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

호남선
나라 대한민국
종류 일반철도(간선), 광역철도[1]
번호 304
구간 대전조차장 ~ 목포
영업거리 252.5 km
역 수 48개
소유자 대한민국 정부 (국가철도공단 위탁)
운영자 한국철도공사 (KORAIL)
개통일 1914년 1월 11일
시설 정보
궤간 1,435 mm (표준궤)
선로 2
전기 교류 25 kV, 60 Hz, 가공전차선
신호 ATS, ATP

노선명 그대로, 호남 지방을 잇는 노선으로, 호남 지방 중에서도 중서부 지역을 훑는 노선이다. 경부선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간선으로, 정확히는 대전목포를 잇는 노선이다.

과거 관보 등에서는 호남본선(湖南本線)으로 부르고, 호남선을 본선과 지선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부설까지의 경위[편집 | 원본 편집]

호남지역에 철도를 부설하고자 하는 시도는 1896년 프랑스의 피브릴(Fives-Lille)의 지배인 그리유(M. Grille)에 의해 경의, 경원 두 철도와 묶어 철도 부설권을 청원한 것이 그 시초였으며, 서울서 목포 간을 연결하는 철도로 경목철도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후 서구 및 일본의 부설권 청원이 이루어졌으나 이를 물리치고 1899년 6월에 대한제국 정부는 경목철도를 직접 부설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후 1904년 5월에 대한제국 철도원의 주선으로 이윤용을 사장으로, 서오순을 전무로 한 '호남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충남 직산에서 강경, 군산에 이르는 노선과, 공주 목포 간의 철도 부설권을 철도원에 청원하여 그 부설권을 허가받게 되었다.[2]

한편 일본 역시 이 노선의 부설을 기도하여, 경부철도합동조약이 체결되고 경부철도의 건설이 추진되면서 경목철도의 건설도 같이 검토, 조사되었으나 이래저래 경부철도 건설이 상당한 난항을 겪던 만큼 당시엔 실제 착수되지는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호남철도주식회사에 철도부설권의 인가가 나가자 이를 일본정부는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주된 논리는 인가된 노선이 경부철도의 지선이고, 대한제국이 건설한다고 하지만 외자에 의존하여 건설할 것이므로 경부철도합동조약에 근거하여 이를 일본은 승인할 수 없다고 우기며 인허가를 취소하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는 일축하였고, 일단 이 시점에서 일본과의 교섭은 중단되었다.[3]

호남철도주식회사는 이후 사무소를 서대문역 인근에 설치하고 그 자본금 총액을 225만원으로 하여 주식 모집을 하기로 하였으며[4], 일단 공사구간을 당초 허가 하에 조치원에서 강경으로 하는 35마일의 지선철도로 변경하여 그 측량을 1906년 10월에 완료하였다. 유길준, 신응희 등의 저명인사들을 창립위원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차입금 및 출자금을 바탕으로 1906년 11월부터 1907년 8월까지 일부 토공에 착수하였다.[5]

이당시 서오순은 한편으로 자금 모집에 어려움을 겪어 정부에 탄원하여 고종으로부터 궁내부를 통해 1907년초에 1만원을 지급받기도 하고[6], 한편으로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호남철도 부설이 대한독립의 시작이 된다(大韓獨立原因在此湖南鐵道凡我同胞共力竣工俾免列强之貽笑)"라고 써서[7] 주위의 호응을 요구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하였으나, 을사오적의 한 명인 당시 내부대신 송병준이 주식 모집을 방해하여[8], 결과적으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는데는 실패하게 되었다. 결국 통감부가 군사상 중요한 철도의 부설권을 개인에 허가함이 부당하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인가를 취소시키고 그 인허장을 회수하도록 하였으며, 취소 이후 1909년 5월에 실비보상의 명목으로 129,435원99전을 지불하였다.[9]

착공 및 완성[편집 | 원본 편집]

