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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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炳吉. 이명은 홍병철(洪丙喆).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병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울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3년경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송천동(현 경원군 중영리)에서 소작인 황오섭의 아들로 태어났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엔 그가 1885년 4월 15일에 출생했다고 기재되었지만, 그가 1918년 경성시찰단 단장으로 활동할 때 이력서에 '당 36세'로 기재되어 있고 1912년 황병길에 대한 일본 정보 문서에도 '28,9세'로 기록되어 있는 점을 볼 때 그의 실제 출생 년도는 1883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가 4월 15일에 태어났다는 설은 연변 출신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기반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황병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한 소작인으로서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고 하며, 그는 이 가난을 피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1918년의 일본 정보문서에 따르면, 황병길은 1907년 3월 중국령으로 이주했으며 1902년부터 약 8년간 북청진위대 보병 하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반면 연변대 교수 김동화는 <중국 조선족 독립운동사>에서 황병길이 1905년 연해주로 이주하여 이범윤의 산포대에 들어가 활동했다고 밝혔다.

또한 연변대 민족역사연구소 교수 김춘선은 <황병길과 '단지동맹'에 관한 일고찰>에서 황병길에 1907년에 연해주로 이주했다고 주장했고, 수원대학교 교수 박환은 <최재형-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에서 황병길이 러일전쟁 당시 통역으로 러시아군에 가담해 전쟁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설 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김춘선의 <황병길과 '단지동맹'에 관한 일고찰>에 따르면, 황병길은 이범윤의 산포대에 가입하여 1908년 7월에 신아산 전투, 서수라 전투에 참여했고 안중근 등이 결성한 단지동맹에 가입했다고 한다. 안중근 재판 공판 기록에 따르면, 그와 함께 단지동맹한 이들 중엔 가장 어린 나이였던 '황길영'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황길영이 황병길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지만 사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황병길이 기록에 전면으로 등장하는 때는 1911년 12월경 부터다. 그는 연해주에서 훈춘 숭례향 연통랍자로 이주한 뒤 훈춘 순경국에 고용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개시했다. 그는 1912년 연해주에 기반을 마련한 <권업신문>에 의연금을 지원했으며, 1912년 6월 윤해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에 관해 동료들과 논의하고 다시 훈춘으로 돌아올 때 그를 훈춘 순경국에서 호위했다. 또한 김관수 의병대가 훈춘에서 활동할 때 편의를 제공하고 안전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중국 관헌의 정책을 이용하기도 했다. 훈춘 지사 팽수당(彭樹棠)이 일본의 만주로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이주 한인들을 귀화시키려 하자, 황병길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독립운동을 보다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중국과의 협조체제를 유지했다. 이에 훈춘영사분관은 1912년 9월 팽수당에게 황병길이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때문에 그를 해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팽수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일본 측의 황병길 해고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이무렵 기독교에 귀의한 황병길은 종교를 활용해 독립운동을 강화하려 했다. 황병길은 이문필, 박우삼 등과 함께 기독교인을 통합하여 지방청년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그는 먼저 1912년 6월 자택에서 교인 모임을 개최하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교인들과 연게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시켰다. 1913년 12월에는 기독교 교우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했으며, 1914년 1월 20일에는 기독교교우회보를 창간하여 회원들에게 국제정세 및 독립운동의 상황을 알렸다. 또한 그는 종교계의 연합을 추진했다. 1913년 11월 28일, 황병길은 대종교 교주 나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존명에 미리 연락을 못했고 수백리 떨어진 곳에 있어 교통이 불편하여 아직 존류를 배알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차제에 기회 있으면, 작년 10월 이래 귀지부민의 지도와 국가를 위해 분주하게 있으며, 그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중략) 장래 한층 나라를 위해 함께 진력하기를 바랍니다. 조상들의 땅을 버리고 이곳 만주에 와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대한 삼천리 강토가 병합되어 모두 왜인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자국의 재흥을 위해 간도재주 조선인의 단결을 도모하여 대한의 재흥을 기도하고 동포를 구제하여 분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에 대한 회답은 없었지만, 황병길이 기독교와 대종교의 제휴를 추진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또한 황병길은 간민회의 후속단체인 장업회에서 훈춘현 책임자로 지명되어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하게 교유했으며, 기독교우회 부속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그가 설립한 교우회 부속학교는 학생수가 많게는 40여 명이었는데, 주로 군사교육을 실시했고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제고에도 전념했다. 그리고 신풍촌 종명학교 개교기념일에 이동휘, 오병묵, 김동한 등과 함께 초대받았지만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고, 수분대전자학교의 운영에도 깊숙히 관여하며 독립운동의 인적자원을 배출하는 데 힘썼다.

