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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의 역할?===
===약탈의 역할?===
흉노의 경제에서 약탈이 어떤 역할을 차지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기본적인 견해는 약탈은 직접적으로 물자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견해들도 많다. 우선, 약탈은 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흉노의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한고조의 굴욕적 패배 이후, 한은 흉노와의 전면전을 꺼렸다. 이때 흉노는 약탈을 통해 한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화친 조약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정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약탈은 약탈을 통한 물자 확보보다는 한과 지속적으로 교섭하고, 협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약탈의 진짜 목적은 물자 확보보다는 인력 확보가 목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약탈과 함께 납치도 항상 같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납치한 사람들은 흉노 영역권 내로 옮겨져 모여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흉노의 영역권 내에서 중국식 거주 시설의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ref>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ref> 유목 제국 안의 정주민들은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했을 것이며, 제국은 이들을 통해 모자라는 생산성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목 제국들의 정주 지대 약탈은 물자 자체보다 물자를 생산할 능력을 갖춘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는 주장이다.
흉노의 경제에서 약탈이 어떤 역할을 차지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기본적인 견해는 약탈은 직접적으로 물자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견해들도 많다. 우선, 약탈은 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흉노의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한고조의 굴욕적 패배 이후, 한은 흉노와의 전면전을 꺼렸다. 이때 흉노는 약탈을 통해 한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화친 조약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정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약탈은 약탈을 통한 물자 확보보다는 한과 지속적으로 교섭하고, 협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약탈의 진짜 목적은 물자 확보보다는 인력 확보가 목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약탈과 함께 납치도 항상 같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납치한 사람들은 흉노 영역권 내로 옮겨져 모여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흉노의 영역권 내에서 중국식 거주 시설의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ref>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ref> 유목 제국 안의 정주민들은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했을 것이며, 제국은 이들을 통해 모자라는 생산성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목 제국들의 정주 지대 약탈은 물자 자체보다 물자를 생산할 능력을 갖춘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는 주장이다.
==문화==
이 항목에서는 흉노의 물질 문화, 즉 유물과 유적에 대해서 서술한다.


== 기타 ==
== 기타 ==

2015년 5월 10일 (일) 15:02 판

틀:학술 관련 정보

기원전 250년경 흉노 세력 판도.

匈奴

최초의 유목제국.

개요

흉노는 몽골 초원에서 탄생한 최초의 유목 제국이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각 제후국들과 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 흉노라는 집단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집단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훈족과 동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설에 불과할 뿐, 증명된 바는 없다.일 설에 의하면 흉노>훈>고트>게르만이라는 설도 있다.

역사

첫 등장

흉노가 어떻게 나타난 집단인지, 언제 나타난 집단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은주시대에도 "혼유(渾庾)", "훈죽(獯粥)", "험윤(獫狁)"이라는 명칭이 문헌상에 등장하는데, 이들의 흉노의 조상이라는 주장도 있다.[1] 유목 집단이 확실하게 중국 북방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초 사이로 보인다. 바로 "호(胡)"의 등장이다. 당시 각 제후국들은 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쌓고, 스스로 기병을 키우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한편 흉노가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318년이다. 당시 흉노는 한, 조, 위, 연, 제 다섯 제후국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진 통일기 무렵, 흉노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에 몽염에게 10만명, 혹은 30만명의 군사를 주어 흉노를 하남, 즉 황하 이남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몰아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2] 이후 진은 만리장성을 완성하여 이들의 남하를 막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흉노는 북방으로 밀려나며 큰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군사적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으니...