호남철도주식회사의 부설노력을 저지하는 한편으로, 통감부는 1907년 9월에 측량반을 투입하여 군산~목포간, 군산~조치원 간의 측량에 착수, 1908년 5월에 이를 완료하였다. 당시의 답사노선은 조치원에서 연기, 대교를 거쳐 공주 동쪽에서 금강을 건너고, 노성을 지나 목포 및 군산으로 가는 노선으로 목포까지의 본선이 161마일(259km), 군산 지선은 13마일(21km)의 총 174.5마일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이 측량 노선은 이후 실제 건설단계에서는 그 경로가 변경되게 된다.[10]

호남선의 전라북도 구간의 경로는 당시 일본인 대지주들의 경합 끝에 익산을 경유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동산농장 소유주 이와사키(岩崎)는 김제에서 삼례 통과를, 군산의 대농장주 오쿠라(大倉)는 지경(대야)통과를 고집하였다. 결국 양자가 주장하는 중간 지점인 솜리(益山)을 연결 지점으로 결정하였다고 전해진다.[11] 이로 인해 군산으로의 지선철도 건설이 포함되게 되었다.

정작 호남선의 착공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이후에 이루어지게 된다. 측량노선과 달리 실제 건설 노선은 루트가 변경되어 대전을 기점으로 하게 되었으며, 가수원, 두계를 거쳐 논산, 강경, 김제, 노령, 송정리, 나주, 영산포, 학교를 거쳐 목포에 도달하는 161.3마일의 노선과, 여기에 이리에서 군산항에 이르는 14.3마일의 지선으로 총 175.6마일의 철도를 건설하게 되었다. 다만 당시의 기술 수준이 낮고, 또한 갓 성립된 조선총독부로서는 빠른 건설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터널 등의 대규모 토목시설은 후일로 미루고 정거장 설비 역시 간소화 하며, 교량 등의 시설물은 가설구조로 하는 등 5년 안에 전구간 개통을 목표로 하여 1910년 5월에 건설선 측량에 착수하였고, 6월에 대전에 건설사무소를 설치하여 10월에 기공하게 된다. 다음해인 1911년에 목포에 건설사무소를 설치하고 이쪽에서도 측량을 실시하며 동년 10월에 기공하였다. 이후 1911년 및 12년에 대전 인근 구간에서 큰 수해 피해를 입었으며, 호남평야 일대에서는 연약지반이나 간척지, 범람원 통과 등의 애로가 있었으나 대개의 공사는 큰 지장없이 진행되어 1914년 1월 11일에 전구간을 개통하게 된다. [12]

개통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호남선에 부속하는 전라선, 광주선(이후의 경전선) 등의 지선이 부설되었으며, 연락하는 궤도 노선으로 함평궤도등이 부설되었다. 부설 직후의 개량공사 일부, 이후 총독부 철도국에 의한 지선의 국유화 이외에는 큰 개량이나 영업체계의 변동 없이 해방까지 운영되었다.

해방 이후[편집 | 원본 편집]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는 일시 열차운행이 중단, 감축되어 호남선 열차도 서울까지의 직통열차가 때때로 운행 중단되는 등의 변동을 겪기도 하였다.[13] 그러나 운행이 어느정도 안정되면서 서울에서 목포까지의 급행열차 제 31·32, 35·36열차, 서울~송정리간 보통열차 1왕복이 설정되는 등, 해방이후 남한에 있어 제2위의 간선에 다운 열차구성을 갖추게 되었다.[14]

한국전쟁기에는 호남선 일대에서 큰 교전이 있지는 않았으나, 개전 초반에 미군의 오폭으로 인해 익산역에서 다수의 직원 및 시민이 사상한 바 있으며, 전황변화에 따라 1950년에서 1952년 사이에 빨치산으로 인해 다수의 역 건물 및 시설, 열차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복선화 및 전철화[편집 | 원본 편집]