황병길은 군자금 모금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오병묵, 이동춘, 백규삼, 김동한, 양하구, 이동휘, 백옥보, 장기영 등과 함께 기독교교우회를 활용하여 군자금 모집에 노력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이 계획만큼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자, 그는 이동휘, 이동춘, 김영학 등과 함께 애국저금단(愛國儲金團)을 조직해 보다 원활하게 체계적인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애국저금단의 본부는 동녕현에 두었으며, 무기 공급이 주된 활동이었다.

황병길은 한인들에 대한 선전활동에도 진력했다. 1914년 10월, 그는 이동휘와 함께 독립전쟁에 대해 "산동에서 일본의 대독선전 이래 한인독립운동가는 중국의 유력자와 교섭하여 일본에 공동 대처함으로써 어떠한 상황에 닥쳐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구주의 화란은 가장 먼저 동아시아에 미쳤으며, 미국은 암암리에 중국을 지원하여 일본에 대항하고 있다. 이때 마땅히 우리 동포는 더욱 분기하여 국권을 위해 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1914년 11월 중국인 왕정문(王正文)이 훈춘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고 중국관헌들의 배일 분위기가 고조되자, 이에 고무된 황병길은 이동휘, 오병묵 등과 함께 연해주의 한인들을 근거로 훈춘 영사관, 일본헌병대를 습격하게로 계획했다. 이를 위해 군자금으로 개별 호당 1개월에 50전을 징수하기로 했다. 또한 황병길은 신해혁명 당시 훈춘 순경국장 왕융여(王永如)가 조직한 순치동제당(脣齒同濟黨)에 가입하여 훈춘의용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훈춘의용대의 인원은 46명이었으며, 양하구, 오병묵, 김동한, 이명순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주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7년 10월, 훈춘영사분관은 황병길을 체포했다. 그가 어떻게 체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일제는 훈춘 지역 한인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해 1916년 12월 훈춘 조선인공회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훈춘일본영사분관의 설립인가를 받고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흑정자와 연통랍자에 지부를 설치했다. 훈춘영사관은 한인들이 훈춘 조선인공회에 더 많이 가입하게 하기 위해 체포된 황병길을 '석방'시켰고, 이로인해 훈춘조선인민회의 회원이 급증했다.

이후 훈춘영사분관은 1918년 1월 7일 황병길을 친일선전에 활용하고자 고향인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데리고 가 헌병대, 수비대, 군청을 방문하게 했다. 일본 헌병대는 황병길이 이곳에서 한인 동포가 조선 총독의 선정 세례를 받으면서 편하고 지내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으며, 이후 일본 관헌을 위해 진력하여 전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훈춘영사분관은 여기서 더 나아가 황병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시찰이란 명목으로 관광을 권유했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적극 활용하려 했다.

1918년 4월 11일, 훈춘조선인공회장 김명호와 부회장 조익형은 독립운동가 한형권, 문병호, 양하구 등을 소집하고 5월에 출발할 시찰단의 최종 규모를 정하고 보충 인원에 대한 선발도 협의했다. 4월 18일 회의가 다시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다른 독립운동가의 참가여부도 타진되었다. 황병길은 흉부의 통증과 족부 마비증세를 호소하며 관광단에서 빠지려 했지만 끝내 시찰단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리하여 결성된 경성시찰단은 1918년 4월 28일 훈춘을 떠나 청진 등지를 시찰하고 5월 3일 의정부에 도착했다.

