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3.1 운동.jpg 1919년 3월 1일 덕수궁 앞에 집결한 군중.

三一運動. 3·1 만세운동(三一萬歲運動) 또는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으로도 일컬어진다. 1919년 3월 1일부터 수개월간 조선 각지와 만주, 미국 등지에서 전개된 대규모 시위운동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사의 이정표가 된 중요한 사건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된 이래, 일본 제국은 경성부에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뒤 조선 전역에 일본군과 헌병을 배치하여 한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자 하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헌병사령부의 육군 헌병대 병력을 헌병경찰로 전환하여 전국에 배치했다. 1911년 12월 말 13개 도에 헌병대 본부를 설치하고, 헌병분대, 헌병 분견소, 헌병 파견소, 헌병 출장소에 이르기까지 934개의 지점에 헌병대 관련 부서를 개설했다. 헌병들은 치안 확보, 독립투사 체포, 징세 등 여러 임무를 맡았으며, 반항하는 조선인을 붙잡아서 현장에서 태형을 가했다. 여기에 조선인을 헌병 보조원으로 고용하여 민족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외 조선의 모든 신문사를 정간 및 폐간하여 언론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세금을 거둘 기반을 확보했으며, 회사령, 조선광업령, 어업령, 산림령 등을 잇달아 발표해 조선인들의 민족자본 육성을 억압했다. 그리고 민족교육이 실시되던 서당과 사립학교들을 대부분 폐교하고, 각종 교과서와 민간에서 발행한 역사서 및 위인전을 금서로 지정했으며, 조선인 학생에게 초등교육만 실시하고 중등교육 이상은 대부분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 학생으로 채워졌다. 그나마 조선인 학생을 가르친 교사들은 군인 복장을 하고 허리에 칼을 찼으며, 학생이 반항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태형을 시행해 공포 분위기를 조장했다.

일제의 이같은 무단통치(武斷統治)는 한인들의 반감을 샀다. 만주, 연해주에서 무장독립단체들이 등장하여 만주-조선 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맞섰고, 국내 각지에서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사가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을 추진했다. 이 비밀단체들은 대부분 일제에 발각되어 해체되었지만, 일부 조직원들은 수사망을 피해 숨어 지내다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비밀결사를 재조직하여 운동의 확산을 이끌어냈다. 여기에 일제의 탄압을 피해 비밀리에 결성된 야학은 한인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무단통치에 대한 반감을 키우게 하였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1910년대 조선 경제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수탈로 인해 암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이래 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리며 호황을 만끽하고 있을 때, 식민지였던 조선 경제 역시 성장했다. 1913년 532개였던 공장은 1916년 1,075개로, 1918년 1,700개로 가파르게 증가했으며, 종업원 수 역시 1910년에서 1918년 사이 3.3배 증가했고 공장 생산액도 3.9배 증가했다. 한편 1913년도 대일본수출은 2531만 여원, 수입은 4042만 여원으로 수입액이 수출액의 2배에 가까울 정도로 대일무역 적자가 심각했으나, 1918년에는 대일본 수출액이 1억 3720만 여원, 수입액은 1억 1,727만 여원으로 대일무역 흑자가 나타났고, 1919년에는 수출액이 1억 9,984만 여원, 수입액이 1억 8497만 여원으로 수지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또한 1914년 이후 생사, 한지 수출 등으로 지방 경제 역시 활발해졌으며, 조선에 노동자 계층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조선 경제가 전쟁 특수로 호황을 이루면서 통화량이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조선의 현금유통량은 1915년부터 증가하여 1918년에는 1916년의 2배에 달했다. 그러자 조선의 특산물인 쌀의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특히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이 발표되자 만주의 유휴자본이 조선 미곡거래소로 유입되면서 쌀 가격이 폭증했다. 그러자 투기꾼들이 쌀을 대량 매입한 뒤 나중에 비싸게 팔아먹으려 들면서, 쌀 시장 공급 부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 제국과 조선은 베트남에서 쌀을 수입하였지만, 이로 인해 베트남 쌀 가격이 위험 수준으로 올라가자 1918년 12월 인도 차이나령의 프랑스 총독이 미곡수출금지령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1919년 1월과 2월의 쌀 가격은 살인적으로 폭등하여 서민들이 쌀을 구할 길이 막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8년 7월 초 일본의 후쿠야마 현에서 쌀 소동이 발생했다. 이 소동이 일본 각지로 확산되었고, 8월 10일엔 교토와 나고야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1918년 7월부터 1919년 초까지 총 369곳에서 수백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일본군 10만 명 이상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일본 정부는 국내에서 발생한 쌀 시위가 조선에 미치지 않게 하고자 구제 방침을 결정했다. 8월 15일 경성부, 경성상업회의소, 본정과 종로 경찰서, 조선신문사,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그리고 경성 유지들을 동원하여 경성구제회를 조직했다. 이어서 인천, 목포, 평양 등 주요도시에서도 구제회가 소집 또는 조직되었고, 지방비의 보조와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쌀을 확보하여 시중에 비해 염가로 쌀을 판매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구제소의 염매미 판매 방식은 곧 한계를 맞이했다. 염매소가 개장되자마자 염매미를 사려는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들어서 감당 못할 수준에 이르렀고, 쌀을 구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염매소 앞에서 집단 항의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염매미를 다량 구입하여 소매상에 팔거나, 지주가 하인을 시켜 염매미를 사들이는 등 온갖 폐단이 발생했다. 또한 염매미 가격을 시중가격 보다 10전 낮은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원칙으로 인해 시중의 가격이 상승하면 염매미의 가격도 동시에 상승했다. 시중의 가격 상승이 염매미에 반영되기 때문에 염매미 판매로 시중 쌀의 가격 상승을 방어할 수 있는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오히려 시중과의 가격 차이로 인해 손해를 보았다는 미곡상의 불만이 불거졌다.

