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10.26 사태에서 넘어옴)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김재규의 법정 진술

10·26 사건 (十二六事件)은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경, 궁정동 안가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여 암살한 사건이다. 당시 동석했던 차지철 경호실장 역시 김재규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함에 따라 유신 독재체제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윤필용 사건에서 볼 수 있듯, 박정희는 2인자들에게 충성 경쟁을 유도하기 위하여 상호 견제 및 경쟁시키는 식으로 권좌를 유지했다. 이 사건이 발발하기 이전 권력구도는 크게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대통령 경호실로 나뉘었는데, 중앙정보부는 김재규가 국내외 정치권 및 경제계를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군내 상황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담당했으며, 경호실장 차지철 또한 박정희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면서 권력을 키웠다. 특히 국내외 상황을 두고 김재규와 차지철의 역할이 겹쳐지면서 둘 사이에는 치열한 권력 암투와 상호 견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같은 지역 출신에 고향 선후배 관계였고, 육군사관학교 동기라는 강력한 인맥으로 엮인 사이였다. 비록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후 박정희와의 인맥과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군내에서 고위직을 역임하였고, 특히 6·3 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면서 더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1973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4년에는 건설부장관을 역임하였고, 1976년부터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처럼 박정희와 인맥으로 얽힌 사이는 아니나,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곁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쿠데타 성공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전속부관과 최고회의 의장 경호실 차장을 역임했다. 1962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 후 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지속적으로 박정희 지근거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1972년 10월 유신이 공표된 이후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이 터지면서 경호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박종규의 뒤를 이어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경호실장에 임명된 이후 차지철은 안하무인 격으로 월권[1]을 행사하면서 주변의 원성이 높았지만, 박정희에겐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이면서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연회 이전[편집 | 원본 편집]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및 당진 KBS 송신소 준공식이 열렸다. KBS 송신소는 대북방송을 송출하는 시설로 중앙정보부의 중요한 보안시설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도 응당 송신소 준공식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행사 당일 오전 김재규는 대통령과 함께 이동하려고 준비를 하고 연락을 취했지만, 차지철은 김재규와 통화를 하면서 중앙정보부장이 자리를 비우면 어쩌라는 것이냐며 면박을 주고 행사 참석에 제동을 걸어버렸다. 이에 격분한 김재규는 아예 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이전부터 김재규와 차지철의 권력 암투가 심했으므로 이런 처사는 차지철이 김재규에 대한 견제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사건 발생 이전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업무처리가 미숙하다며 질책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김재규가 올리는 보고를 차지철이 중간에서 임의로 막거나 누락시키는 일[2]이 빈번했다.

연회 진행[편집 | 원본 편집]

방조제 및 송신소 준공식이 마무리된 후, 박정희는 서울로 복귀하였다. 당시 비서실장 김계원은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를 어떻게든 이어보고자 오후 4시경 귀경길에 오르던 박정희에게 연회를 건의했고 연회가 성사되자 김재규에게도 참석할 것을 통보했다. 장소는 청와대 인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였으며 오후 6시부터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에는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 외에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배석하였고, 박정희 곁에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 동석하였다.

안가 나동에서 시작된 연회에서 박정희는 부마사태 등 민중의 대규모 소요사태가 중앙정보부의 무능이라며 질책하였고, 야당인 신민당에 대해서도 김재규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질책하였다. 곁에 있던 차지철도 학생 시위나 노동차 파업 등 사회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중앙정보부의 책임론을 거들었고, "반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탱크로 깔아버려야 한다"라며 과격한 발언을 이어나갔다. 박정희 역시 4·19 혁명은 경찰 신분의 곽영주가 임의로 발포하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만, 지금이라면 발포권자가 국가 원수인 자신이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게 없다는 식으로 발언했다.

이런 분위기를 참다못한 김재규는 7시 10분경 연회장을 빠져나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및 중앙정보부 차장보 김정섭을 안가 별관에서 대기토록 양해를 구한 후, 2층 집무실에 들어가 미리 준비한 발터 PPK 권총를 서랍에서 꺼내 점검하면서 연회장으로 향했다. 김재규는 연회장 앞에서 잠시 바깥으로 나오던 차지철과 조우했으나 차지철은 별다른 의심없이 김재규를 지나쳐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주방 으로 향했다. 연회장 내부에서는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차지철이 용무를 보고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오자 김재규는 재차 연회장 바깥으로 나왔다.