1960년대에 이르러서 전쟁피해가 회복되고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면서 교통수요가 증가하였고, 장차 선로용량의 압박이 심대해질 것으로 예견되었다. 이에따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대전에서 익산 까지의 복선화가 착수되었다. 당시의 계획은 4개 구간으로 나누어 제1차 대전~논산간 64.1km을 필두로, 논산에서 익산간 36km, 익산에서 장성간 108.1km, 그리고 장성에서 몽탄간의 61.6km의 총 269.8km구간이었다. 당시의 계획은 기존의 호남선과 병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3급선 기준으로 최소곡선반경 400m, 최급구배 13.3퍼밀의 규격으로 설계되었다.[15]

1차 구간 중 제일 먼저 착공된 두계에서 광석 구간의 복선공사는 1968년 1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969년 6월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이후 잔여구간의 공사도 착수하여 1978년 3월 30일에 대전~이리 구간 전부가 개통을 보게 되었다[16].그러나 개통도 얼마 되지 않은 1979년 1월 12일 가수원~흑석리 사이의 괴곡터널이 붕괴하여 구 선로를 복원하여 한동안 운행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17]

이후 2단계 구간은 익산에서 송정리간으로 변경하여 1981년 2월 4일에 착공하여 1988년 9월 6일에 완공하였다. 중간에 정주까지 1985년 11월 15일에, 장성까지는 1987년 12월 4일에 도중 개통하여 복선 운행을 개시하기도 하였다.[18] 이로서 마지막 남은 송정리에서 목포간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구간의 복선화는 상당히 지연되었는데, 1987년도 대통령 공약사업이었으나 정작 공사의 착수는 타당성조사 및 각 구간별 실시설계로 인해 1995년 9월에서야 착공에 이르게 되었으며[19], 최종적으로 전구간의 복선화는 2001년 12월 17일에 이르러서 완수되었다.

이후 KTX의 동시개통 운행을 위해서 전철화 공사가 2001년에 착수되어, 2004년 3월 23일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이는 대전에서부터 복선화 공사에 착수한지 36년이 걸린 시점이었다. [20]


2019년 4월 17일 노선번호가 204에서 304로 변경됨.[21]

문제점[편집 | 원본 편집]

하지만 호남선은 건설 당시, 한국의 교통 흐름 자체보다, 일제의 일부(조선총독부)로서의 교통 기능(수탈 등의 목적을 포함)이 우선시되었던 탓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문제점이 많다.

대전 접속 문제
원래 호남선은 서울 방향으로 연결되지 않고 부산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 방향의 수송의 거점이 부산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서 호남 지방으로 연결하는 선로로써 지어진 탓이다. 때문에 현대 들어서 오정선(이후 대전선으로 변경, 현재는 호남선의 일부)을 지어 서울 방향으로 직접 연결했고, 그 때문에 대전의 철도역은 대전역서대전역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또, 부산 방향에 붙이기 위해 지형상 덜 문제가 되는 지점을 찾다보니 대전에서 접속하게 되었는데, 당시 대전(회덕)은 조그만 시골이었으나 호남선의 연결 이후 대전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서울과의 교통로에서 대전은 서울과 상당히 먼 지점일뿐만 아니라, 선형 역시 돌아가는 형태로 유지되어 문제를 낳게 된다. 도로의 경우도 호남고속도로가 이런 문제점을 답습했으나, 현재는 논산천안고속도로의 신설로 해결된 반면, 호남고속선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말았다. 해당 항목 참조.
전주 미경유 문제
전주에서의 반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제가 익산(당시 이리)를 선호한 것은 이리의 규모가 엄청 작은 편도 아니었고, 당시 일본인 거주구가 있었던 군산과의 연결도 용이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산의 입구인 전주와 달리 평야 지대에 있어 쌀의 수탈도 쉬웠기 때문. 때문에 전주 방향은 나중에 전라선을 신설하여 해결하게 되었는데, 도시 규모상 호남선이 전주를 통과하지 않게되는 바람에 호남선의 수요가 분산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낳았다.
광주 도심 문제
광주의 경우는 전주처럼 미경유까지는 아니지만, 이 역시 문제가 조금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일부 걸치지만, 외곽지에 해당하는 송정리에서의 접속만이 이루어졌고, 정작 광주는 광주선 같은 지선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이나마도 사실 경전선이 들어가던 것을 이설하면서 지선화한 것. 고속철도 운행 이후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운행[편집 | 원본 편집]

