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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V는 SC 게르마니아(SC Germania von 1887), 함부르크 FC(Hamburger FC 1888), FC 팔케(FC Falke 1906), 세 팀이 합병하여 탄생한 클럽인데, 1887년 9월 29일은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SC 게르마니아의 창단일이며, 정식으로 HSV가 탄생한 날은 1919년 6월 2일이다.<ref>그런데 이런 이상한 논리를 적용할 거라면, SC 게르마니아 역시 1884년에 문을 연 호헨펠트 SC(Hohenfelder SC)와 반츠벡-마리엔탈 SC(Wandsbek-Marienthaler SC)의 합병으로 창립된 구단이니만큼 차라리 1884년을 창단연도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ref> 참고로 함부르크 FC는 1914년 2월 26일, 구단명을 함부르크 SV로 바꾸었으며, 그 명칭을 물려받아 지금의 HSV가 탄생했다. <s>그러나 SC 게르마니아와 FC 팔케가 함부르크 FC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s> 이 세 전신 구단들 가운데 SC 게르마니아와 함부르크 FC는 합병 이전에도 이미 막강한 팀들이었다. 먼저 SC 게르마니아는 함부르크 지역 리그인 함부르크-알토나 챔피언십(Hamburg-Altonaer Meisterschaft)를 5회 제패했고, 1904년에는 독일 챔피언십(Deutsche Meisterschaft) 최종 라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함부르크 FC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SC 빅토리아(SC Victoria)와 빅토리아-함부르크 88(Victoria-Hamburg 88)이라는 이름으로 임시 전시합병을 하여 한때 북독일 챔피언에 등극한 바 있었다.<ref>SC 게르마니아와 함부르크 FC는 독일 축구 협회의 창립 멤버에 속하기도 하였다.</ref> 반면에 FC 팔케는 위의 두 팀과 비교하자면 별로 주목할 만한 클럽은 아니었고 주로 하부 리그에 머물렀다. 비록 창단 첫 해인 1919-20 시즌에는 SC 빅토리아에 밀려 함부르크 리그(Hamburger Liga)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이듬해 북독일 축구연맹의 주도로 창설된 북부 크라이스리가(Norddeutsche Liga Nordkreis)에서는 무패 우승을 거두었고, 이후 남부 크라이스리가 챔피언 하노버 96마저도 제압하면서 마침내 1920-21 시즌, HSV는 첫 북독일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21-22 독일 챔피언십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2년 연속 북독일 챔피언에 등극한 HSV는 독일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여 결승전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1. FC 뉘른베르크]]와의 결승에서 90분 동안 두 팀은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연장전에서도 골든골이 터지지 않자 결국 심판은 어둠을 이유로 경기 시작 189분만에 게임을 취소하였다. 비슷한 상황은 이어진 재경기에서도 반복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재경기에서 양팀은 다시 한 번 1:1로 정규 시간을 마무리하였고, 연장전이 이어지게 되는데, 뉘른베르크 선수들이 계속된 부상과 퇴장으로 더 이상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심판은 다시 한 번 경기를 취소하였다. 결국 그해 독일 챔피언 자리는 1922년 11월, 협회의 연방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뉘른베르크가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협회가 HSV를 챔피언으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후에 HSV 측에서 스스로 자신들이 자격 미달이라며 챔피언 자리를 거부한 것이다. <s>줘도 못 먹냐!</s> 그 결과 1922년 독일 챔피언 자리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22-23 시즌에 HSV는 함부르크 지역의 알스터 크라이스리가(Alsterkreisliga)는 물론이고 북독일 챔피언십마저 제패했으며, 이어서 독일 챔피언십까지 우승하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독일 챔피언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리고 5년 뒤인 1927-28에 HSV는 다시 한 번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서 [[헤르타 BSC]]를 상대로 시작 20분만에 세 골을 넣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자랑한 끝에 5:2 승리를 거두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요컨대 HSV는 창단 초기부터 북독일의 맹주로서 군림했던 것이다. 그 밖에 이 시기에 짚고 넘어갈 만한 사건은 1928년에 있었던 "축구 혁명"(Fußball-Revolution)이었다. 