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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처음에는 좋았지}} 한의 대군은 먼저 신의 군대와 만나 [[개발살]]을 내고 흉노를 향해 북상한다. 흉노의 군대는 노인과 병든 말로 구성되어있었고, 퇴각을 계속하는 듯 보였다. 고조는 아예 병력의 일부만을 직접 데리고 흉노를 추격했다. 이윽고 한군은 백등산에 다다른다. 이 때 흉노는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하며 고조의 소규모 부대를 그대로 포위한다. 일부러 고조 앞에 약군을 미끼로 던져 그를 백등산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ㅊ|처음에는 좋았지}} 한의 대군은 먼저 신의 군대와 만나 [[개발살]]을 내고 흉노를 향해 북상한다. 흉노의 군대는 노인과 병든 말로 구성되어있었고, 퇴각을 계속하는 듯 보였다. 고조는 아예 병력의 일부만을 직접 데리고 흉노를 추격했다. 이윽고 한군은 백등산에 다다른다. 이 때 흉노는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하며 고조의 소규모 부대를 그대로 포위한다. 일부러 고조 앞에 약군을 미끼로 던져 그를 백등산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한겨울 산중에 고립된 고조의 신세는 정말 비참했다. 30만에 달하는 본대와 연락할 방법만 있다면 이깟 포위야 얼마든지 부숴버릴 수 있으련만, 흉노는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고조의 부대로서는 보급도 끊기고, 연락도 끊기는 최악의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일주일 동안 고립된 끝에, 한고조는 진평의 건의에 따라 묵툭의 아내 연지에게 모피 코트를 보내고 제발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ㅊ|[[뇌물]]먹은}} 아내의 간청에 따라 묵특은 포위망 한쪽을 풀어주었고, 한고조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한겨울 산중에 고립된 고조의 신세는 정말 비참했다. 30만에 달하는 본대와 연락할 방법만 있다면 이깟 포위야 얼마든지 부숴버릴 수 있으련만, 흉노는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고조의 부대로서는 보급도 끊기고, 연락도 끊기는 최악의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일주일 동안 고립된 끝에, 한고조는 진평의 건의에 따라 묵툭의 아내(연지)에게 모피 코트를 보내고 제발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ㅊ|[[뇌물]]먹은}} 아내의 간청에 따라 묵특은 포위망 한쪽을 풀어주었고, 한고조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백등산 포위전]] 참조.
더 자세한 내용은 [[백등산 포위전]] 참조.

2015년 5월 1일 (금) 13:37 판

틀:학술 관련 정보

匈奴

최초의 유목제국.

개요

흉노는 몽골 초원에서 탄생한 최초의 유목 제국이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각 제후국들과 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 흉노라는 집단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집단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훈족과 동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설에 불과할 뿐, 증명된 바는 없다.일 설에 의하면 흉노>훈>고트>게르만이라는 설도 있다.

역사

그들은 누구인가?

흉노가 어떻게 나타난 집단인지, 언제 나타난 집단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은주시대에도 "혼유(渾庾)", "훈죽(獯粥)", "험윤(獫狁)"이라는 명칭이 문헌상에 등장하는데, 이들의 흉노의 조상이라는 주장도 있다.[1] 유목 집단이 확실하게 중국 북방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초 사이로 보인다. 바로 "호(胡)"의 등장이다. 당시 각 제후국들은 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쌓고, 스스로 기병을 키우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한편 흉노가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318년이다. 당시 흉노는 한, 조, 위, 연, 제 다섯 제후국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진 통일기 무렵, 흉노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에 몽염에게 10만명, 혹은 30만명의 군사를 주어 흉노를 하남, 즉 황하 이남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몰아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2] 이후 진은 만리장성을 완성하여 이들의 남하를 막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흉노는 북방으로 밀려나며 큰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군사적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으니...