묵특(묵돌)의 등장

묵특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묵특은 두만(頭曼) 선우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만은 묵특보다 그의 애첩의 소생, 그러니까 묵특의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한편으로는 월지가 힘 좀 세다고 짜증나게 구는 걸 좀 정리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월지가 인질을 요구하자 그는 아들 묵특을 월지에 볼모로 보낸다. 월지는 볼모를 죽이려고 할 것이니, 보기 싫은 큰아들도 죽이고, 월지를 손봐줄 명분도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만의 예상대로 계획대로 월지는 묵특이 도착하자마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묵특은 천리마를 훔쳐타고 흉노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다. 두만의 모든 계획을 비틀어버렸지만 이 일로 아버지의 신뢰를 얻어 만여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된다. 그러나 묵특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심복들을 뽑아 기마궁술을 연마케 하는 한편, 자신이 명적, 즉 소리나는 화살으로 무엇인가를 쏘면, 일제히 그 목표물을 향해 활을 쏘도록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짐승을 쏘면서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묵특이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부하들은 당연히 머뭇거렸고, 묵특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며 머뭇거린 부하들을 죄다 참수해버린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연지, 즉 부인을 향해 명적을 날린다. 이번에도 머뭇거린 부하들이 있자 그들도 참수했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 묵특은 마침내 사냥터에서 아버지를 향해 명적을 쏜다. 그의 부하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다. 두만은 벌집이 되어 사망하였다. 그는 계모와 이복동생을 차례로 죽이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묵특은 오르도스 상실 이후 위축되었던 흉노의 세를 무서운 속도로 불려나가기 시작한다.

초원을 재패하다

장성 이남은 진나라가 멸망하고 초한쟁패기가 한창일 무렵, 묵특은 초원의 각 집단을 하나하나 꺾어나간다. 먼저 동부 흥안령 일대의 동호(東胡)를 급습해 복속케 하였다. 그 다음 타깃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월지였다. 감숙 지방의 월지는 묵특에게 밀려나 서방으로 이주한다. 누번과 백양을 수복하여 하남 지방을 되찾는 한편, 북쪽 바이칼 호 방면으로는 굴사(屈射), 정령(丁霊), 격곤(鬲昆), 신려(薪犂)를 차례로 복속시켰다. 이로서 동부 중앙유라시아 일대를 흉노의 지배 하에 두었다.

한군을 격파하다

항우초나라를 꺾고 다시금 중원에 통일 제국을 세운 유방은 윗동네에서 무섭게 커가는 흉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세력이 확 커지더니 장성을 넘어와 약탈을 자주 자행하고,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을 계속 납치해가니 한고조로서는 언젠가는 정벌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한고조는 한왕(韓王) 신(信)을 대(代) 땅에 파견하여 흉노를 견제하려 했다. (바짓가랑이 기어가기의 굴욕으로 유명한 그 한신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러나 신이 보기에 흉노와의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신은 화친을 시도했으나, 고조는 이를 배신 행위로 간주하고 신을 크게 책망한다. 그러지 신은 삐져서 흉노로 투항해버린다!. 신의 투항으로 생긴 힘의 공백 속으로 흉노의 4만 대군이 파고들었다. 한고조는 분개하며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친히 30만의 군대를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처음에는 좋았지 한의 대군은 먼저 신의 군대와 만나 개발살을 내고 흉노를 향해 북상한다. 흉노의 군대는 노인과 병든 말로 구성되어 있었고, 퇴각을 계속하는 듯 보였다. 고조는 아예 병력의 일부만을 직접 데리고 흉노를 추격했다. 이윽고 한군은 백등산에 다다른다. 이때 흉노는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하며 고조의 소규모 부대를 그대로 포위한다. 일부러 고조 앞에 약군을 미끼로 던져 그를 백등산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한겨울 산중에 고립된 고조의 신세는 정말 비참했다. 30만에 달하는 본대와 연락할 방법만 있다면 이깟 포위야 얼마든지 부숴버릴 수 있으련만, 흉노는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고조의 부대로서는 보급도 끊기고, 연락도 끊기는 최악의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일주일 동안 고립된 끝에, 한고조는 진평의 건의에 따라 묵툭의 아내(연지)에게 모피 코트를 보냈다. 뇌물먹은 아내의 간청에 따라 묵특은 포위망 한쪽을 풀어주었고, 한고조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백등산 포위전 참조.

화친 조약

어쨌거나 전쟁의 결과는 한의 완벽한 패전이었다. 한과 흉노 사이의 화친 조약은 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적인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 한과 흉노는 형제의 의를 맺는다.
  •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낸다.
  • 한은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비단을 보낸다.

이 조약은 무제까지 한과 흉노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초가 된다.