이에 경성부는 판매 방식의 개선을 구제회에 요청했고, 구제회는 빈민을 조사해서 염매미를 구입할 수 있는 쌀표를 지급하고, 쌀표를 지급받은 사람만 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은 개별적인 직접구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고, 쌀 가격을 조정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쌀 가격 폭동 이전인 1916년 6건, 1917년 8건 발생했던 동맹파업은 쌀 가격 폭등 현상이 발생한 1918년 50건으로 폭증했고, 참여한 노동자도 1916년 362명, 1917년 1128명에서 1918년 4442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그들은 쌀 가격이 폭증하는데 봉급은 여전히 박봉이고 장기간 노동에 시달린다며, 노동조건 개선 및 봉급 인상을 요구했다.

이 무렵,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를 주목했다. 윌슨은 1918년 1월 8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전후처리방침으로 '14개조'를 제시했는데, 그 중 5조는 민족자결주의를 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에서 주권과 같은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당사자인 주민들의 이해는 법적 권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정부의 정당한 청구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 이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기반 위에서 모든 식민지 문제는 자유롭고 열린 자세로,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조정해야 한다.

윌슨은 6조와 13조 까지의 항목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적용될 구체적인 대상 지역을 거론했다.

6조 러시아, 7조 벨기에, 8조 프랑스, 9조 이탈리아, 10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11조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발칸반도 국가들, 12조 오스만투르크 제국, 13조 폴란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은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이는 그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걸 도울 의사가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윌슨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내내 조선의 독립에 대해 어떠한 옹호 발언도 하지 않았고, 조선의 위임통치를 부탁하는 한인 지식인들의 요청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조선 지식인들은 정보가 부족하여 윌슨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을 해방시켜주리라 믿고 3·1 운동을 단행했다."는 인식이 파다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1918년 12월 26일 <신한민보> 논설 "평화회에 대한 결과를 예언"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 진행된 강화협상(빈회의)의 전례를 비춰보면, 승전국들의 노름 속에서 얼마 동안 평화가 유지될 뿐 전쟁이 종식되는 건 아니라며, '평화회의'라는 개념에 회의감을 표출했다.

<신한민보> 1918년 11월 28일자 논설 "대한민족의 시국 문제"에서도, 벨기에나 폴란드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이번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경우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도 있지만,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한국이 강화회의로부터 어떤 성과를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1919년 1월 23일자 <신한민보> 논설 "민족자결주의에 대하여"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자체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열강이 각국 인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제출한 선전용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파리 강화 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기회적 외교'를 시험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 사회의 반응도 비슷했다. 2·8 독립선언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서춘(徐椿)은 1918년 11월 22일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학우회 편집부 주최 현상연합웅변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번 전쟁에서 각국 모두 정의인도를 주장하지만 이는 표면의 언사일 뿐 만약 미국이 주의가 진실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이라면 무슨 이유로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는가. 영국에서는 진실로 정의 인도를 설파한다면 어째서 인도를 독립시키지 않는가. 모두 입으로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말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의도 인도도 없다. 개인 간에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대등이 주장할 수 있더라도, 나라와 단체에서는 실력이 없으면 어떤 이익도 향유할 수 없다. 요컨대 우리는 말보다 실력의 향상에 노력한 뒤에 정의 인도를 주창해야할 것이다.

서춘은 미국과 영국이 필리핀과 인도 등 자신들의 식민지를 먼저 해방시키지 않는 상황에 문제제기를 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그들이 말하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에 의문을 표시했다. 결국 독립을 쟁취할 실력 없이 는 정의 인도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제기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곧바로 조선의 독립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민족자결주의’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하는 입장은 재일유학생계 내부에서 2·8 독립선언을 결의한 1919년 1월 6일 웅변회 직전까지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3·1 운동을 촉발시킨 기미독립선언서를 준비했던 인사들도 이러한 고민을 품었다. 그들은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청원서에서는 우리슨을 미증유의 대경륜자, 대개혁자, 대건설자, 신의 사도, 정의의 투사 등으로 칭송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질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완전하고 투철한 민족자결주의의 관철’, 그것도 유럽 지역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전세계, 전인류에게 민족자결주의가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사로운 정, 인습, 국제적 고식으로 인해 유럽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지역에서 '민족자결주의'가 관철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직시했기에,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유럽에만 그치거나 승전국의 이익에 맞춰 취사선택하지 않기를 요구했다.

청원서는 윌슨이 조선을 해방시키는 데 힘을 쏟아야 하는 근거를 두 가지 제시했다. 첫째, '일본의 군국주의적 극동 먼로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배가 비인도적이고 불합리한 학정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일본으로 인하여 오천년 역사를 가진 조선이 세계문명에 공헌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일본이 독일과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침략주의, 압박주의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의와 인도의 신세계를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두번쨰, 일본의 식민 지배 영향은 단순히 세계의 변방인 '극동'에 그치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청원서에서는 조선을 '동양의 발칸'으로 비유하며,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발칸반도 문제였던 것과 같이 조선도 아시아에서 미래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기에 소민족의 정치적 권력 회복과 함께 조선도 독립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이렇듯 조선 지식인들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에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지했다. 그럼에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건, '세계 대전 후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고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조선인이 일제의 지배에 순응한다는 인식을 전 세계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일제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무단통치를 실시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이런 상황을 획기적으로 바꿀 대규모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개 과정[편집 | 원본 편집]