묵특(묵돌)의 등장

묵특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묵특은 두만(頭曼) 선우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만은 묵특보다 그의 애첩의 소생, 그러니까 묵특의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한편으로는 월지가 힘 좀 세다고 짜증나게 구는 걸 좀 정리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월지가 인질을 요구하자 그는 아들 묵특을 월지에 볼모로 보낸다. 월지는 볼모를 죽이려고 할 것이니, 보기 싫은 큰아들도 죽이고, 월지를 손봐줄 명분도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만의 예상대로 계획대로 월지는 묵특이 도착하자마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묵특은 천리마를 훔쳐타고 흉노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다. 두만의 모든 계획을 비틀어버렸지만 이 일로 아버지의 신뢰를 얻어 만여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된다. 그러나 묵특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심복들을 뽑아 기마궁술을 연마케 하는 한편, 자신이 명적, 즉 소리나는 화살으로 무엇인가를 쏘면, 일제히 그 목표물을 향해 활을 쏘도록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짐승을 쏘면서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묵특이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부하들은 당연히 머뭇거렸고, 묵특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며 머뭇거린 부하들을 죄다 참수시켜버린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 묵특은 사냥터에서 아버지를 향해 명적을 쏜다. 그의 부하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다. 두만은 벌집이 되어 사망하였다. 그는 계모와 이복동생을 차례로 죽이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묵특은 작은 유목 집단에 불과했던 흉노를, 초원 전체의 지배자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초원을 통일하라

장성 이남은 진나라가 멸망하고 초한쟁패기가 한창일 무렵, 묵특은 초원의 각 집단을 하나하나 꺾어나간다. 먼저 동부 흥안령 일대의 동호(東胡)를 급습해 복속케 하였다. 그 다음 타깃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월지였다. 감숙 지방의 월지는 묵특에게 밀려나 서방으로 이주한다. 누번과 백양을 수복하여 하남 지방을 되찾는 한편, 북쪽 바이칼 호 방면으로는 굴사(屈射), 정령(丁霊), 격곤(鬲昆), 신려(薪犂) 를 차례로 복속시켰다. 이로서 동부 중앙유라시아 일대를 흉노의 지배 하에 두었다.

한군을 격파하다

항우초나라를 꺾고 다시금 중원에 통일 제국을 세운 유방은 윗동네에서 무섭게 커가는 흉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세력이 확 커지더니 장성을 넘어와 약탈을 자주 자행하고,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을 계속 납치해가니 한고조로서는 언젠가는 정벌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한고조는 한왕(韓王) 신(信)을 대(代) 땅에 파견하여 흉노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신이 보기에 흉노와의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신은 화친을 시도했으나, 고조는 이를 배신 행위로 간주하고 신을 크게 책망한다. 그러지 신은 삐져서 흉노로 투항해버린다!. 신의 투항으로 생긴 힘의 공백 속으로 흉노의 4만 대군이 파고들었다. 한고조는 분개하며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친히 30만의 군대를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처음에는 좋았지 한의 대군은 먼저 신의 군대와 만나 개발살을 내고 흉노를 향해 북상한다. 흉노의 군대는 노인과 병든 말로 구성되어있었고, 퇴각을 계속하는 듯 보였다. 고조는 아예 병력의 일부만을 직접 데리고 흉노를 추격했다. 이윽고 한군은 백등산에 다다른다. 이 때 흉노는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하며 고조의 소규모 부대를 그대로 포위한다. 일부러 고조 앞에 약군을 미끼로 던져 그를 백등산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한겨울 산중에 고립된 고조의 신세는 정말 비참했다. 30만에 달하는 본대와 연락할 방법만 있다면 이깟 포위야 얼마든지 부숴버릴 수 있으련만, 흉노는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고조의 부대로서는 보급도 끊기고, 연락도 끊기는 최악의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일주일 동안 고립된 끝에, 한고조는 진평의 건의에 따라 묵툭의 아내(연지)에게 모피 코트를 보내고 제발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뇌물먹은 아내의 간청에 따라 묵특은 포위망 한쪽을 풀어주었고, 한고조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백등산 포위전 참조.

화친 조약

어쨌거나 전쟁의 결과는 한의 완벽한 패전이었다. 한과 흉노 사이의 화친 조약은 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적인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 한과 흉노는 형제의 의를 맺는다.
  •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낸다.
  • 한은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비단을 보낸다.

이 조약은 무제까지 한과 흉노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초가 된다.