여기에서 유목 국가의 중요한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흉노에게 농경국가와의 전쟁은 물자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흉노로서는 중국을 정복하고 다스릴 생각도, 능력도, 인구도 없었다. 그러나 유목의 생산성은 낮은 편이었으며, 기껏 장악해놓은 육상 교역로에서 팔만큼 좋은 질의 물건을 확보하는 것이 힘들었다. 흉노로서는 한의 물자를 어떻게든 끌어내야 했던 것이다. 매년 많은 양의 옷감과 비단을 받는 것은 물론, 공주를 취하는 것도 바로 물자를 얻기 위해서였다.[3] 물론 한에서 진짜 공주를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가짜 공주를 보냈으나, 흉노에게는 그 공주가 진짜 공주인지 여부보다 공주가 가지고 오는 지참금, 그리고 공주의 생활비 명목으로 매년 한에게서 받아낼 수 있는 막대한 물자가 중요했다.

이 목적을 더욱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흉노는 후에 화친 조약에 한 조항을 추가한다.

  • 국경지대에 관시(関市)를 설치하여 교역한다.

이는 더욱 효율적으로 한의 물자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다. 관시에서는 흉노의 말과 한의 다양한 물자들이 교환되었다. 그런데 흉노는 "미래에 줄 말" 값까지 쳐줄 것 영원히 안 치를 외상값을 한에게 요구하였고, 한은 이와 같은 억지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후에 한이 울컥해서 당장 가져온 말 값만 쳐주겠다고 선언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 될 정도.

한의 입장에서는 이 화친조약은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으나, 고조가 유언으로 "흉노와 전쟁하지 말 것"을 남길 정도로 백등산에서의 패배로 인한 트라우마가 컸기에 흉노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뭐 흉노가 기마전술로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고. 한의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여태후에게 묵특이 보내온 농서, 즉 희롱하는 서신이다. 대략 "너네 나라에는 왕이 없고 우리 나라에는 왕비가 없으니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것을 취하는 게 어떻겠는가?" 라는 내용이다. 이게 천년쯤 뒤 유럽에서는 자주 있는 관습이었는데, 시대를 잘못 타서 성희롱이 된 것인가 원수지간에 시전해서 성희롱이 된 것인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태후의 반응이다. 여태후라는 여자는 매우 포악하고 사나운 성질을 가진 여자였다. 한 황실의 최고 어른인 자신을 한낱 오랑캐 따위가 조롱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여태후는 매우 분개하며 흉노 토벌을 명하고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중신들이 이를 만류한다. 특히 계포는 10만 대군으로 흉노를 치자고 주장한 여후의 매제 번쾌를 두고 대놓고 "저 새퀴의 목을 쳐야 합니다. 고조 폐하의 용맹함과 경험, 지혜를 가지고서도 흉노에게 대패했는데, 어찌 번쾌 따위가 지금 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일갈하는 용자포스를 보여주었다. 결국 여태후는 울며 겨자먹기로 흉노 정벌을 취소하고, 답신을 보낸다. 내용은 대략 "하늘이 내린 선우께서 저를 부르시니, 응해야 마땅하겠으나, 저는 이미 늙어 기력이 쇠하고 머리와 이도 빠져버렸습니다. 다만 선우께서 즐길 수 있도록 황제의 수레 두 대를 보내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한이 흉노에 대해 가지는 공포심은 강렬했던 것이다.

무제의 강경책

한나라의 국력은 착실하게 성장해 나갔다. 한무제시기에 이르러 한은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한다. 정예 기병을 정성들여 양성하고,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여 월지와의 동맹을 꾀하는 등, 무제는 대흉노전 준비를 착착 해나간다. 기원전 133년, 무제는 흉노에 대한 전쟁을 개시한다. 원래 흉노의 선우를 마읍으로 유인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기밀유지에 실패하여 작전 실패.

이로서 흉노와 한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무제에게는 젊고 패기 넘치는 위청곽거병, '비장(飛將)' 이광 등 특출한 장수들이 있었다. 기원전 129년, 전쟁 시작부터 이들은 엄청난 활약을 보였고, 한은 하남지역(오르도스)를 수복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로서 흉노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를 다시 한의 지배 하에 두고, 군현을 설치한다. 나아가 121년 이후에는 몽골 고원 북부까지 쫓아가 흉노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하서 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당시 전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청곽거병 항목 참조.