연회장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7시 30분경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선호 자네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박 대령은 요원들과 함께 주방에 있는 경호원들을 처치해라. 이것은 혁명이다!
— 김재규가 연회장에 복귀하기 전 박선호와 박흥주에게 내린 지시

저격[편집 | 원본 편집]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자신의 심복들에게 세부적인 지시를 내린 후 7시 38분경 김재규가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왔을때,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김재규는 테이블 위의 술잔을 기울이다 돌연 박정희를 향해 "각하, 이따위 버러지(차지철을 의미)를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라며 일갈[3]했다. 그리고 차지철을 향해 "차지철, 너 이 자식 건방져!"라 외치며 품안에 숨겼던 발터 PPK를 꺼내 격발하였다. 황급히 팔을 들어 김재규의 총을 낚아채려던 차지철은 발사된 총탄에 오른팔 관통상을 당해 피를 흘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박정희는 "뭐하는 짓들이야!"라며 호통을 쳤지만 그 순간 김재규는 벌떡 일어서면서 박정희를 향해 두 번째 탄을 격발[4]했고, 총탄은 박정희의 오른쪽 흉부 상단으로 들어가 등 아래쪽 가운데에 관통상을 입혔다. 피격당한 박정희는 앞으로 고꾸라졌다가 신재순 쪽으로 기울었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쏜 직후 차지철을 향해 세 번째 탄을 발사하려 했으나 탄피가 걸려 격발이 이뤄지지 않았고, 순간 차지철은 부상당한 팔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황급히 피신했다.

한편, 연회장 바깥에서 김재규의 지시에 따라 무장을 갖추고 대기중이던 박흥주와 박선호는 연회장 내부에서 총성이 들리자 지시대로 행동하였다. 박흥주는 수행기사 등을 대동하여 주방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경호원들을 사살했으며, 박선호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사살했다. 박선호는 해병대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던 정인형을 겨누며 "우리 제발 같이 살자"고 외치며 저항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정인형 곁에 있던 안재송이 권총을 빼들며 대응하려 하자 어쩔 수 없이 둘을 사살했다고 한다.

안가 지하실에 있던 관리자는 총성을 전기 합선으로 착각하여 차단기를 내렸고 잠시동안 안가에는 전기가 끊기고 조명이 모두 꺼져 암흑으로 변했다. 이후 총성이 지속되자 다시 차단기를 올려 조명이 다시 돌아오는 일도 벌어졌다. 연회장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신재순과 심수봉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나는 괜찮다"고 희미하게 말했다. 연회장 바깥으로 나온 김재규는 바깥으로 피신한 김계원을 향해 "혁명이 끝났으니 보안을 잘 유지해달라"고 말했고, 연회장으로 다가온 박선호가 소지하고 있던 38구경 리볼버[5]로 총기를 교체한 후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화장실에 숨어있던 차지철은 경호원들을 호출하기 위하여 연회장을 빠져나오려다 김재규와 마주쳤다. 김재규를 본 차지철은 급한대로 손에 잡힌 문갑을 휘두르면서 김재규에게 대항했지만, 김재규는 차지철의 공격을 회피하면서 상반신을 향해 리볼버를 격발했다. 피격당한 차지철은 그대로 쓰러져 절명했고,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왔다.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던 신재순과 심수봉은 김재규를 보고 겁에 질려 피신했으며, 김재규는 쓰러진 박정희의 후두부를 향해 격발하여 확인사살을 실시했다.

저격 이후[편집 | 원본 편집]

한편 김재규의 당부로 연회장 별관에서 머물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는 갑작스러운 총성을 듣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3분여 만에 저격을 마친 김재규는 피묻은 셔츠 차림에 구두도 제대로 신지 못한 상태로 별관에 들이닥쳐 "큰일이 났다, 자세한 것은 차안에서 이야기 하자"며 정승화, 김정섭과 함께 전용차에 올라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들이 탄 전용차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향했다. 박선호의 지시를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와 경비원 김태원은 안가 내부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향해 확인사살을 실시하였고, 김재규에 피격당해 사망한 상태였던 차지철에게도 확인사살이 가해졌다.