당시 함부르크 지역의 강팀 9곳과 홀슈타인 킬(Holstein Kiel)은 리그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북독일 축구 연맹에 맞서 "10구단의 라운드"(Runde der Zehn)이라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운영했고, 결국 최상위 리그의 개수를 11개에서 6개로 축소한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 특수한 리그에서도 우승은 당연히 9전 8승 1무를 거둔 HSV의 몫이었다. === 나치 집권기부터 분데스리가 출범기까지 (1933-1973) === [[나치]] 집권 이후에도 HSV는 여전히 북독일을 대표하는 팀으로 위용을 떨쳤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떳떳하지 못했다. 다수의 클럽 관계자 및 선수들은 나치당, 나치 돌격대, 혹은 나치 친위대에 가입하였으며, 유대계 인사들은 점차적으로 팀 운영에서 배제되었다. 일부 유대계 구성원들이 기부를 통해 1935년에 구단을 파산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명예회장으로 기리고 있는 고(故) 에밀 마르텐스(Emil Martens) 역시 이 시기 동성애를 이유로 거세당한 바 있었다.<ref>나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정신병자, 동성애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또한 조직적으로 박해하였다.</ref> 한편, 이 시기 도입된 가우리가(Gauliga) 시스템 하에서 HSV는 [[함부르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메클렌부르크]] 지방을 아우르는 노르트마르크 가우리가(Gauliga Nordmark)에 속했다. 이 시기 HSV의 주요 맞수는 함부르크 지역 라이벌인 아임스뷔텔 TV(Eimsbütteler TV)였다. 첫 세 시즌 동안에 HSV는 아임스뷔텔에 밀려 있어야 했고, 1936-37 시즌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다음 시즌에도 HSV가 우승을 거두며 2연패에 성공했지만, 이 시즌에 HSV는 아임스뷔텔과 경기당 득점률까지 따져야 할 만큼 접전을 벌였다. 한편, 노르트마르크 가우리가는 1942년에 함부르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메클렌부르크 각각의 가우리가로 나누어졌고, 1944-45 시즌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가우리가가 폐지되었다. 단, 함부르크에서는 예외적으로 이 때에도 가우리가가 진행되었는데, 당시 HSV는 무패 우승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 축구계에는 오버리가(Oberliga) 체제가 도입되었고, HSV는 1947년 출범한 북부 오버리가(Oberliga Nord)에 속했다.<ref>오늘날에도 오버리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는 독일 축구에서 5부 리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오버리가와는 구분되어야 한다.</ref> 오버리가 체제 하에서 HSV는 리그가 운영된 11번의 시즌 중 10번을 우승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오랜 기간 북독일의 독보적인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단 한 번 우승을 놓친 1953-54 시즌은 HSV 입장에서 매우 쓰라린 실패의 시간이었다. 당시 HSV는 빌리 슈뢰더(Willi Schröder) 영입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승점 4점을 삭감당했고, 심지어 내부의 불화까지 겹치면서 16개 구단 가운데 11위에 그쳤다.<ref>협회의 징계로 인해 HSV는 빌리 슈뢰더를 단 한 경기에서도 기용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시즌 종료 후에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했다.</ref> 특히 이때 아르미니아 하노버(Arminia Hannover)를 상대로 당한 2:10의 패배는 아직까지도 HSV 역사에 유일한 두 자리 수 실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ref>1953-54 시즌 북부 오버리가 우승은 하노버 96에게 돌아갔고, 그해 하노버는 독일 챔피언에 올랐다.</ref> [[파일:Uwe Seeler.jpg|300픽셀|섬네일|왼쪽|HSV의 전설, 우베 젤러]] <s>그러나 자고로 최악은 항상 최고와 함께 오는 법이다.</s> 구단에게는 악몽으로 남아 있는 이 시즌에 공교롭게도 HSV는 불과 16세의 어린 유망주를 발굴하게 되는데, 바로 그가 이후 HSV의 상징이자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전드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우베 젤러]](Uwe Seeler)였다. 마르틴 빌케(Martin Wilke)와 귄터 말만(Günther Mahlmann)이 팀을 맡아 세대교체를 단행했던 이듬해 1954-55 시즌, 젤러는 이미 팀 동료 귄터 슐레겔(Günther Schlegel)과 함께 28골로 북부 오버리가 득점왕에 오르면서 팀에게 또 한 번의 우승 타이틀을 선물하였다. 