폭풍 전야[편집 | 원본 편집]

1918년 6~7월,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서병호(徐丙浩)·한진교(韓鎭敎)·조동호(趙東祜)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金淳愛)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9년 2월 조소앙(趙素昻)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呂準)·김좌진(金佐鎭)·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김교헌(金敎獻)·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1919년 3월 11일 발표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렇듯 미국, 상하이, 만주 등 해외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도 일본의 무단통치에 대한 반감과 쌀 가격 폭등으로 인한 생활고,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독립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66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고종은 사망 직전만 해도 아들 순종보다 건강한 편이었기에, 그의 사망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세간에서는 고종이 일제 관헌과 친일파 대신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아직 근왕 의식을 품고 있었던 백성들은 이 소문에 격분했다. 총독부는 매일신보를 통해 독살설이 거짓이라고 발표했지만, 소문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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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이 움직였다. 1919년 1월 조선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서춘(徐椿)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宋繼白)과 이광수(李光洙)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2·8 독립선언) 백관수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마자, 대회장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60여 명의 유학생을 체포했고, 주모자였던 최팔용, 백관수를 비롯한 학생 8명이 기소되었다. 이후 2월 12일과 28일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 행진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다.

2·8 독립선언 관계자 중 국내로 파견된 송계백은 모교인 보성학교의 은사이자 중앙학교 교사를 역임하던 현상윤을 찾아가 국내에서도 독립선언을 하자고 제안했다. 현상윤은 즉시 보성학교 최린 교장과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그들은 천도교 수장인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 시기 천도교 측은 몇년 전부터 민족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1912년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조직하여 겉으로는 종교 활동을 벌였지만, 비밀리에 농어민의 동향을 조사하여 민중운동이 발발했을 때 호응할 가능성을 살폈다. 1918년 8월경 일본 본토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면서 일제가 이를 수습하느라 정신 없는 걸 보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채택하여 9월 9일에 독립시위를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고 민중의 호응 여부가 불확실한 점 등 여러 문제가 있어서 무산되었다.

그러다 고종이 붕어하고 일제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전국 각지에 확산되자, 천도교 측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다만 천도교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는 타종교와 협력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불교 및 개신교 계열 인사들과 꾸준히 접촉하여 협조를 요청했다. 당초 개신교 측은 단독으로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을 하려 했지만, 오산교회 장로 이승훈이 천도교 인사 최남선 등의 설득을 받아들여 천도교와 합동하기로 하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이갑성, 함태영, 안세환 등이 종파를 초월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해 힘을 얻었다.

사실 2월 22일까지만 해도, 개신교 측은 독립선언이 아닌 독립'청원'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천도교 측에서 독립 청원이 아닌 독립 선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승훈, 함태영,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안세환, 현순, 오기선 등은 논의한 끝에 천도교의 요구대로 하기로 결정했다.[1]2월 24일,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최린의 집으로 가 독립청원과 독립선언을 함께 하는 방식을 취했다며 기독교 측의 결정사항을 전달했다. 최린은 크게 기뻐했으며, 향후 독립운동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협의를 했으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이들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같은 날 불교계 인사들인 한용운, 백용성이 가세하면서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기미독립선언서에 각자의 이름을 서명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고종의 국장이 거행되는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강기덕, 김원벽 등 학생대표들에게 학생 및 군중을 모아두라고 지시했다. 파고다공원은 경성부의 한복판에 있어 많은 사람이 들리는 곳이기에 대중을 동원하기에 적합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제 관헌에게 순순히 체포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2월 28일 밤 손병희에서 열린 민족대표들의 모임에서 계획이 돌연 변경되었다. 시간은 변경하지 않앗지만, 장소는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훗날 이들이 법정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선언문을 낭독한 뒤 경찰에 연행될 때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을 걸 우려해, 태화관에서 별도로 선언식을 가지기로 했다고 한다.

3월 1일 태화관과 파고다공원[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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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날인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였다.[2]이때 대표들이 태화관에 따로 모였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강기덕 등 학생 3명이 태화관으로 찾아가 항의했다.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하기로 해놓고 왜 이곳에 있는가. 이와 같이 학생들을 기만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파고다 공원에 가서 독립선언서는 다른 곳에서 발표하기로 되었다는 것을 말해달라. 어서 공원으로 가서 발표하라.

이에 손병희와 최린이 나서서 다수의 사람이 모인 곳에서 선언문을 발표할 수 없으며, 단지 선언서를 모든 사람에게 배부하면 그것이 곧 선언이 되니 굳이 공원에 갈 필요 없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는 결코 너희 학생과 함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그렇게 말하러 갈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이에 강기덕 등이 다시 항의했지만, 그들은 학생들이 알아서 하라며 태화관에서 내보냈다. 그후 한용운은 참석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조선독립선언을 하기에 이르러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래 계속해서 분려(奮勵)해야 한다.

이에 참석자들은 만세 삼창을 하였지만, 선언문 낭독은 생략하고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다. 이즈음 누군가 종로 경찰서에 인력거꾼을 시켜 선언문을 보냈고,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민족대표들은 순순히 체포되어 남산 왜성대로 압송되었다. 한편, 3월 1일 아침 국민대회 명의로 2천만 동포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서울 각지에 살포되었다.

