 4월 22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84
사망 120
  • 0시 57분 정조 시각(만조)
  • 7시 52분경 시신 3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8시 13분 정조 시각(간조)
  • 8시 35분경 시신 3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8시 46분경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8시 59분경 시신 5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0시경 시신 5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그리고 식당칸 진입에 실패했다.
  • 10시 43분경 선미 격실에서 신원 미상의 여성 시신 1구가 수습하였다.
  • 12시 31분경 단원고 학생으로 추정되는 K양의 시신을 선내 격실에서 수습하였다.
  • 13시 45분경 시신 2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4시 16분 정조 시각(만조)
  • 15시 32분경 뱃머리가 수면 20m 아래까지 가라앉았다. 外#
  • 15시 40분경 3층 식당칸 진입에 성공했다.
  • 18시 30분 참고인 조사 직후 자살을 시도했던 1등 기관사를 정식으로 체포했다.
  • 18시 32분경 객실에서 여성 시신 4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8시 43분경 남성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9시 31분 정조 시각(간조)
  • 20시 35분경 선내에서 시신 3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20시 48분경 선내에서 단원고 남학생 추정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21시 15분경 선내에서 시신 4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2014년 4월 23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46
사망 158
  • 0시 25분경 선내 4층 객실에서 시신 7구를 발견해 추가로 수습하였다.
  • 2시 1분 정조 시각(만조)
  • 8시 16분경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2구,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 신원 미상 남성의 시신 2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9시 13분 정조 시각(간조)
  • 9시 38분경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3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9시 45분경 시신 3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0시 17분경 시신 3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0시 59분경 시신 8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4시 20분경 해경이 에어포켓이 확인 되지 않았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 13시 20분경 단원고 학생 25명의 발인이 진행 되었다.
  • 15시 30분 정조 시각(만조)
  • 15시 45분경 학생들의 시신이 뒤바뀌는 세번째 사고가 일어났다.
  • 17시 50분경 시신 6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8시 00분경 해경의 에어포켓 부재발표에 대해, 대책본부는 끝까지 구조한 뒤 선박을 인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20시 35분 정조 시각(간조)
  • 22시 22분경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23시 08분경 시신 2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2014년 4월 24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12
사망 192
  • 3시 17분 정조 시각(만조)
  • 10시 17분 정조 시각(간조)
  • 11시 경 시신 4구를 수습하였다.
  • 12시 53분경 시신 5구를 수습하였다.
  • 13시 경 실종자 가족들이 정부 관계자에게 수색 작업에 대해 항의했다.
  • 14시 19분경 시신 3구를 수습했다.
  • 16시 35분경 실종자 가족들이 정부 관계자와 몸싸움을 벌였다.
  • 16시 38분 정조 시각(만조)
  • 17시 경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과 실종자 가족 간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 18시 45분경 4층 선미 중앙객실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수습하였다.
  • 19시 경 시신 3구를 수습했다.
  • 21시 50분경 탈출 승무원 11명을 구속했다.
  • 21시 52분 정조 시각(간조)

2014년 4월 25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02
사망 202
  • 0시 35분경 시신 5구를 수습하였다.
  • 3시 10분경 시신 1구를 수습하였다.
  • 4시 36분 정조 시각(만조)
  • 10시 16분경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과 실종자 가족 간의 회의가 끝났다.
  • 11시 7분경 4층 선미에서 여성 시신 1구를 수습하였다.外#
  • 11시 16분 정조 시각(간조)
  • 12시 30분경 여성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15시 25분경 4층 선미 중앙격실과 사고 해역 남쪽 50m 부근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2구를 발견해 수습하였다.
  • 17시 35분 정조 시각(만조)
  • 23시 10분 정조 시각(간조)