이후 그는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까지 북부 오버리가에서 9시즌 동안 7차례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으며, 1959-60 시즌에는 [[1. FC 쾰른]]과의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서 동점골과 결승골을 넣으며 팀에 세 번째 독일 챔피언 자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1963년에 분데스리가가 출범한 이후 HSV는 한동안 오버리가 시절의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베 젤러가 30경기 30골로 분데스리가 초대 득점왕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팀은 대체로 리그 중위권 이하에 머물렀고, 심지어 [[SV 베르더 브레멘]](SV Werder Bremen)과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Eintracht Braunschweig)가 1965년과 1967년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더 이상 북독일의 맹주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지경에 놓였다. 심지어 1966-67 시즌에는 14위라는 굴욕적인 순위를 기록하였고, 그나마 1967-68 시즌에는 전년도 [[DFB-포칼]] 준우승에 힘입어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이마저도 AC밀란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또 1968-69 시즌에는 [[UEFA 컵]]의 전신인 인터 시티 페어스 컵(Inter-Cities Fairs Cup) 4강에 올랐으나 리그 일정 탓에 경기를 포기하여 탈락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1972-73 시즌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꺾고 리가포칼(DFB-Ligapokal) 초대 우승팀이 된 것을 제외하고는 1970년대 초반에 팀은 그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1972년에는 레전드 우베 젤러가 은퇴했고 또 한 명의 레전드 게르트 되르펠(Gert Dörfel)이 팀을 떠났으며, 이듬해에는 빌리 슐츠(Willi Schulz)마저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시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될 화려한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시기이기도 했다. 많은 베테랑들이 팀을 떠났으나, 또 그만큼 많은 젊은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으며, 그 중에서 페터 노글리(Peter Nogly), [[만프레트 칼츠]](Manfred Kaltz), 루디 카르구스(Rudi Kargus) 등은 이후 세계적인 선수들로 성장하였다. === 에른스트 하펠과 대성공의 시대 (1973-1987) === HSV의 전성기는 1973년, 페터 크론(Peter Krohn) 당시 신임 회장의 개혁과 함께 시작한다.<ref> 페터 크론은 1922-23 시즌 독일 챔피언십 우승 멤버였던 한스 크론(Hans Krohn)의 아들이었다.</ref><ref>회장(Präsident)은 오늘날의 운영이사회장(Vorstandsvorsitzender)에 해당한다. '회장'이라는 명칭은 1953년부터 1998년까지 사용되었다.</ref> 크론은 음료 회사인 캄파리(Campari)를 팀 최초의 유니폼 스폰서로 유치하였고, 더 많은 관중 유치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팀 매출을 전년도 290만 마르크에서 570만 마르크로 끌어올렸는데, 이러한 개혁은 이후 HSV가 이적 시장에서 계속적으로 지갑을 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1974년에 팀은 호어스트 베르틀(Horst Bertl)과 빌리 라이만(Willi Reimann)을 영입하였는데, 당시 크론 회장은 베르틀의 영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팬들이 선수를 산다"(Fans kaufen Spieler)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티켓 값에 소액의 기부금을 추가하기도 하였다.<s>어디서 더러운 상술을...</s> 1975년, 회장직은 크론에게서 파울 벤티엔(Paul Benthien)으로 넘어갔으나, 1973년부터 감독직을 맡은 쿠노 클뢰처(Kuno Klötzer)는 계속해서 팀을 이끌며 탄탄히 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특히 1975-76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FC 바이언 뮌헨]]과의 DFB-포칼 4강 경기는 아직까지도 역사적인 명경기로 남아 있다. 당시 연장전에서 HSV는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에게 실점을 기록하며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종료를 불과 5분 남기고 페터 노글리가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며 홈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뮌헨에서 열린 재경기 또한 극장이었다. 