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진지

Chirho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9월 11일 (금) 19:29 판

틀:문화재

개요

조선시대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를 방어하고 관리위해 건설된 진성으로 1678년 지방관인 최관에 의해 축성된 성곽유적이다. 당시 화북진은 동편의 조천진과 함께 제주목에서 직접 관리하던 육지와의 교통로였기에 제주도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관문이라 할 수 있다.

본래 화북포구는 수군 기지였던 화북수전소만이 설치되어 있었고 판옥선이 중부, 좌부, 우부 각 1척이 있었고 격군 180명, 포를 쏘는 사수 87명이 있었으나 바닥의 바윗돌이 날카롭고 태풍이 잦아 판옥선 운용이 쉽지 않았었다고 한다.

1555년인 명종 10년 왜구의 침입으로 화북수전소가 함락당하고 이곳으로 상륙한 왜구가 제주읍성을 사흘간 포위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후 수전소를 방어할 성을 쌓게 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의 규모는 606척(약 184m), 높이 10척(약 3m)로 동문과 서문의 2개 문이 있었으며 진 내부에는 진사, 공수, 사령방, 마방, 무기고 등이 있었다. 숙종 25년인 1699년에는 제주목사 남지훈이 객사인 환붕정을 지었고, 이후 헌종대에는 북쪽 성벽쪽에 망양정이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어 성벽 일부만 남아있다.

이후 화북진성이 기능하던 당시에는 조방장 1인 치총 2인 방군 92인이 배치되었으며 병선으로는 사후선 1척을 배치하고 있었다.

기타

  • 현재 화북진지에는 "화북 청소년 문화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해당 시설물의 경계선이 과거 성벽 자리와 거의 일치한다.
  • 화북진 앞의 화북포구는 조선시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이었던 곳이다. 1737년(영종 13년) 항만 축조가 불완전하여 풍랑이 일 때마다 항 내의 선박들이 부서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정이 스스로 돌을 들어 나르는 등 앞장서서 방파제와 선착장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 때문인지 김목사는 이임해서 육지로 나가기 직전 화북진에서 사망하게 된다.
  • 추사 김정희나 최익현이 제주도로 유배올 당시 이 화북진을 통해서 제주도에 입도하였다.
  • 화북진과 화북포구 사이에는 해안용천수가 나는 샘이 있으며 금돈지물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