미국대통령 윌슨씨가 13개조의 성명을 한 이래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소리는 일세(一世)를 혼동(欣動)하여 파란(波蘭 ; 폴란드)·애이란(愛爾蘭 ; 아일랜드)·서극(棲克 ; 체코) 등 12개국이 함께 독립을 하였다. 아한민족(我韓民族)인 자(者) 어찌 이 기회(機會)롤 놓칠 것인가. (중략) 금일(今日)은 세계(世界)가 개조(改造)되고 망국(亡國)이 부활(復活)하는 호기회(好機會)이다. 거국(擧國)이 일치견결(一致堅結)하여 궐기(蹶起)하면 이 망실(亡失)한 국권(國權)을 회복(回復)할 수 있고 이미 망(亡)한 민족(民族)을 구제(救濟)할 수 있다……궐기(蹶起)하라 아 이천만동포(我二千萬同胞)여!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png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 학생과 시민 2백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민족대표들이 나와서 독립선언서를 읽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민족대표들이 오지 않자 동요했다. 이때 누군가가 팔각정으로 뛰어들어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박수와 만세로 화답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현재까지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경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용(鄭在鎔)이 낭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일제 검찰이 재판부에 보낸 의견서에 '성명불상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기술한 것을 볼때, 경찰도 그가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3]

아무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마친 뒤, 군중은 선도자의 지시에 따라 동서로 나누어 시내 시위를 전개했다. 그 와중에 인천 거주 기독교 목사 동석기(董錫璣)가 미국 총영사관 앞에서 민족자결운동의 정황을 파리강화회의에 타전할 것을 의뢰하여, 미 총영사는 시내의 상황을 돌아보고 그 요지의 전보를 쳤다는 보고가 일제 관헌에 접수되기도 하였다. 이날 시위에 <조선독립신문>이 배포되었는데, 이 신문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부하고 취지를 보도하여 전국에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시위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배포한 것이었다.

시위대는 크게 3대로 나뉘어 시가지를 행진했으며, 서대문, 덕수궁 대한문 앞, 프랑스영사관, 미국영사관 앞, 창덕궁, 광화문 등을 주로 돌았다. 시위대는 미국과 프랑스 영사관에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전달하려 했다. 4시 이후 여러 시위대의 최종 집결한 곳은 남산 밑의 일본인들의 거리였던 혼마치거리(本町通)였다. 당시 시위대는 최종 목적지를 남산에 있는 조선총독부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는 행진하는 동안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 오후 4시경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에 총독부는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에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개가 출동, 혼마치거리에 진을 쳤다. 경찰도 이곳에 저지선을 펴고 시위대를 막았다.

혼마치 거리에 대규모 시위대가 밀어닥치자 일제 군경은 혼마치 2정목에 방어선을 치고. 기마대와 칼로써 시위대를 해산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시위대 가운데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군경은 시위대 안에서 열성적으로 만세를 부르는 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날 혼마치를 중심으로 서울 시내에서 체포된 군중만 134명이었다.

3월 5일 남대문역[편집 | 원본 편집]

조선총독부는 3월 2일 경성부의 전 헌병들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과 시위 참가자들을 체포하게 했다. 이후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이 거행될 때 일본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하였으나, 시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때 수사를 피해다니던 강기덕, 김원벽 등은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귀향하러 온 군중을 선동하여 제2차 시위를 벌였다. 총독부 경무총감부는 이날 집합한 학생 수를 4, 5천으로 계산했고, 조선군사령부는 1만 명으로 계산했다.

기독교 전도사 최흥종이 남대문역 앞에서 <신조선신문> 수십매를 배포하고, 대중에게 민족자결주의를 설명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 또한 고등보통학교 학생 최윤창(崔潤昌)은 이동규(李東奎)와 함께 입수한 <국민회보>와 동일한 이름으로 다음의 문서를 50매 인쇄하여 배포했다.

지금 강화회의에서 미국대통령이 12개조로 이루어진 민족독립(자결)주의를 성명하여 세계개조·망국광복의 기회이니 우리동포는 거국 일치하여 해외동포를 성원하라.

시위대는 선도자의 인솔 하에 남대문 방향으로 행진하면서, 누군가가 살포한 붉은 천을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했다. 경찰은 남대문 쪽에 저지선을 편 뒤 저지하려 했지만, 시위대는 저지선을 돌파하고 일대(一隊)는 남대문시장으로부터 조선은행 앞을 거쳐 종로 보신각 방면으로 향하였고, 다른 일대는 남대문에서 대한문앞, 무교정을 지나 종로 보신각에서 위의 일대와 합류하여 행진하였다. 이들은 행진하면서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은 남대문앞, 대한문앞, 종각, 조선은행 부근에서 시위자 다수를 검거하였다. 이날 검거자 가운데 재판에 회부된 이만 77명에 달하며, 그들은 대부분 학생이었다. 그 가운데 여학생은 6명이었다.

전국으로 확산된 3·1 운동[편집 | 원본 편집]

국내외 3.1 운동 시위 건수.png

3월 1일 경성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을 때, 평양, 의주, 선천군, 안주, 원산, 진남포에서 사전에 계획한 대로 독립선언서 낭독 및 만세시위가 거행되었다. 다음날인 3월 2일에 평안도, 함경도 등 이북 전역에 만세시위가 확산되었고, 3월 5일 남대문역에서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 만세시위를 벌이면서, 만세시위는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때 기미독립선언서와 별도로 여러 문서가 작성되어 배포되었다. 다음은 당시에 배포된 문서 목록이다.