0:0이 지속되던 82분에 바이언은 페널티킥 찬스를 얻어냈으나 루디 카르구스 골키퍼가 [[게르트 뮐러]](Gerd Müller)의 슛을 막아냈고, 반대로 후반 추가시간에 쿠어트 아이글(Kurt Eigl)이 결승골을 터뜨리며 HSV는 1:0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이어진 결승전에서 HSV는 [[1. FC 카이저슬라우턴]](1. FC Kaiserslautern)을 2:0으로 꺾고 DFB-포칼 우승을 차지했고, [[펠릭스 마가트]](Felix Magath)가 영입된 이듬해에는 벨기에의 [[RSC 안드레흐트]]를 꺾고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을 들어올리며 마침내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파일:HSV-Kevin Keegan.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HSV 시절의 케빈 키건]] 그러나 1977년, 쿠노 클뢰처 감독이 물러나면서 팀은 잠시 위기를 겪게 된다. 비록 [[케빈 키건]](Kevin Keegan)이 영입되기는 하였으나, 1977-78 시즌에 팀은 대외컵과 DFB-포칼에서는 물론이고 리그에서도 10위에 그쳤고, 신임 단장으로 부임한 [[귄터 네처]](Günter Netzer)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진단 하에 악명 높은 브랑코 제베츠(Branko Zebec)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더욱이 그는 팀 내 문제아였던 스트라이커 게오르크 폴커트(Georg Volkert)를 과감하게 내쳤으며, 전 시즌 2부 리그 득점왕 [[호어스트 흐루베쉬]](Horst Hrubesch)를 비롯하여 지미 하트비히(Jimmy Hartwig), 베른트 베마이어(Bernd Wehmeyer) 등을 영입하였는데, 이러한 네처의 판단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1978-79 시즌에 HSV는 [[VfB 슈투트가르트]]를 단 승점 1점 차이로 제치고 역대 네 번째이자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첫 번째로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마지막 경기가 끝난 이후 그야말로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팀의 간판 스타였던 [[케빈 키건|키건]]은 1978년과 1979년에 각각 오스트리아의 [[한스 크랑클]](Hans Krankl)과 바이언 뮌헨 소속의 [[칼-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를 꺾고 [[발롱도르]] 수상자로 선정되어 1977년 2위의 한을 풀었는데, 그 중에서도 1978-79 시즌의 키건은 그야말로 비길 자가 없을 만큼 넘사벽의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네처 체제는 시작부터 화끈했다. 특히 1979년에 파울 벤티엔의 뒤를 이어 회장직에 취임한 볼프강 클라인(Wolfgang Klein)은 네처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는데, 이에 힘입어 네처는 1986년까지 단장으로 재직하며 HSV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어진 1979-80 시즌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즌이었다. 유러피언 컵에서는 노팅엄 포레스트에 패해 준우승을 거두었고, 사흘 뒤에는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승격팀 [[바이어 04 레버쿠젠]](Bayer 04 Leverkusen)에 덜미를 잡히며 단 승점 2점 차이로 바이언 뮌헨에 리그 우승을 내주어야 했다. <s>그야말로 더블 콩을 삶은 것이었고, 이에 실망한 케빈 키건은 쓸쓸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s> 그러나 그 해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었던 유러피언 컵 준결승은 오늘날까지도 팀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차전 원정 경기에서 HSV는 0:2의 완패를 당했으나,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 열린 홈 경기에서 팀은 만프레트 칼츠와 호어스트 흐루베쉬가 각각 2골씩을 터뜨리며 5:1의 대승을 거두었고, 이로써 극적으로 결승에 진출하였다.<ref>당시 결승전이 마드리드에서 열렸던 만큼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서는 이날의 대패가 두고두고 아쉬웠을 것이다.</ref> 이 경기를 두고 네처 단장은 "내가 HSV에서 본 가장 멋지고 훌륭했던 경기"라고 추켜세웠으며,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서독 수상 또한 경기 직후 HSV에 축하 전보를 보냈다. 한편, 이어진 1980-81 시즌에는 제베츠 감독이 알콜 중독을 이유로 12월에 불명예 퇴진하였으며, 팀도 2년 연속으로 바이언 뮌헨에 밀려 리그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이 시즌이 종료된 후에 팀이 지금까지 구단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받는 [[에른스트 하펠]](Ernst Happel)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HSV는 하펠의 지도 하에서 1981년부터 1987년까지 국내적으로 2번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2번의 준우승, 그리고 DFB-포칼 1회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UEFA 컵과 유러피언 컵에서 각각 준우승과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니까 