기원전 119년 이후, 한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하서회랑 각 도시국가들을 정복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직접지배권 하에 두었다. 104과 102년에는 이광리의 주도로 대완(우즈베키스탄) 원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대흉노 전쟁은 한에게 매우 큰 물적, 인적 자원 소모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원전 89년, 전쟁의 끝을 선포하는 "윤대의 조"가 발표되었다.

한나라로서는 대흉노 전쟁을 통해 흉노를 완전히 복속시키겠다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흉노의 위협을 일시적으로나마 정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하서회랑이 한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며 흔히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육상 교통로가 안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흉노로서는 오르도스라는 매력적인 근거지와 실크로드라는 교역로에 대한 장악력, 한의 물자 지원 등을 상실했다. 이로 인한 불안 속에서 흉노의 1차 분열이 싹튼다.

1차 분열

기원전 1세기 중반무렵, 흉노의 1차 분열이 시작된다. 이는 유목 국가들의 뿌리깊은 문제이기도 한데, 유목 국가의 후계 과정은 큰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정치 제도가 발전한 정주민 국가에서는 보통 뚜렷한 왕위세습 원칙(장자상속과 같은)에 따라 왕위가 상속된다. 이는 관료제 등의 발달로 왕이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어느 정도 국가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목국가에서는 국가의 운영이 거의 전적으로 왕의 역량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선대 군주의 후손이나 형제 가운데 능력이 있는 사람 혹은 여론의 지지를 얻는 사람이 즉위하는 일이 많다. 바꿔 말하면, 여론이 모이지 않는다면 바로 국가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기원전 60년경 흉노의 상황이 이러하였다.

악연구제 선우가 즉위 후 2년만에 죽자 흉노는 사분오열되었다. 당시 수많은 선우들이 난립하였는데, 이름이 남아 있는 선우만 일곱 명(...). 이 중 친형제간이었던 질지(형)와 호한야(동생)가 가장 강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흉노의 대분열을 틈타 한에서는 서역 도시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고, 아예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여 서역을 직접지배권 하에 두었다. 이때 군관을 파견하는 한편, 이 지역의 풍속과 사회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진다. 호구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지역의 정치 체계, 중국에서의 거리, 지리적 위치, 접근성, 산물 등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조사의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중앙아시아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호한야의 통합

호한야와 질지의 세력이 팽팽히 겨루고 있던 중, 호한야가 신의 한 수를 둔다. 기원전 48년, 한에 입조한 것. 한 마디로 "한에 순종할 테니, 흉노 전체의 선우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세요"라는 거래를 한 것이다. 한은 흉노의 선우가 스스로 신하를 자처하니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흉노선우새"라는 도장을 내린다. 특히 주목할 것은 도장의 명칭이 "새"라는 것인데, 이는 원래 황제의 도장, 즉 옥새에만 붙을 수 있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황제 아래의 제후나 왕의 도장은 "인"이라고 불린다. 한은 흉노의 선우를 특별대우하여 제후나 왕보다는 위, 황제보다는 아래에 있는 위치에 둔 것이다.

여튼 한의 물자를 바탕으로 호한야는 흉노를 다시금 통합할 수 있었다. 호한야는 흉노를 어느 정도 통일한 후에도 BC 33년 재입조해 대대적인 물자 지원을 얻어갔다. 한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될 정도. 왕소군의 이야기도 호한야 선우의 시절에 나온 것이다.

호한야의 통합 이후 약 100년 동안 흉노는 안정기에 들어선다.

2차 분열

그러나 기원후 1세기 중반 2차 분열기가 찾아온다. 이번에도 계승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주요 원인. 1차 분열 때 질지의 서흉노와 호한야의 동흉노가 갈등했다면 이번에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나뉜다. 남흉노는 한에 입조하였고, 서서히 중국화되어간다. 포노 선우가 이끄는 북흉노는 북몽골초원에서 한에 대항했다. 이 분열기 이후 흉노는 초원에서 그 중심적인 지위를 잃어버린다. 흉노가 초원에서 몰락하면서, 기원전 1세기경 처음 나타났던 선비가 강성해졌다. 선비(유목제국) 항목 참조.