2014년 4월 26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00
사망 204
  • 0시 50분경 3층 중앙식당에서 시신 2구를 추가로 발견해 수습하였다.
  • 5시경 다이빙 벨 설치 실패.
  • 5시 55분 정조 시각(만조)
  • 12시 5분 정조 시각(간조)
  • 18시 21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4월 27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99
사망 205
  • 0시 20분경 합동수사본부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의 압수수색을 종료하고 획득한 자료를 대검찰청 디지털 분석팀에 의뢰했다.
  • 3시 55분 정조 시각(간조)
  • 9시 45분 정조 시각(만조)
  • 10시경 정홍원 국무총리가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해 국민에게 사죄한다고 밝히면서 사퇴했다.
  • 14시경 선내에서 시신 1구를 수습하였다.
  • 16시 13분 정조 시각(간조)
  • 22시 12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4월 28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98
사망 206
  • 0시 3분경 합동수사본부가 특수폭약으로 선체 일부를 파괴한 뒤에 진입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 1시 12분 정조 시각(간조)
  • 7시 27분 정조 시각(만조)
  • 13시 19분 정조 시각(간조)
  • 14시 10분경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19시 40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4월 29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93
사망 211
  • 1시 58분 정조 시각(간조)
  • 2시 57분경 선내 4층 좌현 선수 2번 방과 5층 로비에서 각각 시신 2구가 수습되었다.
  • 8시 10분 정조 시각(만조)
  • 10시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합동대책본부에 의해 설립된 공식 합동분향소의 조문이 시작되었다.
  • 13시 50분 정조 시각(간조)
  • 16시경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8구와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3구,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20시 18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4월 30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86
사망 218
  • 2시 39분 정조 시각(간조)
  • 3시경 4층 선수 좌현 첫번째 객실에서 단원고 학생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3명이, 그리고 5층 로비에서 여성 희생자 1명이 발견되었다.
  • 7시경 4층에서 희생자 1명이 발견되었다.
  • 8시 52분 정조 시각(만조)
  • 14시 23분 정조 시각(간조)
  • 15시 44분경 학생으로 추정되는 남성 시신 1구를 4층 선수 좌현 첫번째 객실에서, 학생으로 추정되는 여성 시신 1구를 침몰 해역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 동* 거차도 앞 해상에서 발견해 수습했다.
  • 20시 59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1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79
사망 225
  • 3시 18분 정조 시각(간조)
  • 4시경 4층 선수 좌현 3번 객실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남성 사망자 1명을 수습했다.
  • 3시경~5시경 다이빙벨 투입, 잠수사 3명이 20m깊이로 잠수 75분간 얽혀 있는 가이드라인을 푸는 작업을 시행
  • 9시 35분 정조 시각(만조)
  • 11시경 이종인 대표, 구조에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다이빙벨 바지선 철수
  • 14시 27분경 4층 선수 좌현 격실에서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수습했다. 이어 선미 중앙 격실과 선수 좌현 격실 등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와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2구를 수습했다.
  • 15시 2분 정조 시각(간조)
  • 16시 05분경 4층 선수 좌현 중앙 격실에서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2구를 추가로 수습했다.
  • 18시 39분경 3층 중앙 우현 식당에서 신원 미상의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18시 55분경 4층 키즈룸에서 남학생 이 모군의 시신을 수습했다.
  • 21시 43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2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72
사망 232
  • 3시 58분 정조 시각(간조)
  • 4시 42분경 4층 중앙 격실과 3층 로비 부근에서 남성 사망자 4명을 발견했다.
  • 6시 30분경 침몰 사고 지점에서 남동쪽으로 3.94㎞(2.45마일) 떨어진 해역에서 신원미상의 여성 시신 1구를 발견했다.
  • 10시 20분 정조 시각(만조)
  • 15시 38분경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15시 45분 정조 시각(간조)
  • 16시 15분경 신원 미상의 시신 1구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 22시 28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3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65
사망 239
  • 4시 37분 정조 시각(간조)
  • 11시 05분 정조 시각(만조)
  • 12시 10분경 4층 선수와 3층 중앙로비에서 단원고 여교사로 추정되는 시신 1구와 일반인 인모(59·여)씨의 시신을 수습했다.
  • 15시 38분경 4층 선수 중앙 좌현 격실 등에서 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와 신원 미상의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15시 59분경 4층 선미 중앙 룸에서 신원미상의 여성 시신 1구를 수습하였다.
  • 16시 11분경 4층 선수 중앙 좌현 5번째 격실에서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시신 1구를 수습했다.外#
  • 16시 28분경 선수 중앙 좌현 5번째 격실에서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시신 1구를 발견했다.
  • 16시 28분 정조 시각(간조)
  • 16시 50분경 4층 선미 좌현 룸에서 이모(17)군의 시신을 발견했다.
  • 23시 14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4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53
사망 251
  • 4시 40분경 시신 6구를 수습했다.
  • 5시 16분 정조 시각(간조)
  • 11시 52분 정조 시각(만조)
  • 13시 12분경 3층 주방 옆 선원식당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시신 1구를, 4층 선수 중앙 좌현 2번째 격실에서 20대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남성 희생자 시신 1구를 각각 수습했다.
  • 17시 3분경 4층 중앙 우현 2번째 격실에서 희생자 박모(17)양의 시신을 수습했다.
  • 17시 8분 정조 시각(간조)
  • 17시 37분경 4층 선수 중앙 좌현 3번째 격실에서 희생자 김모(16)군의 시신을 수습했다.
  • 17시 45분경 4층 선수 중앙 좌현 3번째 격실에서 홍 모군(17)의 시신을 발견했다.
  • 18시 11분경 4층 선수 중앙 좌현 3번째 격실에서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희생자 시신 1구를 수습했다.