1970년대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가 FC 바이언 뮌헨의 적수로 활약했다면, 1980년대에는 에른스트 하펠이 이끄는 HSV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분데스리가의 양강 체제를 이끌었던 것이다. [[파일:1983 European Cup.jpg|300픽셀|섬네일|왼쪽|유러피언 컵을 제패하고 함부르크에 돌아온 호어스트 흐루베쉬와 에른스트 하펠 감독이 함께 빅이어를 들어올리며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하펠의 첫 해였던 1981-82 시즌에 팀은 1978-79 시즌에 이어 두 번째 분데스리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동시에 UEFA 컵에서 준우승을 거두었다. 특히 비록 UEFA 컵 결승에서 IFK 괴테보리(FK Göteborg)에 1·2차전을 모두 내주며 무너졌지만, 리그에서는 1982년 1월 16일 이후 단 한 경기도 패하지 않으며 1. FC 쾰른을 꺾고 왕좌에 올랐고, 이 무패 기록은 1982-83 시즌까지 이어져 1983년 1월 29일까지 팀은 총 36경기 연속 무패의 대기록을 수립하였다.<ref>이 기록은 30년만인 2013년, 마침내 FC 바이언 뮌헨에 의해 경신되었다.</ref> 그리하여 HSV는 1982-83 시즌에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을 골득실 차이로 밀어내고 리그 2연패를 일구어냈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미셸 플라티니]]와 다수의 1982 스페인 월드컵 우승 멤버들로 포진한 [[유벤투스 FC]]를 1:0으로 꺾고 마침내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이는 아직까지도 구단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성취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에 우주의 기운을 몽땅 끌어다 쓴 탓인지 이후 HSV는 두 번 다시는 이때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83-84 시즌에 팀은 인터컨티넨탈 컵과 UEFA 슈퍼컵을 포함하여 총 5개 대회에 나갔으나, 벨기에로 떠난 간판 스트라이커 호어스트 흐루베쉬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면서 무관에 그쳤다.<ref>1983-84 시즌 분데스리가는 우승팀 VfB 슈투트가르트와 함부르크 SV,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까지 총 세 팀이 나란히 승점 48점을 거둘 만큼 박빙이었다. 더욱이 4위 FC 바이언 뮌헨은 47점, 5위 SV 베르더 브레멘은 45점이었으니 무려 다섯 팀이 불과 한 경기 안쪽의 승점 차이를 보이며 경쟁했던 셈이다.</ref> 그리고 이후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고, 1986-87 시즌 DFB-포칼 우승을 끝으로 HSV의 화려했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 무관의 시대와 중흥을 위한 노력 (1987-2009) === 1986년 귄터 네처 단장에 이어 1987년에 볼프강 클라인 회장과 에른스트 하펠 감독마저 떠나면서 HSV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1987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7명의 회장과 8명의 감독들이 팀을 거쳐갔다. 안정감이 부족하기는 선수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활을 위해 팀은 계속해서 이적시장을 두드렸지만, 그 결과는 보잘 것이 없었다. 가령 1987년에는 골키퍼 믈라덴 프랄리야(Mladen Pralija)를 영입했으나 불과 1년만에 다시 팀을 떠났고, 1988년에는 11명의 선수들이 합류했으나 얀 푸르톡(Jan Furtok) 정도만이 성공적인 영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구단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성적 또한 당연히 바닥을 쳤다. 1986-87 시즌에 팀은 준우승을 기록했으나, 다음 시즌에는 곧바로 6위로 추락했고, 이듬해 잠시 4위로 반등하기도 했지만 1989-90 시즌에는 11위로 추락했다. 1990-91 시즌에는 신입생 [[토마스 돌]](Thomas Doll)과 프랑크 로데(Frank Rohde)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5위까지 올라갔으나, 이때를 제외하면 1989-90 시즌부터 6년 동안 팀은 매년 10위권 바깥을 맴돌았다.<ref>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토마스 돌은 한 시즌만인 1991년 여름에 AS 로마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돌은 역대 레코드인 1,700만 마르크의 이적료를 남겼는데, 이 거금은 팀이 경제적으로 회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ref> 마찬가지로도 대외적으로도 1989-90 시즌 UEFA 컵 8강이 이 기간 동안에 그나마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물론 긍정적인 신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레전드 [[우베 젤러]]가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팀은 