기원후 79년에는 반고가, 89년에는 두고가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감행하여 흉노를 대파했다. 91년에는 금미산에서 북흉노를 대파했는데, 이후 흉노는 북흉노는 서진하여 일리강 유역에 분포하게 되었다. 2세기 전반기까지 흉노는 일부 서역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현대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2세기 중반, 흉노는 다시 서진하여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이탈한다. 흑해 근방의 초원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유럽에서 족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5호16국 시대, 그리고 소멸

남흉노는 그 이후 내몽골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선비와 함께 용병으로 중원을 뛰어다니는 일도 잦았다. 흉노가 마지막으로 활약한 시대는 5호16국시대였다. 전조(당시 한)를 개창한 것이 바로 유연으로, 유연의 집안은 후한에게서 유씨 성을 하사받아 사용하는 흉노 집단이었다. 유연의 전조 개창은 중원을 지배하는 유목민족의 왕조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흉노라는 이름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역시 5호16국시대, 흉노 혁련발발이 산시성 지역에서 하(夏)를 건국했다는 기사이다. 하의 멸망 이후 흉노라는 이름은 중국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초원에 남았던 흉노 집단은 선비, 유연 등, 후대의 유목제국들 안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원으로 유입된 흉노는 5호16국시대와 시기를 거치며 중국 사회 안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흉노의 지배층이 문화적/혈통적으로 동호계, 퉁구스계, 튀르크계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정확히 결론난 바 없다. 몽골 초원에서 발견된 유골과 기록상 흉노의 외양 등을 바탕으로 흉노의 지배 집단은 유럽계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 역시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기록을 통하여 본다면 흉노의 외모를 백인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는 기록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며, 고분에서 발견된 유골들에 대해 실시된 유전자 검사의 결과에 의하면 전체 유골의 약 11%가 "유럽계"로 나온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흉노 이전에 이미 중앙유라시아 전역의 유목, 수렵 집단들 간에 인적, 문화젹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며, 흉노는 그 과정에서 출현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유의하여야 할 사실은, 흉노는 절대 민족이나 혈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흉노가 강성해져 초원 전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동안에는 초원의 다양한 부족집단들이 스스로를 "흉노"라고 스스로를 지칭했을 것이다.(혹은 흉노 제국 내에서 쓰이던 명칭으로) 흉노라는 집단에 대한 정확한 시각은 어디까지나 "흉노 제국"이지, 흉노"족"이 아니다.

물론 환빠라면 그딴거 다 무시하고 흉노 선비 몽골 다 한민족의 일파일 뿐이다! 한민족의 역사는 세계 제이이이이이일! 을 외치겠지.

흉노의 언어 역시 아직은 미스터리할 뿐이다. 몽골계통설, 투르크계통설, 퉁그스계통설과 몽골과 퉁구스계통이 섞인 언어라는 설 등, 설만 무성하다. 노인울라 16호 고분을 비롯한 흉노 유적지에서 발굴된 출토품에 흉노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아직 흉노 문자는 해독되지 않았다.

사회

흉노의 대군주는 선우(單于)라고 불렸다. 선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선우(유목군주) 항목 참조. 선우는 연제(戀鞮) 씨족에서 배출되었으며, 전통적으로 호연, 란, 수복 등의 씨족에서 연지, 즉 아내를 맞아들였다. 후한 대에는 구림씨족이 추가된다. 이들 인척씨족의 수령들은 "골도후(骨都侯)라고 불리며 선우를 보좌하고, 휘하의 유목집단들을 감찰, 재판했으며, 한과의 교섭을 담당했다고 한다.

흉노는 영역을 크게 좌방, 중앙, 우방으로 나누었다. 중방은 선우가 직접 다스리는 영역이었으며, 동쪽의 좌방은 좌방왕장, 서쪽의 우방은 우방왕장들이 관리했다. 이렇게 영역을 삼분하는 것은 후대의 유목제국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좌방은 고조선과 예맥, 상곡(上谷)에 접했으며, 우방왕장은 상군(上郡)을 겨눈 위치에 놓였으며, 월지, 저, 강과 접했다고 한다. 중앙은 선우정(單于庭), 즉 선우의 직접 지배 영역이었으며, 운중(雲中)과 대(代)에 접하였다.