처음부터 서울에서 출발한게[22] 아니라 경부선으로의 접속을 위한 노선이었기 때문에, 현재도 경부선의 상당 구간(약 160 km 상당)을 경유한다. 이 때문에 용량 문제 등이 남아있는 편.

호남선은 호남선 자체의 운행 뿐만 아니라, 전라선의 경유 노선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호남선 열차로 불리는 노선들에 대해서만 기재해둔다.

고속철도[편집 | 원본 편집]

호남고속선 완공 이전 호남선 KTX는 재래선을 경유하여 운행하였다. 2015년 호남고속선 개통 이후 나주~목포 구간을 재래선으로 운행하고 있다. 호남고속선은 대전을 지나가지 않기에 서대전을 경유하는 기존선 열차를 별도로 운행하고 있다. 김제역장성역은 호남고속선 개통 이후 KTX가 정차하지 않았으나, 폐지 4년이 지난 2019년부터 서대전 경유 KTX가 다시 정차하고 있다. 고속선은 호남고속선을 참조하기 바라며, 기존선 경유 열차는 다음과 같다. 운행횟수는 구간운행 열차를 포함한다.

ITX[편집 | 원본 편집]

ITX도시간 철도(Intercity)의 기능을 수행하는 열차로 차량은 ITX-마음ITX-새마을을 사용한다. 정차역은 주요역만을 나열하였으며, 기울임체를 사용한 역은 경부선 구간이다.

  • ITX-마음 (1160): 용산 - 영등포 - 수원 - 천안 - 서대전 - 논산 - 익산 - 김제 - 정읍 - 광주송정 - 나주 - 목포 (1일 2왕복)
  • ITX-새마을 (1060): 용산 - 영등포 - 수원 - 평택 - 천안 - 서대전 - 논산 - 익산 - 김제 - 정읍 - 광주송정 - 나주 - 목포 (1일 2왕복)
  • ITX-새마을 (1070): 용산 - 영등포 - 수원 - 천안 - 서대전 - 논산 - 익산 - 김제 - 정읍 - 광주 (1일 4왕복)

무궁화호[편집 | 원본 편집]

무궁화호지역간 수송(Regional)을 주로 담당하는 열차로, ITX에 더해 더 많은 역을 정차하며 정차역의 패턴은 일정치 않다. 현재 운행되는 호남선 열차는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정차역은 주요역만을 나열하였으며, 기울임체를 사용한 역은 경부선 구간이다. 운행횟수는 구간운행 열차를 포함한다.

  • 무궁화호 (1400): 용산 - 영등포 - 수원 - 평택 - 천안 - 조치원 - 서대전 - 계룡 - 논산 - 익산 - 김제 - 정읍 - 장성 - 광주송정 - 나주 - 무안 - 목포 (1일 5왕복[24])
  • 무궁화호 (1420): 용산 - 영등포 - 수원 - 평택 - 천안 - 조치원 - 서대전 - 계룡 - 논산 - 익산 - 김제 - 정읍 - 장성 - 광주 (1일 5왕복[25])
  • 무궁화호 (1950): (경전선 경유 부전 착발 ←) 광주송정 - 나주 - 함평 - 일로 - 목포 (1일 1왕복)
  • 무궁화호 (1980): 광주 - 광주송정 - 나주 - 함평 - 일로 - 목포 (1일 1왕복)

역 목록[편집 | 원본 편집]