이후 시찰단이 경성에 도착했을 때,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이사 최강, 이병혁과 경성일보사 관계자 방태영이 환영행사에 참석했다. 공식지정 여관인 공평등곡동여관에 여장을 푼 시찰단은 5월 4일 조선총독부를 방문하고 총독부 제2회의실에서 조선총독 하세가와를 접견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시찰단장 황병길은 조선총독에게 시찰단에 대한 배려에 감사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시찰단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상품진열관, 조선은행, 경성우체국을 시찰하고 5월 15일 서울을 떠나 5월 25일 훈춘에 도착했다. 훈춘영사분관은 황병길을 비롯한 시찰단을 선전에 활용하기 위해 6월 2일 연통랍자 광성학교 운동장에서 시찰보고회를 개최했다.

그 후 일제는 황병길 등 독립운동가들을 시찰단으로 선정하고 국내를 순방하게 한 것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고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을 인솔할 세 사람으로 황병길, 이춘, 조익형을 선정했다. 그러나 황병길은 겉으로는 일제에게 감화된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내심 일제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1919년 2월 24일 일본 정보자료에 따르면, 황병길은 동지 김정락에게 시찰단 파견에 대해 자신이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며 일제에 대한 비타협을 맹세했다고 한다.그의 이같은 마음은 1년 후 표출되었다.

1919년 3월 11일, 황병길은 3.1 운동과 관련해 이명순과 함께 북일학교장 양하구와 교사들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서면을 보냈다. 그리고 3월 13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협의하였고 15일 훈춘 지역민과 연합하여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다. 이후 3월 16일 훈춘공서와 치안담당자 영장 오승은(吳承恩)을 차례로 방문해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중국 측으로부터 일정부분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3월 20일 오후 1시경에 700여 명의 한인들과 함께 훈춘영사분관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에는 무기를 소지한 인물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황병길은 청년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제군! 우리 조선은 열국의 승인에 따라 국치를 면하고 독립을 달성 하기 위해 십년간 국외에서 각지를 전전하면서 유랑생활과 같은 참혹한 생활을 하였으며 온전한 국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한 독립국의 국민이 되는 희열을 느끼니 제군과 함께 만세를 부르자!

이어 노종환이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면서 시위대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황병길은 독립선언을 한 후 영사분관의 한인 순사 및 밀정을 처단하고 훈춘 한인 마을에 태극기를 제조하게끔 했다. 하지만 훈춘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중국 측과의 협의에 따라 물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만세 삼창을 하고 상황을 종료했다. 그 후 그는 만세시위의 한계를 느끼고 박치환 등과 함께 건국회(建國會)를 조직했다. 건국회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황병길은 1919년 3월 말부터 독립운동의 인적자원과 무기공급에 전력을 다했다. 일본 정보문서에 따르면, 황병길은 3월 말 이래 분주하게 노력한 결과 1,200명의 동지를 규합했고 총기도 러시아로부터 공급받아 준비가 끝났다고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중국 측 치안담당자 오승은과의 협의를 계속해 일제의 체포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담보받았다. 또한 그는 김동한, 정규환, 김약연, 김영학, 윤능호, 문창범과 함께 한인결사대를 조직했고, 1919년 4월 17일 노종환에게 대황구에서 4월 26일에 있을 독립운동 관련 집회의 개최 준비를 명령했다. 노종환은 100명을 선발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각 호당 20루블을 모금하려 했다. 그러나 모집 과정이 순탄하지 않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황병길은 군자금 모집의 조직화를 꾀하기 위해 나정화와 함께 대한국민회 훈춘지부를 조직했다. 이에 일제는 훈춘공서에 황병길의 체포를 거듭 촉구했고, 간도 총영사도 연길 도윤에게 이를 직접 요청했다. 그러나 황병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국민회원 가운데 150명을 선발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에 동원했다. 그는 군자금 모집의 대상을 이주한인으로 삼았지만 그 중에서도 자산가에 집중되었다. 지역으로는 경성까지 그 범위를 확대했다. 그는 결사대를 나누어 파견했는데, 이는 대규모 부대의 움직임이 일제에 의해 포착될 수 있어 군자금 모집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군자금은 1인당 300루블로 활동비를 책정하여 사용했다.