1. 경기도

  •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 승려 이순재(李淳載)·김성암(金星岩), 약종상 김석노(金錫魯)는 33인의 선언서 발표를 듣고, 시위운동을 위한 준비로 문서를 작성하여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 것을 결정하고 있는 모양이니,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소요를 영속시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인쇄물을 작성, 200매를 인쇄하여 부근 동리에 배포하였다.
  • 양주군 별내면 유생 유해정(柳海正)은 선언서 발표 이래 각지 시위운동에 찬동하여 3월 하순 ‘일본황제전하(日本皇帝殿下)’라고 한 상주문을 작성하여 동경 궁내성(宮內省)에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강화(회의)위원은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하고, 일본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 여주군 학생 이원기(李元基)·원필희(元弼喜), 농업종사자 조경호(趙經鎬) 등은 군민이 독립운동에 냉담하여 서울 사람에게 개·돼지로 취급받는 것을 분개하여, 군내 각지에 경고하여 시위운동을 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경고문을 기초하였다.
  • 가평군의 이윤석(李胤錫 ; 교사)은 33인의 선언서를 제시하여 운동의 주도자들과 시위운동을 합의한 뒤, 군민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세계만국공회에서 민족자력주의의 원칙에 따라 속국은 이번 독립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 동리 주민에게 배부하거나 혹은 구두로 전달하여 3월 15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2. 경상도

  • 동래군 북면 범어사 승려 김영규(金永奎)는 3월 18·19일 범어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 김상기, 명정학교 김한기 등과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때 “한번 죽어서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내용의 유인물이 제작·배포되었다.
  • 경남 하동에서는 3월 18일 장날을 이용하여 박치화(朴致和)·정낙영(鄭洛榮)·정인영(鄭寅永) 등 12명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작성·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계평화(世界平和)의 회의(會議)가 창개(倉開)됨을 반(伴)하야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여론(與論)이 병기(幷起)하난 차호시운(此好時運)이 래(來)하얏도다. (중략) 시(時)가 래(來)하고 운(運)이 부(復)하얏네. 주차(蹰蹉)치 말며 관망(觀望)치 말고 우리의 사업(事業)을 우리의 심력(心力)으로 자결단행(自決斷行)합시다. (중략)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과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폭동(暴動)과 난거(亂擧)난 행(行)치 말고 인도(人道)와 정의(正義)로 독립문(獨立門)으로 전진(前進)합시다.

이는 민족자결주의 이념을 독립운동에 적용하되 외세의존적으로 관망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업은 우리의 심력으로 자결단행’하는 데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3. 전라도

  •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제중원(濟衆院) 회계(會許) 황상호(黄尙鎬)는 조선독립신문 1·2호를 입수하여, 이를 모방하여 자신의 필명인 황송우 사장 명의로 <조선독립신문>과 <광주신문>를 제작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성명한 13(14)조는 민족자결논의를 일세(一世)를 진동케 하고 폴란드 등 12개국을 독립케 하였노라”고 하고, 해외·국내 학생들의 운동을 소개하고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각각 300매씩 인쇄하여 광주 시내·시장·제중원내 민간인에게 배포하였다.
  • 4월 3일 남원군 덕과리 면장 이석기는 주민 800명을 집합시키고 자신이 작성한 경고아동포제군(警吿我同胞諸君)을 배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시(昔時)의 약자(弱者)는 현시(現時)의 강자(强者)이다. 몽고(蒙古)도 독립(獨立)을 선언(宣言)하고 파란(波蘭)도 민족자결(民族自決)을 주창(主唱)한다. 하물며 신성자손(神聖子孫) 아조선민족(我朝鮮民族)에 있어서랴 자(玆)에 우생(愚生)은 면장(面長)의 직(職)을 그만두고 만강진성(滿腔眞誠)을 다하여 조선독립(朝鮮獨立)을 고창(高唱)한다.

4. 기타: 지역 구분이 안 되는 경고문 건백서(建白書)