2014년 5월 5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39
사망 265
  • 0시 정조 시각(간조)
  • 5시 56분 정조 시각(만조)
  • 6시 17분경 시신 6구를 수습했다.
  • 7시 40분경 시신 5구를 수습했다.
  • 12시 43분 정조 시각(간조)
  • 13시 43분경 4층 선수 중앙 좌현 객실에서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17시 44분 정조 시각(만조)
  • 19시 12분경 4층 선수 중앙 우현 2번째 객실에서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19시 26분경 4층 선수 중앙 우현 2번째 객실에서 박 모군(17)의 시신을 수습했다.

2014년 5월 6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33
사망 271
  • 0시 10분경 합동수사본부가 침몰의 최대 원인으로 알려진 화물과적에 관해 청해진 해운 임원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를 재촉했으며 피의자 심사는 5월 6일 점심 이전에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 0시 48분 정조 시각(간조)
  • 6시 22분경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1구가 발견되었다.外#
  • 6시 39분 정조 시각(만조)
  • 7시 12분경 민간 잠수요원 1명이 수색작업 도중 사망했다.
  • 13시 42분 정조 시각(간조)
  • 14시 27분경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추가로 인양했다.
  • 18시 18분 정조 시각(만조)
  • 20시 50분경 시신 4구를 수습했다.

2014년 5월 7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32
사망 272
  • 0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은 청해진해운의 상무에 대한 밤샘조사를 할 것이라 발표했다.
  • 1시 10분경 본격적인 소조기에 진입해 수색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합동수사본부의 발표가 있었다. 해상의 작업보조가 유리한 시기의 정조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추가작업을 서두르는 것이 확인 되었다고 한다.
  • 1시 40분 정조 시각(간조)
  • 7시 29분 정조 시각(만조)
  • 9시 27분경 4층 선미 부분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발견해 수습했다.
  • 14시 57분 정조 시각(간조)
  • 18시 54분 정조 시각(만조)
  • 20시 20분경 침몰 해역에서 대기 중인 목포해경 3009함에서 정모(49) 경사가 쓰러져 의식 불명에 빠졌다.

2014년 5월 8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8
사망 276
  • 2시 22분 정조 시각(만조)
  • 14시 14분 정조 시각(간조)
  • 20시 13분 정조 시각(만조)
  • 20시 15분경 4층 선수 중앙 격실 등지에서 남자 시신 2구를 수습했다.
  • 21시 15분경 5층 선수 우측 선원실 네번째 방에서 여성으로 보이는 시신 1구를 추가 수습했다.
  • 21시 27분경 시신 1구를 수습했다.