채무를 청산하고 5백만 마르크의 예비금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그해 10월 베노 묄만(Benno Möhlmann)의 후임으로 취임한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팀을 리그 5위 자리에 올려 놓음으로써 수년 만에 UEFA 컵 출전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HSV가 긍정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이어진 1996-97 시즌에 마가트는 UEFA 컵 8강과 DFB-포칼 4강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의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 절치부심한 HSV는 1997년 여름, 프랑크 파겔스도르프(Frank Pagelsdorf)를 새로 감독으로 선임하고 이적 시장에서 7백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투자하며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 21라운드까지 팀은 5승 5무 11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한때 리그 꼴찌까지 추락했다가 막판 뒷심으로 간신히 9위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1999-2000 시즌에 13년 만의 최고 성적인 리그 3위를 기록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확보하기도 했으나, 그때를 제외하면 파겔스도르프와 함께한 4년 동안 팀은 전반적으로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뒤를 이은 쿠어트 야라(Kurt Jara) 역시 별다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파일:Hoffmann und Beiersdorfer.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좌)와 베른트 호프만(우)]] HSV의 중흥은 2002-03 시즌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즌에 팀은 분데스리가를 4위라는 호성적으로 마무리지었으며, 이어진 DFB-리가포칼에서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4:2로 꺾고 1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이때 있었던 운영진의 변화였는데, 2002년 8월, 1986-87 DFB-포칼 우승 멤버였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Dietmar Beiersdorfer)가 단장으로 팀에 돌아왔으며, 2003년 2월에는 베른트 호프만(Bernd Hoffmann)이 새로 운영이사회장에 선출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이 함께 일했던 2009년까지를 HSV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먼저 호프만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HSV의 재정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바이어스도르퍼는 그 돈으로 다수의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이 다시 분데스리가의 강호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다. 클라우스 토프묄러(Klaus Toppmöller) 감독이 팀을 이끈 2003-04 시즌에 이어 토마스 돌(Thomas Doll)이 지휘봉을 잡은 2004-05 시즌에도 HSV는 8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에 그쳤다. 당시 수비 쪽에서는 새로 영입된 [[다니엘 반 바이텐]](Daniel van Buyten)과 [[칼리트 불라루즈]](Khalid Boulahrouz)가 눈부신 활약을 펼쳐주었으나, 반대로 공격 쪽에서는 야심차게 데려온 벤야민 라우트(Benjamin Lauth)가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리면서 아쉬움을 남겼다.<ref>그해 DFB-포칼에서는 문제적인 사건이 있었다. 1라운드에서 HSV는 북부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 Nord) 소속의 [[SC 파더보른 07]](SC Paderborn 07)에 4:2로 충격패를 당했는데, 당시 심판이었던 로베르트 호이처(Robert Hoyzer)는 음펜자에게 납득할 수 없는 퇴장을 명령하고 파더보른에 두 차례 페널티킥을 주는 등 노골적으로 HSV에 불리한 편파 판정을 내렸다. 수사 결과 이 경기를 포함하여 DFB-포칼 및 하부 리그 일부 경기에서 크로아티아 마피아가 개입한 승부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이는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독일 축구계에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한편, 독일 축구협회는 이후 사과의 의미로 HSV에 50만 유로의 보상금을 주었고 폴크스파크 슈타디온에서 국가대표 경기를 치러주기로 약속하였다.