  • 조선민회일동(朝鮮民會一同)의 건백서(建白書)
이제 국제연맹(國際聯盟)이 만국재판(萬國裁判)을 하는 시(時)에 당하여 선민(鮮民)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중략) 차(此)는 즉 공화(共和)의 진체(眞體)이다. (중략) 선천시대(先天時代)는 요순(堯舜)이 시(是) 민주공화(民主共和)이다. 후천시대(後天時代)는 미국이 시(是) 민주공화(民主共和)이다. 금일(今曰)의 공화시대(共和時代)에 어찌 독립자치(獨立自治)하지 않으랴. 이제 공화시기(共和時機)에 당(當)하여 독립(獨立)의 선언(宣言)은 역일시기(亦一時機)이다 시운(時運)이다 시세(時勢)이다. 병합(併合)은 인욕(人慾)의 사(私)이고 독립(獨立)은 천리(天理)의 공(公)이다.
  • 의견서초(意見書抄)
독국(獨國)의 금일(今日)의 형세(形勢)를 간(看)하면 전감(前鑑)으로 하기에 족(足)하다. (중략) 국제회의(國際會議)는 민족자결(民族自決)로써 주의(主義)를 한다. 따라서 아민(我民)은 자결(自決)하여야 할 것이다.
  • 상서초(上書抄)
세계(世界)를 개조(改造)하는 금일(今日)에 당(當)하여 (중략) 우(又) 현금(現今) 구주회의(歐洲會議)의 민족평화자결(民族平和自決)을 통(通)하여 (중략) 오인(吾人)의 원유권(原有權)인 자유독립(自由獨立) 운운(云云)을 주창(主唱)하는 것도 무슨 대과(大過)있을 것인가
  • 익명서초(匿名書抄)
조선(朝鮮)의 독립(獨立)이란 문제(問題)도 피(彼) 윌슨씨(氏)가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표명(表明)한 고(故)로 이같이 된 것도 알고 있다. 지금(只今)의 세계열강(世界列强) 중에 자력(自力)없이 아민족(我民族)이 독립(獨立)하려고 소요(騷擾)하는 것은 나도 망동(妄動)으로 단언(斷言)하는 것이다. 나의 바라는 바는 전자(前者)를 원(願)하는 게 아니고 후자(後者)를 원(願)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自己)의 원(願)은 여하(如何)한 사람도 동대우하(同待遇下)에 자유권리(自由權利)를 가진 민족(民族)이 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 경고문초(警吿文抄)
민족자결(民族自決)과 독립자존심(獨立自尊心) 없는 민족(民族)은 금수(禽獸)와 같다. 조선인(朝鮮人)은 어찌 독립(獨立)을 원(願)하지 않으랴.
  • 민족대표부(民族大表部) 명의의 군수면장경고문(郡守面長警吿文)
세계대전(世界大戰)은 종국(終局)하고 강폭(强暴)한 군국주의(軍國主義)와 무력정치(武力政治)는 타파(打破)되고 인종(人種)은 평등(平等)과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세계적(世界的) 평화(平和)의 신국면으로 전개(展開)되었다. 이로 인(因)하여 강국(强國)의 기반하(羈絆下)에 신음(呻吟)하든 각종(各種) 민족(民族)은 모두 자유독립(自由獨立)의 광영(光榮)을 얻었다. (중략) 우리의 독립(獨立)과 자유(自由)를 빼앗은 자를 타(打)하고 박(縛)하고 살(殺)하여 견마(犬馬)와 같이 대우(待遇) 한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도시확산기에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돼 전국적 규모로 확산됐다. 이 과정에는 교사와 학생 등 지방 사회 지식인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선언서 등의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 농촌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됐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5월까지 전국적으로 1500여회 이상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소요사건 관계서류, 일본 외무성 기록, 도 장관 보고, 경성지법 검사국 문서, 3·1운동 관련 판결문, 재한 선교사 자료, 한일관계사료집 등 여러 자료에 기재된 3·1 운동 관련 사건은 1919년 3∼5월에 시위 1692건, 철시 25건, 파업 3건, 휴학·휴교 61건, 계획 350건, 기타 활동 333건 등 총 2464건에 달한다. 지역별 시위 건수는 서울·경기가 427건으로 최다였다. 이어 황해도 177건, 평안북도 148건, 경상남도 140건, 경상북도 118건, 충청남도 117건, 평안남도 112건 순이었다.[4]

일제 헌병 및 경찰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탄압이 확인되는 건수는 246건인데, 그중 발포(도검 및 방화 포함) 행위가 237건으로 96.3%에 이른다. 이는 헌병 및 경찰이 시위군중과 거리를 두고 발포를 가하는 방식으로 진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헌병․경찰이 시위군중과 뒤섞인 채로 진압에 임한 경우는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별로 보면 헌병에 의한 탄압이 150건으로 60.7%를 차지하였다. 경찰은 91건으로 36.8%를 차지하였다. 헌병과 경찰로 좁혀서 보면 241건 중 헌병이 62.2%, 경찰이 37.8%를 점하였다. 헌병과 경찰의 관서수 및 인원 비율은 헌병이 59.6%, 경찰이 40.4%이다.

제암리 학살.jpg

일제 헌병 및 경찰의 탄압 사례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제암리 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 1919년 3월 30일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발발한 시위 도중 헌병들이 검을 휘둘러 유학자 이정근과 제자 2명이 칼에 맞아 사망하자, 군중이 격분하여 일본인 주택과 학교에 불을 질렀다. 이에 일본 헌병과 경찰은 4월 2일 마을에 들이닥쳐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했다. 제암리 인근 화수리와 수촌리 주민들은 이에 분노하여 4월 3일 2차 만세시위를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와바타 도요타 순사가 군중에게 곤봉을 두들겨 맞다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일본 헌병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4월 13일 제암리에 들이닥쳐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뒤, 교회당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른 뒤, 탈출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민가 28채에 불이 옮겨붙어 모조리 소실되었고, 주민 19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당에서 탈출하다가 2명은 사망하고 1명은 산으로 피신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다음날 일부 군인들은 고주리로 가서 화성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홍렬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폭로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3·1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시위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은 3·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인원은 약 200여만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한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는 106만명이었고,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했으며, 1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해외에서 전개된 3·1 운동[편집 | 원본 편집]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3·1 운동은 해외 각 지방에 재류하는 조선인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3월 7일 기미독립선언서가 용정촌에 전해지자, 3월 13일 용정촌 천주교 교회당에서 정오에 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축하회(獨立祝賀會)가 개최되었다. 김영학(金永學)이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축하의 취지를 설명하자 등사판 인쇄물이 군중사이에 배포되었다. 이날 간도거유조선민족일동의 명의로 <독립선언포고문(獨立宣言布吿文)>이 선포되었다.

아(我) 조선민족(朝鮮民族)은 민족(民族)의 독립(獨立)을 선언(宣言)하노라. 민족(民族)의 자유(自由)를 선언(宣言)하노라. 민족(民族)의 정의(正義)를 선언(宣言)하노라. 민족(民族)의 인도(人道)를 선언(宣言)하노라. (중략) 세운(世運) 이 일변(一變)하고 인도(人道)가 갱신(更新)일새 정의(正義) 효종(曉鐘)은 대가(大街)에 진명(震鳴)하고, 자유(自由)의 자항(慈航)은 전진(前津)에 부래(浮來)하엿다. (중략) 오역(吾亦) 천민(天民)의 일(一)이오, 약자(弱者)의 일(一)이라. 금(今)에 천명(天命)을 승순(承順)하고, 인심(人心)을 합응(合應)하야 이천만중(二千萬衆)의 일구(一口)로 제출(齊出)하여 자유(自由) 청가(淸歌)를 창(唱)하며 쌍수(雙手)를 견악(堅握)하야 평등(平等)의 대도(大道)로 진(進)하는 바이로다.