선우 아래의 최고위 지도층은 만기(萬旗)라고 불렸다. 사기에 의하면 만기에는 좌우현왕, 좌우록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 등 24장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만기는 분지를 직접 다스렸으며, 휘하에 천장, 백장, 십장과 비소왕(裨小王), 상봉(相 封), 도위(都尉), 당호(当戸), 저거(且渠) 등의 속료를 거느렸다고 한다.[4] 만기란 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다는 의미이나, 몽골 등 후대의 유목제국들에서도 "만호"들이 만명의 병력을 거느리지 못했던 경우가 흔했다는 것을 고려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흉노의 실제 병력을 10만 정도로 추정한다.

흉노는 여러 집단의 연합체로, 스스로를 흉노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다. 유목집단의 구성은 친족집단(씨족집단)부터 여러 친족집단이 정치적 상하관계로 묶여 구성된 대규모 집단들까지 다양했다. 유목 생활을 위해 이들은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천막을 싣고 다니는 방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게르와 같은 조립식 텐트가 발명되지 않았다는 추정도 있다.[5] 이들은 말, 소, 양을 비롯하여 다양한 동물들을 목축하였으며, 주로 목축생산물을 이용하여 의식주를 해결하였다.

흉노 제국 내에는 농경민도 있었다. 납치당한 사람, 포로, 공주를 따라온 사람, 협상으로 넘겨받은 인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흉노의 영역 내에서 집단 거주를 했으며, 문화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제

흉노의 경제는 물자 확보를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목의 생산성은 그렇게 높을 수 없다. 그러나 교역로에서 팔 물건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기본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그리고 선우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물자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농경민과의 관계가 이들의 경제를 상당 부분 정의하게 된다. 상술했듯이 화친 조약에서 흉노가 요구한 조항들은 모두 한나라의 물자를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은 농경민에 대한 약탈, 정주민 국가와의 협상과 교역, 주요 교역로 장악 등을 바탕으로 경제를 꾸려나갔던 듯하다.

약탈의 역할?

흉노의 경제에서 약탈이 어떤 역할을 차지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기본적인 견해는 약탈은 직접적으로 물자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견해들도 많다. 우선, 약탈은 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흉노의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한고조의 굴욕적 패배 이후, 한은 흉노와의 전면전을 꺼렸다. 이때 흉노는 약탈을 통해 한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화친 조약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정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약탈은 약탈을 통한 물자 확보보다는 한과 지속적으로 교섭하고, 협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약탈의 진짜 목적은 물자 확보보다는 인력 확보가 목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약탈과 함께 납치도 항상 같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납치한 사람들은 흉노 영역권 내로 옮겨져 모여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흉노의 영역권 내에서 중국식 거주 시설의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6] 유목 제국 안의 정주민들은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했을 것이며, 제국은 이들을 통해 모자라는 생산성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목 제국들의 정주 지대 약탈은 물자 자체보다 물자를 생산할 능력을 갖춘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는 주장이다.

기타

사마천 고자되는 이야기

한무제 시절 이릉이란 장군이 흉노족 본진에서 흉노족을 상대로 신적인 전과를 올리다가 결국 지구전을 이기지 못하고 투항한 일이 있었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만 가지고 8만에 가까운 흉노를 여러 차례 격파하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했다. 이때 한무제는 이릉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이릉이 졌고,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분기탱천해 있었다. 이때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이릉를 그렇게 막 까는 건 아니지 않냐고 진언을 올렸다가 잘린다. 관직에서도 잘리고 거기도 잘리고...

사실 이는 무제의 노골적인 "이광리 밀어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광리는 무제의 애첩의 오빠(...). 그는 무능한 군인은 아니었던 듯 하나, 당시는 이릉과 함께 출전했다 대패한 상태. 이 상태에서 이릉을 옹호하고, 그의 군공을 칭찬한 사마천의 행위는 이광리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한편, 이릉의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지원군 철군은 한무제 본인의 결정이었다. 즉 이릉의 패배가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황제에게 "너님이 잘못해서 멀쩡한 장수가 적한테 항복했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는 뜻.

신라왕족 흉노설

이 이론의 핵심은 김일제라는 인물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무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한의 신뢰를 얻어 김씨 성을 하사받고 벼슬이 거기장군까지 올랐다. 김일제의 집안은 중국의 김씨의 시조라고 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김일제가 신라 왕족의 조상인지 여부이다.