황병길은 대한국민의회 연락계장으로서 무기를 다량으로 구입했다.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단체들과 연계하여 국내 진입을 준비했다. 이에 일제는 영사관으로서는 더이상 이들을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파견해 독립운동가들을 모조리 체포하기로 계획했다. 황병길은 이러한 일제의 압박을 회피하기 위해 1919년 7월경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에서 이동휘, 김립 등과 함께 국내 진격작전에 대해 협의했다. 이 회의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사대 및 청년단 가운데 400여 명을 선발하여 하얼빈을 거쳐 국내로 진공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황병길은 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 홍범도와 협의하여 명동학교 학생과 북일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결사대를 조직했는데, 그 수가 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황병길은 이 숫자를 2천 명으로 늘리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동료를 포섭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9월 경엔 이명순과 함께 400여 정의 무기를 확보하고 북일학교 교사 나포남(羅福南)이 직접 지휘하는 결사대로 국내 진격을 계획했다. 그는 이 계획을 좀더 구체화하기 위해 9월 19일 훈춘현 사도구에서 훈춘대한인국민회 총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이명순과 박영호, 나정화는 총기 구입을 위해 9월 23일 니콜리스크로 가서 25만 루블을 수령하고, 홍범도와 이용, 채영 등이 결사대원 200여 명을 이끌고 국내로 진격하는 계획이 마련되었다.

한편 황병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훈춘지방 검사장에 임명되어 훈춘지역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감독했다. 그는 군자금 모금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재무원, 영수원을 두었다. 검사장의 직무는 재무원, 영수원을 감독하고 모집상의 부정을 규찰하고 모집불능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나정화와 함께 독립군 후원회를 결성해 결사대원 가운데 전사자 또는 부상자를 후원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집을 임시정부 교통국의 본거지로 삼았고, 모집된 군자금을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납부하고 상하이에서 무기를 구입해 훈춘으로 이송하게 했다. 그는 국내로 진공하려는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오주혁을 상하이로 파견했다.

1920년 1월, 황병길은 최상학[1], 최상규, 구현문, 조민국, 조원창 등과 함께 두도구의 김학현의 집에서 시국을 논의한 끝에 3월에 개최될 국제연맹 회의에 조선의 독립이 확실하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각 단체가 연합하여 의용군을 조직해 무력에 의한 독립 쟁취를 이루기로 결정했다. 황병길은 "우리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군자금은 기부로 받아내기로 했다. 의용군이 조직되면서 군자금도 차등있게 책정되었다. 상등 호수 6호로부터 1호당 30원씩 금 160원, 중등 호수 12호로 부터 1호당 20원 계 240원, 하등호수 14호로부터 1호당 5원 금 70원 계 470엔을 조달했다.

이윽고 그가 모집한 의용군이 1,300여 달하자, 황병길은 이 병력을 활용해 국내 진군을 감행했다. 그는 2월 10일 훈춘의 자택을 출발하여 러시아 삼차구로 가서 이동휘 및 문창범과 협의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납부할 방안을 마련한 뒤 의용군과 합세한 후 부하 최용삼과 함께 3월 18일 온성군 장덕동 미산헌병감시소를 습격하여 일본군과 40분간 교전하고 일본헌병보에 중상을 입혔으며 통신을 단절시켰다.

일제 영사관은 황병길의 무장 투쟁으로 상황이 위급해지자 일본 경찰에 "모든 반일투쟁이 황병길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그는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니 체포에 총력을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일제 경찰들은 밀정을 총동원해 그를 잡으려 들었고, 황병길은 이들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러나 이 무렵 그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쳤고 급기야 급성 폐렴까지 걸리고 말았다. 그는 훈춘의 어느 숲속에 마련된 은신처에서 부인 김숙경(金淑卿)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굳세게 싸우시오.

1920년 6월 1일, 황병길은 눈을 감았다. 향년 37세. 그의 유해는 훈춘 연통랍자에 안장되었다가 1992년 국내에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황병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최상학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