2014년 5월 9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7
사망 277
  • 4시 52분 정조 시각(만조)
  • 11시 22분 정조 시각(간조)
  • 17시 52분 정조 시각(만조)
  • 21시 42분경 4층 선수 좌현 격실에서 남학생으로 보이는 시신 1구를 인양했다.
  • 23시 44분 정조 시각(간조)

2014년 5월 10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3
사망 279
  • 0시 5분경 시신 2구를 발견해 수습했다.
  • 4시 51분 정조 시각(간조)
  • 11시 1분 정조 시각(만조)
  • 18시 1분 정조 시각(간조)
  • 23시 37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11일-12일 : 시신 수습 기록 없음[편집 | 원본 편집]

2014년 5월 13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24
사망 280
  • 1시 32분 정조 시각(간조)
  • 7시 00분 정조 시각(만조)
  • 13시 15분 정조 시각(간조)
  • 13시 20분경 4층 선미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19시 15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14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9
사망 285
  • 2시 17분 정조 시각(간조)
  • 7시 41분 정조 시각(만조)
  • 13시 33분경 선체 선미 쪽에서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떠오른 시신 1구를 수습한 뒤 4층 선수 좌측 객실에서 2구, 4층 선미 중앙 다인실 1구, 4층 선미 좌측 다인실 통로 1구 등 총 5구를 수습했다.
  • 13시 52분 정조 시각(간조)
  • 19시 49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15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6
사망 288
  • 5시 42분 정조 시각(간조)
  • 11시 2분 정조 시각(만조)
  • 14시 9분경 4층 중앙 우현 3번째 객실에서 신원 미상의 시신 1구를 인양했다.
  • 16시경 시신 2구를 수습했다.
  • 17시 41분 정조 시각(간조)
  • 23시 43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16일 : 시신 수습 기록 없음[편집 | 원본 편집]

  • 15시 45분경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만나 정부의 부실한 대응을 직접 사과했다.

2014년 5월 17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5
사망 289
  • 3시 25분 정조 시각(간조)
  • 4시경 남성 시신 1구를 4층 선수 좌현 부분에서 수습했다.
  • 10시 2분 정조 시각(만조)
  • 16시 2분 정조 시각(간조)
  • 22시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18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4
사망 290
  • 4시 5분 정조 시각(간조)
  • 4시 53분경 3층 선원식당에서 여성으로 보이는 시신 1구를 인양했다.
  • 10시 54분 정조 시각(만조)
  • 16시 48분 정조 시각(간조)
  • 22시 49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19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3
사망 291
  • 6시 6분 정조 시각(간조)
  • 9시 박근혜정부의 세월호 대국민발표
  • 11시 46분 정조 시각(만조)
  • 17시 34분 정조 시각(간조)
  • 18시경 3층 주방식당에서 단원고 교사 전OO씨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 23시 40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5월 20일: 시신 수습 기록 없음[편집 | 원본 편집]

  • 15시경 희생자 가족들의 담화가 있었다.

2014년 5월 21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2
사망 292
  • 6시 24분 정조 시각(간조)
  • 8시경 4층 중앙 좌측 통로에서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의 시신을 수습했다.
  • 13시 41분 정조 시각(만조)
  • 19시 12분 정조 시각(간조)

2014년 5월 22일 - 6월 23일 : 시신 수습 기록 없음[편집 | 원본 편집]

2014년 6월 24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1
사망 293
  • 01시 03분경 4층 중앙 통로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시신 1구를 수습했다.
  • 04시 07분 정조 시각(간조)
  • 09시 39분 정조 시각(만조)
  • 15시 58분 정조 시각(간조)
  • 22시 49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6월 25일 - 7월 17일 : 시신 수습 기록 없음[편집 | 원본 편집]

  • 7월 17일 10시 53분경 광주 광산구 장덕동 도로에 세월호 현장 지원활동을 마치고 복귀하던 소방헬기가 추락했다. 이 사고로 승무원 4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2014년 7월 18일[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10
사망 294
  • 05시 40분 정조 시각(간조)
  • 06시 20분경 선체 3층 중앙에 위치한 주방의 가스통 근처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실종자 시신 1구를 발견하여 수습했다.
  • 12시 39분 정조 시각(만조)
  • 18시 56분 정조 시각(간조)

2014년 7월 19일 - 2014년 10월 27일 : 시신 발견 기록 없음[편집 | 원본 편집]

  • 8월 7일 00시 32분경 실종자 수색 어선이 유조선과 충돌하여 침몰하였지만 다행히 전원 구조되었다.