일단 확실한 것은 신라 중대 이후 신라 왕실은 스스로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금석문 자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石+單>)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7]

이는 김씨부인의 할아버지 김충의에 대한 부분인데, 김충의는 신라인으로 중국 정사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아직 성씨 사용이 흔하지 않던 시기이므로 김충의는 신라 왕족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대왕릉비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왕실의 유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8]

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투후 제천지윤이란 역시 김일제를 뜻하는 말이다.

신라 흉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이 뿐이 아니다. 신라 문화에서도 흉노와의 친연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특히 신라의 무덤 양식과 유물 등이 북방 민족과 연관이 있음을 강조한다. 돌무지적성무덤이 흉노나 스키타이의 쿠르간과 유사하다는 것이 특히 강조된다.

그러나 이 설은 거의 완벽하게 부정당한 상태이다.

우선,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발생 시기는 4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9] 김일제는 기원전 134년 출생한 인물이며, 김일제의 후손이 왕망과 연관되어 패가망신한 것이 14년, 기원후 1세기이다. "요동으로 피신한" 이후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에서 왕이 되기까지 아무런 기록도 없다는 것. 게다가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 김씨의 김알지가 등장한 시기는 65년이다. 만약 신라 왕족이 김일제로부터 이어지는 흉노계 집단이 맞다면, 왜 돌무지덧널무덤은 김알지가 신라로 유입된 시기에 발생하지 않았던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만약 김씨가 왕이 된 이후에야 돌무지덧널무덤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최초의 김씨 왕은 미추 이사금으로, 3세기 사람이다. 어떻게 설명해도 100년간의 간극이 생겨난다는 것. 게다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과 유목민의 쿠르간은 유사하기는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여러가지 차이를 보이는 무덤양식이다. 신라 고분 연구가 진척되면서 돌무지덧널무덤까지 이르는 여러 발전단계가 파악되었기에, 현재는 돌무지덧널무덤을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무덤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신라 왕실이 스스로를 흉노와 연관지은 것은 7세기경에 등장한 위의 두 비문 뿐이다. 엄청난 시기적 괴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에는 스스로의 가문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하여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제후와의 친연성을 날조하는 일이 흔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신라 왕실에서 김일제를 스스로의 조상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목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본다.

훈-흉노 동족설

인터넷 은어로서의 사용

틀:위험행위 이 항목은 경상도 흉노족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라왕족 흉노설을 근거로 백제=전라도(사실 백제는 서울지방을 근거지로 발전한 정권이다.ㅡㅡ;;;), 신라=경상도, 신라의 시조가 흉노이니 경상도는 흉노(족) 라는 편협하고 자의적인 역사인식을 가진 지역 패권주의자들 혹은 반 영남 정서를 가진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때 회자되었던 지역드립이다. 이미 과거의 글에서나마 볼 수 있는, 약발이 다 된 드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드립을 치는 경우가 아주 간간히 보인다.

대체로 흉노는 불의 민족이니 경상도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답게 흉포하다느니 하는 궤변과 함께 세트로 사용된다. 최근엔 너무나 강렬하면서 비극적인 어떤 사건을 비하하는 드립이 흥하면서 그것으로 완벽하게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패륜적 고인드립이라 여기에 지면을 할애하기조차 아깝다.)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위키러라면 "흉노"를 이런 뜻으로 사용하지 말자. 의미 없는 지역감정 조장일 뿐이다.

한편 가끔 흉노가 백인계라는 주장을 가져와 경상도는 백인의 피를 물려받았다든가 하는 이상한 드립을 치는 사람들도 보인다. 당연히 백인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좋지 않은 시각이다.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드립을 아름다운 정신승리로 승화해낸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이 역시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위키러라면 절대 따라해서는 안 된다.

각주

  1.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가제), 김호동, (미출판)
  2.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가제), 김호동, (미출판)
  3.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4.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미출판
  5.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하사오 외
  6.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7.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 번역을 바로바로의 중얼중얼에서 재인용
  8. 역시 바로바로의 중얼중얼에서 인용
  9. 〈적석목곽분으로 들여다본 신라〉,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 전근대》, 이성주, 역사비평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