</ref> <s>함께 영입된 에밀 음펜자(Emile Mpenza)에 대해서는 그냥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s> 그러나 이어진 2005년 여름, HSV는 [[AFC 아약스]]의 영스타 [[라파엘 반 더 바르트]](Rafael van der Vaart)와 <s>흥부자</s> 티모시 아투바(Thimothée Atouba), 그리고 만능 수비 자원 기 데멜(Guy Demel) 등을 영입하며 탄탄한 전력 보강을 이루었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UEFA 인터토토 컵 우승자 자격으로 [[UEFA 컵]]에 진출한 HSV는 오랜만에 8강이라는 호성적을 거두었고, 분데스리가에서는 6년 만의 최고 성적인 3위에 올랐다. 특히 [[다니엘 반 바이텐|반 바이텐]]과 [[칼리트 불라루즈|불라루즈]]가 중심이 되고 라이트백으로 변신한 [[메흐디 마다비키아]](Mehdi Mahdavikia)와 왼쪽의 [[티모시 아투바|아투바]]가 버티는 포백 라인은 리그 최소 실점인 30골만 허용하며 최고의 짠물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회 뒤에는 위기가 따라오는 법이다. 시즌이 끝나자 수비의 버팀목이었던 [[다니엘 반 바이텐|반 바이텐]]과 [[칼리트 불라루즈|불라루즈]]가 나란히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과 [[첼시 FC]]로 이적했고, 공격진을 먹여 살리던 노장 [[세르게이 바르바레스]](Sergej Barbarez) 또한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났다. 물론 거액의 이적료를 챙긴 팀은 곧바로 당대 최고의 수비 유망주로 손뽑히던 [[뱅상 콤파니]](Vincent Kompany)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후안 파블로 소린]](Juan Pablo Sorin)을 비롯하여 공수에서 여러 선수들을 영입하였으나, [[요리스 마타이센]](Joris Mathijsen)을 제외한 나머지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 결과 팀은 챔스 광탈과 더불어 리그에서도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당연히 감독 교체였다. 19라운드를 끝으로 [[토마스 돌]] 감독은 경질되었고, 네덜란드 출신의 [[휩 스테벤스]](Huub Stevens)가 선임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기적적인 반전이 시작되었다. 단 1승 12무 6패로 꼴찌던 달리던 HSV는 15경기에서 9승을 챙기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7위로 시즌을 마무리하였고, 반전의 주역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는 곧 강팀들의 위시 리스트에 올랐다. <s>그리고 그의 징징거림 또한 본격화되기에 이르는데...</s> [[파일:VdV.jpg|300픽셀|섬네일|왼쪽|이랬던 반 더 바르트는 발렌시아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어진 2007-08 시즌에도 스테벤스 감독의 지도력은 빛을 발했다.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가 여전히 폭발적인 활약을 이어가는 가운데, 4-4-2에서 4-2-3-1로 포메이션을 바꾼 이후 [[다비트 야롤림]](David Jarolim)과 [[나이젤 데 용]](Nigel de Jong)이 3선에서 [[안드레아 피를로|피를로]]-[[젠나로 가투소|가투소]]를 연상케 하는 환상의 하모니를 자랑하였고 팀은 한때 리그 2위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다.<ref>국내 팬들 사이에서 야롤림과 데 용은 야를로와 데축소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ref> 그러나 막판 뒷심 부족으로 팀은 4위로 밀리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였고, 시즌 종료와 함께 계약이 만료된 [[휩 스테벤스|스테벤스]] 감독은 [[크론병]]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보살피고자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말았다. 스테벤스 감독이 떠나고, <s>불과 일 년 전에 그 유니폼까지 들어 보이며 [[발렌시아 CF|발렌시아]] 사랑을 숨기지 않았던</s> 주장 반 더 바르트마저도 <s>발렌시아가 아닌</s>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스테벤스의 후임으로 취임한 [[마틴 욜]](Martin Jol)은 그러한 우려 속에서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기존 선수들과 신입생들이 골고루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가운데 팀은 리그와 [[UEFA 컵]], 그리고 [[DFB-포칼]]까지 세 개 대회에서 모두 쾌조의 성적을 보이며 사상 최초로 한 시즌 3개 메이저 대회 제패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s>단, 신입생 중 [[치아구 네베스]](Thiago Neves)는 음펜자와 같은 이유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s> 그러나 또 다시 부족한 뒷심을 보이며 HSV는 막판 세 대회 모두에서 라이벌 [[SV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결국 UEFA컵과 DFB-포칼 4강, 그리고 리그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 HSV의 몰락과 <i>HSVPlus</i> (2009-2014) === HSV의 몰락은 지도부의 내분과 함께 시작하였다. 