김재규가 떠나자 현장에 남아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은 박정희를 국군수도지구 병원으로 이송하여 어떻게든 소생시키려 했지만 이미 과도한 출혈과 후두부에 입은 치명상으로 인해 너무 늦은 상태였다. 조사에 따르면 박정희는 병원에 이송되기도 전인 19시 50분경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김재규 체포[편집 | 원본 편집]

김재규에 이끌려 전용차에 동승한 정승화는 김재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물었고, 이에 김재규는 오른손 엄지를 세웠다가 아래로 뒤집는 동작을 취해 대통령의 유고를 암시했다. 당시 정승화는 당연히 청와대 내부에서 일이 벌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최측근인 차지철의 범행을 의심하였고,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김재규에게 내부소행인지 외부소행인지를 물었지만 김재규는 "대통령 유고다,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고 계엄령을 발동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김재규와 정승화 일행은 육군본부 지하벙커에 오후 8시경 도착하였다.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최규하 국무총리, 신현확 부총리 등 정부요인들을 소집할 것을 요청했고, 김계원과 최규하 외 법무부장관, 국방부장관, 각 군 참모총장 등 수뇌부들이 모이면서 회의장소가 좁아지자, 오후 11시경 장소를 국방부 회의실로 변경하였다. 박정희 유고 사실을 전달받은 최규하 총리는 김재규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김재규는 시간을 지체하다 북한이 이 사실을 알면 큰 변란이 발생할 수 있으니 비상계엄을 속히 선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하였다.

상황을 타파하기 위하여 김계원은 최규하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위한 임시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했고, 최규하가 이에 응해 국무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 신현확 부총리 등 국무위원 일부가 비상계엄 선포 이유를 정확히 밝히라 요구했고, 신속한 계엄령 선포로 뜻을 이루고자 했던 김재규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위기감을 느낀 김계원은 노재현 국방부장관 및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따로 불러내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실토했다.

진상을 파악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령하였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 김재규가 체포되었다. 이어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사건의 진상파악을 지시했으며, 김재규의 신병을 넘겨받은 보안사는 서빙고 분실로 김재규를 연행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며 신문을 실시했다.

재판 및 처벌[편집 | 원본 편집]

  • 1979년
    • 11월 26일
      육군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김재규, 김계원, 박흥주, 박선호, 이기주, 김태원, 유성옥, 유석술 등 8명에 대하여 내란목적살인 및 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기소하였다.
    • 12월 18일
      육군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김재규 등 7명에 대하여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유석술에게는 증거인멸죄를 적용하여 징역 5년을 구형하였다.
    • 12월 20일
      육군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 선고공판에서 김재규 등 7명에게 사형 및 유석술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김재규 등 7명은 항소하였고, 박흥주는 재심을 청구하였다.
  • 1980년
    • 1월 22일
      검찰부는 항소심 첫 공판에서 김계원에 대하여 내란목적살인에서 단순살인으로 공소장을 변경하였다.
    • 1월 28일
      육군 계엄고등군법회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김재규 등 6명에게 사형 및 유석술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김계원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선고되었다. 피고인 전원 상고하였다.
    • 3월 6일
      현역 군인 신분이었던 박흥주 육군 대령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6]
    • 4월 8일
      사건이 대법원 형사 3부에 배당되었다.
    • 4월 10일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이관되었다.
    • 4월 2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합의가 종결되었다.
    • 5월 20일
      대법원 선고에서 피고들의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김재규,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사형, 김계원 무기징역, 유석술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7]
    •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김재규,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 5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사건에 대한 시각[편집 | 원본 편집]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가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로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적화 방지입니다. 네 번째가 혈맹인 우방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입니다.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혈맹의 우방으로서의 관계를 회복해서, 돈독한 서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도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위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적은 10월 26일 혁명 결행 성공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해결이 보장이 됐습니다.
— 김재규 법정 최후진술[8]

김재규의 법정 최후진술 내용을 살펴보면 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 고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체계가 출범하는 것을 보면서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고, 이 때문에 야당인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 차원의 공작이 신통치 않았고, 부마항쟁같은 반정부 민중소요에 대해서도 강경진압을 주저하는 등 그러한 성향이 표출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10월 26일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서 그 행동 자체가 계획적인가, 우발적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계획적 행동이라는 시각[편집 | 원본 편집]

김재규를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는 그의 행동이 계획적인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김재규의 항소이유서를 봐도 우발적인 행동을 한 사람 치고는 논리가 매우 정연했고, 변호를 위해 접견할 당시 10·26 이전에도 대통령 시해를 서너차례 준비했었지만 결행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김재규를 직접 수사했던 이학봉 당시 합수부 수사국장 및 그의 보고를 들은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그리고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김재규가 시해 이후 짜여진 각본에 따라 행동하려 했으므로 철저히 준비한 계획적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조사 당시 김재규는 이학봉에게 대통령 시해 후 구체적인 3단계 혁명계획을 털어놨는데, 부마항쟁 소요 확산으로 민심이 떠난 대통령을 제거하고 혁명 성공을 위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사건에 끌어들이는 것(계엄령 발동시 계엄사령관이 되는 직위)이 1단계, 정 총장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서울에 진주시키는 동시에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국가통치 기능과 권력을 장악하는 2단계, 혁명 선포 후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의장 자리에 본인이 앉는 다는 것이 최종적인 3단계 전략이라는 것. 다만 이 계획은 보안사의 강압적인 수사 분위기 및 김재규가 재판정에서 한 최후진술에서는 자신의 권력장악 욕구가 없음을 피력했기 때문에 보안사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점도 존재한다.