이에 중국군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로 인해 17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당했다. 대표들은 이를 항의하기 위해 길림성장을 찾아가 발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했다. 뒤이어 혼춘에서도 3월 20일 독립만세집회가 개최되었다. 시위참여자는 구한국기를 손에 들고, 2열 종대의약 60명의 학생을 선두로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들고, 나팔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절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행진하였다. 시위 선도자 황병길(黄丙吉)은 “이번 강화회의는 의외로 한국독립의 기회를 주었다”고 하면서, 이때 일치단결하여 독립의 의지를 관철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외에도 연길, 화룡, 왕청 등 각처의 25개 조선인 마을에서 시위가 전개되어 4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서간도 지역에도 독립선언의 소식이 전해져서 3월 12일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삼원포에서 200여 명의 한인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 통화현에서도 한인 300여 명이 금두화락 교회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운동을 벌였다. 백두산 동쪽의 안도, 무송, 장백, 관전, 집안, 환인 등지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집안의 경우 3월 21일부터 4월 19일까지 16개 마을에서 5000여명이 참여했다.

연해주에서 전개된 3·1 운동은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와 ‘대한국민노인동맹단’ 같은 한인 단체가 주도했다. 특히 박은식, 김치보, 강우규, 윤여옥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의 연령 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을 모집했다. 노인 동맹단은 국내외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3·1 운동에 호응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이승만정한경에게 3·1 운동 소식을 전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영자 신문에도 현순의 전보 복사문을 전해 미국 사회에 알렸다. 상해에서 전보를 받은 당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3·1독립선언 소식을 전하고 만세를 열창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도 현순의 전보를 받고 한인교회에 한인 6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후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3월 9일 오후 7시 30분경 한인감리교회에서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개최하고, 3·1 운동 이후 국민회가 시급히 해야 할 안건을 선정하여 통과했다. 먼저 평화회의 파견 대표자로 선출된 이승만과 정한경이 여행권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서재필을 대신해서 파견하며, 만일 여행권 3장을 얻을 때는 세 사람을 파견한다. 다음으로 미국 각 교계 및 단체와 교섭하여 대한독립에 대한 지지와 동정을 얻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며 이러한 활동을 할 교섭위원은 윤병구(尹炳求), 정인과(鄭仁果) 두 명으로 선정한다. 또한 중앙총회로서 국기를 만들어 동포로 하여금 사두게 하였다가 행사가 있을 때 들고 나오게 한다.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총회장 이종관은 자신의 명의로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외교의 전권을 맡긴다고 하였다. 안창호는 서재필에게 전보를 보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한 것을 기회로 그가 한인사회에 나와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고, 북미 각지 및 멕시코 각 지방회에도 전보를 보내어 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하였다. 안창호는 3월 1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석상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수입의 20분의 1을 납부하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총회는 포고서를 선포하여 하와이·멕시코·미국 본토의 한인은 전체가 ‘독립의연(獨立義捐)’의 의무를 지고 3월에는 10불 이상, 4월부터는 매월, 매주 또는 매년 수입의 20분의 1을 내야 한다고 하였다.

3·1 운동 소식은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멕시코 한인사회에도 알려졌다. 신한민보의 보도를 보면 3월 29일자 ‘땀삐코 지방 동포의 열성’이라는 제목으로 이 지역동포들이 모여 경건한 마음으로 경축하며 앞으로의 독립 운동 방향을 협의하였다고 했다.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메리다에서는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 총회 훈시를 받아 4월 15일 오후 7시 반에 대한공화국의 건설과 신정부의 조직을 축하하는 경축식을 거행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프론테라 지방회에서도 <독립선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멕시코 각처의 교회에 발송했다.

1919년 3월 24일 이승만·정한경·서재필 3인의 이름으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할 것을 요청하고 미전역에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이들은 미국 국민에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대회의 영어식 이름을 1774년과 1775년에 필라델피아에 2차례 소집되어 미국의 독립을 논의했던 '대륙회의(The Continental Congress)'를 본 따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라고 명명했다. 필라델피아의 리틀 극장(Little Theater)에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Liberty Congress)가 개최되었다. 한인 120여 명이 참석하고 미국인 목사, 신부, 유대교 랍비, 대학총장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의 목적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려서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인들은 자유를 향한 한국 민족의 요청에 동정과 지지를 표시하였으며 폭군적인 일본의 동기와 행위들을 규탄하였다. 이들은 미국적인 민주주의, 자유, 기독교의가치를 칭송하며, 미국이 정의와 자유를 얻은 승리자로서 한국을 도울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필라델피아에 모인 한인대표들은 ‘미국에의 호소문’을 채택했다.

호소문은 국내에 있는 1천8백만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자임하였다. 호소문에서 ‘미국인들 역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기독교 사상과 인류애의 편에서 정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지와 동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기마대와 악단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여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조인된 독립관에 집결하였다. ‘대한공화국임시정부’ ‘국무경’의 자격으로 이승만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서명했던 헨콕이 앉았던 자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서 독립관장의 환영사를 들었으며, 영문으로 된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후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재정 지원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 제국의 대응[편집 | 원본 편집]

3·1 운동 소식을 접한 일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조선 통치에 대한 비판이 일본 언론을 장식했고, 제국체제의 재편이나 개조까지 거론되었다. 3·1 운동 직후 신임 조선 총독이 된 사이토 마코토는 경성일보 사장을 맡다가 1918년에 그만뒀던 기자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를 참모로 삼고,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을 조사하게 했다. 1920년 5월 시찰을 명목으로 조선에 방문한 아베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지방 유지들과 교류하고, 경성에 이른 뒤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인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때의 시찰 여행을 바탕으로 <아베 미쓰이에 의견>을 작성했다.