2014년 10월 28일 : 102일만의 시신 발견[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상황
총 승객 476
생존 172
실종 9
사망 295
  • 01시 38분 정조 시각(간조)
  • 08시 13분 정조 시각(만조)
  • 14시 36분 정조 시각(간조)
  • 17시 25분 여자화장실에서 여성 추정 시신발견, 유속이 심해 수습못함. 나중에 단원고 2학년 황 모양으로 밝혀짐
  • 22시 00분 정조 시각(만조)

2014년 11월 11일[편집 | 원본 편집]

  • 정부는 이 날을 마지막으로 실종자 수습을 종료했다.

사건 후[편집 | 원본 편집]

2015년 11월 12일[편집 | 원본 편집]

2016년 3월 28일[편집 | 원본 편집]

  •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2차 청문회가 28~29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진행되었다.

2016년 6월 12일[편집 | 원본 편집]

  • 세월호가 침몰한 지 788일만에 본격적인 인양이 시작되었다. 인양의 첫 단계인 세월호 뱃머리(선수) 들기 공정이 진행 중이다.[3] 선채에 공기 주머니를 달아 부양시키는 방법을 쓰고자 했으나, 해당 공법으로 인양이 어려워 인양을 이듬해 3월 ~ 4월로 조정했다.

2017년 3월 : 항해 종료[편집 | 원본 편집]

목포신항의 세월호

인양 공법을 바꾸어 인양에 재착수했다. 본래 4월 초순에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3월 하순의 기상이 양호할 것으로 예상되어 22일부터 인양 작업에 착수했다. 전 공정은 약 13일이 걸릴 예정이다.

3월 10일
세월호 인양을 시도하겠다고 결정했다.
3월 18일 ~ 19일
3월 20일~22일 세월호를 인양하겠다고 발표했다. 19일에 조기 인양하겠다는 발표도 있었으나 기상 여건 변화로 금방 취소되었다.
3월 22일
사건 발생 1072일만에 드디어 본격적 인양이 시작되었다. 사전 시험으로 진흙속에 뭍힌 세월호를 1m 들어올리는데는 5시간 반이 걸렸으며, 작업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돼 본 공정에 착수했다.
3월 31일
오후 1시, 해상 공정이 완료되고 선체 운반선이 목포신항 철제부두에 접안했다.

2017년 5월 : 실종자 수습[편집 | 원본 편집]

5월 13일
9명의 미수습자 중 세월호 4층 선미 8인실에서 미수습자 유해 신원 첫 확인.[4]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원을 보도하는 것은 자제해달라고 해양수산부가 당부했다.[5]
5월 17일
9명의 미수습자 중 세월호 침몰 해역 수중에서 발견된 유골에서 첫 신원 확인.[6]
5월 19일
16일 세월호 3층 객실부 우현에서 수습된 유골의 신원 확인[7]
5월 25일
5월 13일 보도가 난 유해 신원 공식 확인[8]

2017년 6월[편집 | 원본 편집]

6월 28일
화물칸에 실린 차량들을 꺼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9]

2017년 8월[편집 | 원본 편집]

8월 11일
7월 26일 화물칸에서 발견된 유골의 신원이 확인되었다.[10]

2017년 10월[편집 | 원본 편집]

10월 12일
국가위기관리지침 제18조.JPG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12일 춘추관 브리핑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후 첫 서면보고가 이뤄진 시각 오전 9시 30분이 2014년 10월 23일자 수정보고서에서 오전 10시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에 임종석 비서실장은 보고 시점과 지시 시점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또, 국가 위기관리 지침의 “국가안보실장은 안보·재난 분야별로 위기징후 목록 및 상황정보를 종합·관리한다”라는 대목이 “국가안보실장은 안보 분야, 안전행정부 장관은 재난 분야의 위기징후 목록 및 상황 정보를 관리한다”로 수정된 것을 지적하였다.이는 법제처의 심의 절차를 밟지 않은 채 빨간펜을 긋는 식으로 불법 수정되어 논란을 더욱 키우게 만들었다.[11]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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