우발적 행동이라는 시각[편집 | 원본 편집]

사건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 비서실장은 법정 진술을 통해 우발적 행동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김재규의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고려할 때 당일 사건은 박정희와 차지철이 중앙정보부의 무능함을 질책하는 과정에서 순간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한 김재규의 돌발 행동이라는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 지부장을 지낸 도널드 그레이 전 주한대사 역시 2011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건 당일 연회장에 참석할 당시만 하더라도 김재규는 살의를 품은 상태가 아니었지만, 연회 도중 차지철의 힐난에 격분하여 벌인 우발적 행동이라 규정했다.

또한 계획적으로 행동을 했다고 보기에는 후속 조치가 너무나도 어설펐던 점도 우발적 행동이라는 시각을 뒷받침한다. 일을 치르고 황급히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자신의 전용차에 태우고도 본진인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향하는 결정을 했다는 점[9] 그리고 비상국무회의 자리에서 치밀한 후속조치를 전혀 하지못하고 단순히 비상계엄 발동만 반복적으로 주장하여 관료들의 의심을 샀던 점[10] 등은 계획적이라고 보기엔 상당히 어설프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편집 | 원본 편집]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 독재는 종말을 맞이했지만, 김재규가 그토록 바랬던 자유민주주의를 되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절대 권력자인 박정희가 사라진 상황에 2인자로 여겨졌던 인물들 중 경호실장 차지철도 사망했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보안사에 연행되어 사실상 처형당할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역시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권력자인 국군보안사령부 전두환은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면서 권력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치밀한 준비 끝에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신군부에 의한 독재 정권이 뒤를 잇는 결말로 귀결되었다.

관련 작품[편집 | 원본 편집]

  • 2005년 개봉한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이다. 블랙코미디 성격을 부여하여 인물들의 행동이나 표현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고,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측이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하면서 법적인 다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1]
  • MBC 정치드라마 시리즈인 제4공화국제5공화국에서 비중있게 다뤄졌다.
  • 2020년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은 이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강한 좌파 성향 커뮤니티에서는 박정희가 살해당한 10월 26일을 탕탕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안중근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짜도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 사건이 발생한 궁정동 안가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기에도 유지되고 있었으나,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그의 지시로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는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개방되고 있다.[12]

각주

  1. 차지철 그 자신은 중령으로 전역하였지만 경호실장의 위세를 악용하여 육사 선배기수 및 자신보다 한참 높은 장성급을 지낸 인사들에 대해서도 함부러 대하였다.
  2.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를 위해 들어가려 하면 각하의 몸이 편찮으시니 다음에 오라는 식으로 둘러대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설 정보조직을 활용하여 국내외 정세를 박정희에게 보고하면서 중앙정보부가 무능하다는 식으로 견제했다.
  3. 증언에 따라서는 그 유명한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일갈했다고도 한다.
  4. 증언에 따라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향해 "야, 너도 한 번 죽어봐!"라 외치면서 총을 발사했다고 한다.
  5. 정확한 모델명은 스미스 앤 웨슨 M36 치프 스페셜
  6. 박흥주는 1심 후 재심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단심 판결 후 처형되었기 때문에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고, 재판이 진행중인 와중에 사형이 집행된 전례가 없었기에 논란이 남아있다.
  7. 대법원 80도306
  8. [1]
  9. 대통령 유고 사실이 최초로 정부 고위급 인사들에게 알려졌을 때 대다수 관료들이 차지철이 결국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만큼 당시 차지철의 월권 및 전횡이 심각했음을 고려하면, 당시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 수장으로서 충분히 차지철의 범행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 현장 목격자들의 입막음은 중앙정보부의 능력이면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10. 이 자리에서라도 차지철의 범행이라 주장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다. 김재규의 미심쩍은 행동때문에 결국 김계원이 불안감을 느끼고 사건의 진범이 김재규라는 사실을 실토했기 때문이다.
  11. '그때 그 사람들' 상영금지소송 '조정' 판결...보상금 반환, 자막 수정 합의, 이데일리, 2008년 2월 27일
  12. 궁정동 안가터 시민공원으로...내달부터 일반에 공개, 한국경제, 1993년 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