  • : 서대전 경유 KTX, I: ITX-마음 및 ITX-새마을, : 무궁화호
  • ●: 모든 열차 정차, ▲: 일부 열차 정차, : ITX-새마을만 정차, ┃: 모든 열차 통과
km 정거장 연계 노선 소재지
0.0 대전조차장 경부고속선, 경부선 (연결) 대덕구
5.7 서대전 대전선 (연결) 중구
11.8 가수원 서구
17.3 흑석리
25.4 계룡 계룡시
34.7 개태사 논산시
39.6 연산
44.5 부황
50.8 논산
57.5 채운 강경선 (연결)
60.7 강경
66.7 용동 익산시
71.8 함열
81.2 황등
87.9 익산 호남고속선, 전라선, 장항선 (연결)
95.3 부용 김제시
98.5 와룡
105.6 김제
112.4 감곡 정읍시
117.9 신태인
123.5 초강
131.4 정읍 호남고속선 (연결)
137.4 천원
141.6 노령
148.6 백양사 장성군
160.1 안평 장성화물선 (연결)
163.8 장성
174.7 임곡 광산구
181.2 하남
184.0 북송정 북송정삼각선 (연결)
185.7 광주송정 1호선
호남고속선, 경전선 (연결)
195.0 노안 나주시
201.5 나주
208.9 다시
212.1 고막원
218.9 함평 함평군
226.5 무안 무안군
230.3 몽탄
239.9 일로 대불선 (연결)
245.2 임성리 호남고속선, 경전선 (연결) (예정) 목포시
252.5 목포

폐역[편집 | 원본 편집]

지선[편집 | 원본 편집]

경부선 등에 비해서 연선에 산업 시설이 부족하다보니 지선이 많이 적은 편이다.

군부대선
화물선
삼각선

각주

  1. 대전조차장~논산
  2. 철도청(1977). "한국철도사", 제2권. pp.103~104.
  3. 철도청(1977). 상게서. pp.104~105.
  4.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22. 호남철도 관계문건정람. 조회 제137호. 1905년 10월 4일.
  5. 철도청(1977). 상게서. PP.105.
  6. 고종시대사 6집, 광무11년 1월 4일. '大韓湖南鐵道會社總務 徐午淳이 鐵道를 敷設함에 있어서'
  7. '잡록'. "대한자강회월보", 제8호. 1907년 2월 25일. 단, 본문의 번역은 축약으로, 원문을 대략 번역하면 "대한독립의 원인은 호남철도에 있으니, 우리 동포 모두가 힘을 합쳐 준공하여 열강의 비웃음을 이겨내도록 하자" 정도의 뜻이다.
  8. '호남철도부설권 철회'. "국역 매천야록", 제6권.
  9. 매일건설신문 "손길신 前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 제17話 - 호남철도 부설이 대한독립의 시작이 된다", 2019년 3월 26일 보도.[1]
  10. 철도청(1977). 상게서. pp.105~106.
  11. 최혜주 옮김(2019). "군산개항전사".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 pp.30.
  12. 철도청(1977). 상게서. pp.106~107.
  13. 철도청(1992). "한국철도사", 제4권. pp. 94~95.
  14. 교통사편찬위원회(1953). "한국교통동란기". pp.13~21. 표 내용에서 인용.
  15. 철도건설국(1969). "철도건설사". pp.326.
  16. 철도청(1999). "한국철도100년사.". pp.604
  17. "대덕서 260m 터널 무너져 호남선 불통." 경향신문, 1979년 1월 12일 보도.
  18. 철도청(1999). 상게서. pp. 604.
  19. 철도청(1999). 상게서. pp. 956.
  20. "호남선 복선전철 36년만에 완공". 충청투데이, 2004년 3월 23일 보도.[2]
  21. 국토교통부 고시 제2019-173호
  22. 일반적으로 수도와의 연결성을 고려한 철도들은 대부분 수도에서 처음부터 갈라진 방향으로 운행된다. 가령 영국의 경우 글래스고 방면의 서해안본선과 에든버러 방면의 동해안본선의 차이라든지. 프랑스 같은 경우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23. 전구간은 2왕복
  24. 전구간은 2왕복
  25. 전구간은 2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