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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리]]는 무제의 애첩의 오빠. 그는 무능한 군인은 아니었던 듯 하나, 당시는 이릉과 함께 출전했다 대패한 상태. 이 상태에서 이릉을 옹호하고, 그의 군공을 칭찬한 사마천의 행위는 이광리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한편, 이릉의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지원군 철군은 한 무제 본인의 결정이었다. 즉 이릉의 패배가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황제에게 "너님이 잘못해서 멀쩡한 장수가 적한테 항복했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는 뜻. === 신라왕족 흉노설 === 이 이론의 핵심은 김일제라는 인물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무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한의 신뢰를 얻어 김씨 성을 하사받고 벼슬이 거기장군까지 올랐다. 김일제의 집안은 중국의 김씨의 시조라고 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김일제가 신라 왕족의 조상인지 여부이다. 일단 확실한 것은 신라 중대 이후 신라 왕실은 스스로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금석문 자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인용문2|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ref>부산외대 권덕영 교수 번역을 [http://www.ddokbaro.com/2263 바로바로의 중얼중얼]에서 재인용</ref> }} 이는 김씨부인의 할아버지 김충의에 대한 부분인데, 김충의는 신라인으로 중국 정사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아직 성씨 사용이 흔하지 않던 시기이므로 김충의는 신라 왕족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대왕릉비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왕실의 유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ref>역시 [http://www.ddokbaro.com/2263 바로바로의 중얼중얼]에서 인용</ref> 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투후 제천지윤이란 역시 김일제를 뜻하는 말이다. [[신라]] 흉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이 뿐이 아니다. 신라 문화에서도 흉노와의 친연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특히 신라의 무덤 양식과 유물 등을 북방 민족의 그것과 비교하며 유사점들을 지적한다. 특히 [[돌무지덧널무덤]]이 흉노나 스키타이의 쿠르간과 유사하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 설은 거의 완벽하게 부정당한 상태이다. 우선,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발생 시기는 4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ref>〈적석목곽분으로 들여다본 신라〉,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 전근대》, 이성주, 역사비평사, 2009</ref> 김일제는 기원전 134년 출생한 인물이며, 김일제의 후손이 왕망과 연관되어 패가망신한 것이 14년, 기원후 1세기이다. 즉 김일제의 후손이 이동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신라에 [[돌무지덧널무덤]]이 나타날 때까지 300여년의 시간적 괴리가 생겨난다. 게다가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 김씨의 원조 김알지가 등장한 시기는 65년이다. 14년 패가망신한 김일제의 후손이 50여년 만에 신라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는 게 가능한지 여부는 둘째치고, 만약 신라 왕족이 김일제로부터 이어지는 흉노계 집단이 맞다면, 왜 [[돌무지덧널무덤]]이 김알지가 신라로 유입된 시기에 발생하지 않았던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만약 김씨가 왕이 된 이후에야 [[돌무지덧널무덤]]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최초의 김씨 왕은 미추 이사금으로, 3세기 사람이다. '흉노의 유입'과 [[돌무지덧널무덤]]의 발생 간에는 어떻게 설명해도 100년의 간극이 생겨난다는 것. 게다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과 유목민의 쿠르간은 유사하기는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차이를 보이는 무덤양식이다. 신라 고분 연구가 진척되면서 [[돌무지덧널무덤]]까지 이르는 여러 발전단계가 파악되었기에, 현재는 [[돌무지덧널무덤]]을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무덤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신라 왕실이 스스로를 흉노와 연관지은 것은 7세기경에 등장한 위의 두 비문 뿐이다. 엄청난 시기적 괴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에는 스스로의 가문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하여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제후와의 친연성을 날조하는 일이 흔했다. 흉노의 일파가 신라로 이동해왔음을 증명할 고고학적 자료가 없고, 중요한 근거로 꼽혔던 [[돌무지덧널무덤]]과 쿠르간의 유사성이 부정되면서, 현대 학계에서는 신라 왕실에서 김일제를 스스로의 조상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목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본다. 다만, 하나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경주김씨]] 족보에 기록된 [[김알지]] 설화와 문무왕비와 신문왕비에 기록된 성한왕의 설화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문의 대수를 타고 올라가면 성한왕은 김알지의 2세손인 "세한"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게다가 한자를 통해 우리말을 구성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성한과 세한이 같은 발음이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성한왕=김세한인데, 성한왕의 설화가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같다는 것은 김알지 역시 가공의 인물이고 후대에 족보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대를 추승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 훈-흉노 동족설 === 훈은 4세기경부터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고 게르만계 민족들의 대이동을 일으킨 유목집단으로 유명하다. 91년 타키투스의 기록에 카스피해 주변에 분포하고 있던 "훈노이"(훈의 복수형) 라는 집단이 등장한다. 이는 훈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꼽히지만, 이 집단이 과연 훈이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유럽 역사에 훈이 확실하게 등장하는 시기는 4세기경인데, 370년 흑해 연안으로 이동해 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훈]] 항목 참조. [[파일:Hun üstök.jpg|섬네일|200px|훈의 동복]] 어쨌거나 유럽 학계에서 훈의 유래는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유럽 역사에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세기 훈과 흉노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었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현재까지도 훈-흉노 동족설은 완전히 증명되지도, 완전히 부정되지도 않은 채 역사학계의 떡밥으로 남아 있다. 훈과 흉노가 동족이라는 주장은 연대, 유물, 기록에 근거한다. 일단 흉노와 훈의 발음상의 유사성을 차치하고서라도, 4세기경 박트리아에서 '흉노'라고 기록한 것을 소그디아나에서는 '훈'으로 번역하고, 소그디아나에서 '훈'이라고 기록한 것을 박트리아에서는 '흉노'로 번역했음이 밝혀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4세기경 낙양이 함락될 때, 소그디아나에서는 "훈"을 낙양을 점령한 주체로, 중국에서는 "흉노"를 낙양 점령의 주체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흉노의 동복(의례용 구리 솥)과 훈의 동복이 매우 유사하며, 몽골리아의 합성궁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가 훈의 등장 시기와 일치한다. 최소한 흉노와 훈 사이에 문화적 연관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 [[파일:0511 Turmschädel Württembergisches Landesmuseum Stuttgart anagoria.JPG|섬네일|300px|왼쪽|편두를 한 두개골]] 그러나 훈에서 확실히 행해진 편두(어릴 때 머리를 묶어 두개골이 길쭉하게 자라도록 함)가 흉노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훈의 관습 가운데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은 스스로의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내는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흉노에 이런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두 집단 간에 분명히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 한편 흉노와 훈을 같은 집단으로 보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꼽히는 것은 흉노가 이란의 알라니족(奄蔡)을 정복했다는 중국 정사의 기록이다. 이 정복의 시기가 훈이 알라니족을 정복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위서에서 처음 등장한 후 북서, 조서 따위에서 차용되었는데, 위서에서는 흉노를 이 점령의 주체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아직은 흉노와 훈이 같은 집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가 부족한 것이다. 또한 1~2세기 중국 역사기록에서 서서히 이탈한 북흉노가 정말로 4세기경 갑툭튀한 훈의 선조라면, 그 사이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시기가 되어버린다. 현재로서는 훈과 흉노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같은 "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훈 내에는 여러 계통의 유목민이 혼재되어 있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훈이 몽골 고원에서 온 집단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훈이 흉노의 일파에서 출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훈의 문화는 당시에도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단은 초원의 세계를 통로로 하여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