아베는 서두에서 일본인과 친근한 조선인을 위주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마음속에 쌓인 원한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3·1 운동의 원인을 다음 세 가지로 지적했다.

  • 미국의 민족자결주의 등장으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절하했다.
  • 한일병합 이래 총독정치에 대한 반감이 쌓였다.
  • 신교육의 결과 자유사상을 배운 청년층이 형성되었다.

아베는 이중에서도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먼저 청년층에 대한 지적은 ‘사회주의화’에 대한 경계심과 연결된다. 아베는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을 3·1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보았다. 이미 자유사상에 눈뜬 이들은 최근에 일어나는 사상계의 변화, 즉 사회주의에도 금방 감화될 것으로 우려했다. . 1차대전으로 각성된 혁신의 기운은 조선사회에 신구전환을 일으켰으며, 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이 구세력인 양반유생과 길항하게 되었다. 아베는 이를 사회주의화의 경향으로 보고 조선통치의 첫 번째 난관으로 지목했다.

한편 ‘총독정치에 대한 반감’ 또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신총독에 의해 문화정치가 표방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조선인은 여전히 그 실천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총독정치에 대한 반감이 깊은데, 아베는 그 원인이 하급관리를 비롯한 재조일본인들의 조악한 행실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의 문제를 지적한 아베는 향후 대책으로서 ‘통치방침의 확립’을 주장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오늘날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심수람(人心收攬) 외에 없다. 인심수람이라고 하면 매우 추상적이라 혹자는 구식이라고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법령을 시행할 때도 인심의 귀향(歸向)을 잘 살피고 그 질고(疾苦)를 자세히 알고 굉장히 이해심이 많은 동정을 가지고 임해야지만 인민은 당국자의 뜻을 양해하고 충심(衷心)으로 만족하고 복종하여 안도감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 정치의 상승(上乘)으로, 어찌 신구의 차별을 둘 필요가 있겠는가. 총독정치는 유래부터 이 점에 결함이 있었다. (중략) 인심수람은 모든 정치기관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휘발유과 같은 것이다. 만약 당국자가 하루 만에 마음을 여기에 잡고 완미(玩味)한다면, 그것이 지금 전도(全道)에 충만해 있는 총독정치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완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약재가 되지 않겠는가.

이후 사이토 마코토를 위시한 조선 총독부는 무단통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 뜨리기 위해 문화통치(文化統治)를 선포했다. 조선인 언론과 집회를 어느 정도 허용했으며, 헌병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개편했다. 또한 도, 부, 면에 자문기관 성격의 평의회나 협의회를 설치하고 이들 기관의 의원 일부를 선출직으로 정하면서 한국인들의 지방자치 참정권 보장을 천명했다.[5] 여기에 회사령이 폐지되고 일본과 한국간의 관세가 철폐되었다. 또, 3·1 운동을 촉발시킨 큰 원인 중 하나인 쌀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선포했다.

이러한 문화통치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많은 지식인이 이 시기에 친일파로 전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차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해서, 3·1 운동 이후에도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민족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중일전쟁 후 일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내선일체)을 단행해 8.15 광복 이전까지 추진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3·1 운동은 친일파 인사들에게도 큰 위기감을 안겼다. 이완용은 만세시위를 당장 중단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수 차례 발표했고, 박중양은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독립은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대중을 귀가시키기 위한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아 만세시위 진압에 적극 협조했다.
  •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3월 1일을 처음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6년 미군정 시기 군정법률 제2호를 통해 국가경축일로 지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년 후인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때 3·1절이 정식으로 도입되었다.
  • 중국에서는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서양과 일본의 경제 침탈과 군벌의 전횡에 대항한 5·4 운동이 발발했고, 자와할랄 네루는 딸 인디라 간디에게 3·1 운동에 참여한 한인들을 찬양하며, 이들을 본받길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영국과 일본 관계 변화

언론이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잔학 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당시 동맹국인 영국에 책임을 묻기 시작하자 영국 외무성 역시 조선 내 일제의 잔학 행위 문제를 들어 영일동맹의 가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 역시 자국 식민지에서 유사한 잔학 행위로 논란이 있음에도 불과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밀어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계도 있다


각주

  1. 다만 오기선 목사는 독립선언 방식에 끝까지 반대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을 거부했다.
  2.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빠졌다. 길선주는 황해도 장연군에서 설교를 마친 뒤 한양으로 돌아오는 게 늦어져서 오후 6시에야 경성역에 도착했고, 김병조는 평안북도 도내 여러 지방을 비밀리에 다니며 만세시위 전파와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유여대는 의주 읍내 서교회당 부근 공터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모아놓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으며, 정춘수는 원산에 가 있다가 3월 1일 늦은 오후에야 경성에 도착했다.
  3. [http://samil-100.kbs.co.kr/news/m/curious/curi3.html 1919.3.1.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서는 누가 읽었나? - KBS 뉴스]
  4. 도시→농촌→해외로 확산… 일부 지역선 무력시위도 - 백세운동
  5. 그러나 참정권을 가진 사람은 기업가, 지주, 일본인, 고위 공무원, 지식인 일부 등에 불과했으며, 이렇게 선출된 평의회, 협의회는 자문 정도나 할 수 있는 권한만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