여기에서 유목 국가의 중요한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흉노에게 농경국가와의 전쟁은 물자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흉노로서는 중국을 정복하고 다스릴 생각도, 능력도, 인구도 없었다. 그러나 유목의 생산성은 낮은 편이었으며, 기껏 장악해놓은 육상 교역로에서 팔만큼 좋은 질의 물건을 확보하는 것이 힘들었다. 흉노로서는 한의 물자를 어떻게든 끌어내야 했던 것이다. 매년 많은 양의 옷감과 비단을 받는 것은 물론, 공주를 취하는 것도 바로 물자를 얻기 위해서였다. 물론 한에서 진짜 공주를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가짜 공주를 보냈으나, 흉노에게는 그 공주가 진짜 공주인지 여부보다 공주가 가지고 오는 지참금, 그리고 공주의 생활비 명목으로 매년 한에게서 받아낼 수 있는 막대한 물자가 중요했다.

이 목적을 더욱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흉노는 후에 화친 조약에 한 조항을 추가한다.

  • 국경지대에 관시(関市)를 설치하여 교역한다.

이는 더욱 효율적으로 한의 물자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다. 관시에서는 흉노의 말과 한의 다양한 물자들이 교환되었다. 그런데 흉노는 "미래에 줄 말" 값까지 쳐줄 것 영원히 안 치를 외상값을 한에게 요구하였고, 한은 이와 같은 억지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후에 한이 울컥해서 당장 가져온 말 값만 쳐주겠다고 선언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 될 정도.

한의 입장에서는 이 화친조약은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으나, 고조가 유언으로 "흉노와 전쟁하지 말 것"을 남길 정도로 백등산에서의 패배로 인한 트라우마가 컸기에 흉노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뭐 흉노가 기마전술로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고. 한의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여태후에게 묵특이 보내온 농서, 즉 희롱하는 서신이다. 대략 "너네 나라에는 왕이 없고 우리 나라에는 왕비가 없으니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것을 취하는 게 어떻겠는가?" 라는 내용이다. 이게 천년쯤 뒤 유럽에서는 자주 있는 관습이었는데, 시대를 잘못 타서 성희롱이 된 것인가 원수지간에 시전해서 성희롱이 된 것인가

이하 작성중

무제의 강경책

1차분열

호한야의 통합

2차분열

5호16국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특징

유목 제국들의 대표적인 특성들이 대부분 흉노에서 이미 나타났다. 예를 들어,

  • 농경 지역에 대한 약탈과 납치, 교역으로 구성된 경제[3]
  • 지배가 아닌, 약탈과 협상을 위한 전쟁[4]
  • 후계 과정에서의 불안정성[5]
  • 우수한 기동성을 기반으로 한 전략적 우위
  • 초원의 여러 집단을 통합한 후 하나의 집단 명칭 사용

등이 있다. 후대의 유목 제국들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등도 초원에 있을 때에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편, 문화적으로도 북유라시아 초원지대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흉노와 유사한 동복, 즉 청동 솥이 유럽에서 발견된 바 있으며, 흉노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유물들이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선우

  • 두만선우
  • 묵특선우
  • 노상선우

기타

사마천 고자되는 이야기

한무제 시절 이릉이란 장군이 흉노족 본진에서 흉노족을 상대로 신적인 전과를 올리다가 결국 지구전을 이기지 못하고 투항한 일이 있었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만 가지고 8만에 가까운 흉노를 여러 차례 격파하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했다. 이 때 한무제는 이릉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이릉이 졌고,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분기탱천해 있었다. 이 때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이릉를 그렇게 막 까는 건 아니지 않냐고 진언을 올렸다가 영 좋지 않은 곳잘린다. 사실 이는 무제의 노골적인 "이광리 밀어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광리는 무제의 애첩의 오빠(...). 그는 무능한 군인은 아니었던 듯 하나, 당시는 이릉과 함께 출전했다 대패한 상태. 이 상태에서 이릉을 옹호하고, 그의 군공을 칭찬한 사마천의 행위는 이광리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한편, 이릉의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지원군 철군은 한무제 본인의 결정이었다. 즉 이릉의 패배가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황제에게 "너님이 잘못해서 멀쩡한 장수가 적한테 항복했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는 뜻.

신라왕족 흉노설

훈-흉노 동족설

각주

  1.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가제), 김호동, (미출판)
  2.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가제), 김호동, (미출판)
  3.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하시오 외.
  4.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하시오 외.
  5.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하시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