베른트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의 독단적인 구단 운영에 불만을 품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단장과 [[마틴 욜]] 감독이 나란히 팀을 떠난 것이다. 결국 단장 자리는 한 시즌 내내 공석으로 남았고, 감독으로는 [[브루노 라바디아]](Bruno Labbadia)가 선임되었으나, 라바디아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젊은 감독에 불과했으며, 특히 바로 전 시즌에도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에서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며 경질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10 시즌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공격의 핵인 [[이비차 올리치]](Ivica Olić)가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으로 이적하기는 했으나, 여름 동안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투자한 HSV의 선수층은 여전히 화려했고, <s>그러나 마커스 베리에 대해서만큼은 별로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s> 7라운드까지 팀은 무패로 리그 선두를 질주했다. 그러나 전반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헤어날 수 없는 부진이 시작되었고, 결국 HSV는 시즌을 7위로 마감하며 6년 만에 대외컵 진출에 실패하였다. 또한 [[UEFA 유로파 리그]]에서도 결승전이 홈 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만큼 많은 팬들의 기대를 끌어모았으나, 4강에서 [[풀럼 FC]](Fulham FC)에 패하며 탈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실망스러운 행보 속에서 당연하게도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는 시즌 중에 경질되었다. 이처럼 실망스런 한 해를 보낸 HSV에서는 이사진에서부터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독단적 판단과 투명성 부족한 경영으로 팀의 위기를 초래한 베른트 호프만 운영이사회장은 거센 내부적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석이던 단장 자리에는 [[바스티안 라인하르트]](Bastian Reinhard)가 새로 부임했으며, 감독으로는 2006-07 시즌 [[VfB 슈투트가르트]]의 우승을 견인했던 [[아어민 페]](Armin Veh)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이제 막 선수 생활을 마친 초짜였으며, 페 역시 최근 두 시즌 동안 [[VfB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와 [[VfL 볼프스부르크|볼프스부르크]]에서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전히 불안 요소는 남아 있었다. 한편, 동시에 이 무렵은 세계적인 운송회사 <i>퀴네+나겔</i>(Kühne + Nagel)의 회장인 억만장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Klaus-Michael Kühne)가 본격적으로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HSV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시점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HSV의 팬이었던 그는 2010년, 총 1,250만 유로의 금액을 투자하여 [[마르첼 얀젠]](Marcell Jansen), [[파올로 게레로]](Paolo Guerrero), [[데니스 아오고]](Dennis Aogo), [[하이코 베스터만]](Heiko Westermann), [[데니스 디크마이어]](Dennis Diekmeier) 등 일부 선수들의 지분 1/3을 사들였다. 비록 당시 퀴네는 자신은 그저 팀을 도우려는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이렇게 시작된 그와의 관계는 훗날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오게 된다. 성적 부진은 2010-11 시즌에도 이어졌다.<ref>이 시즌은 U-19 팀에서 활약하던 손흥민이 처음 1군에 올라와 프로 무대에 데뷔한 시즌이기도 하다.</ref> 전술한 [[하이코 베스터만|베스터만]]과 [[데니스 디크마이어|디크마이어]]에 강등된 [[헤르타 BSC]]의 주축이었던 [[야로슬라프 드로브니]](Jaroslav Drobný)와 [[고이코 카차르]](Gojko Kacar) 등에 이르기까지 착실한 선수 보강을 이루었으나, 정작 성적은 여전히 중위권을 맴돌았고, 특히 수비 쪽에서는 줄부상이 이어지며 중앙 미드필더인 카차르가 센터백으로 출전하는 상황까지도 자주 연출되었다. 결국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 하에서 [[아어민 페]]는 2011년 3월 13일,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에 0:6으로 참패한 후 조기 경질되었고, 수석코치였던 [[미하엘 외닝]](Michael Oenning)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또한 3일 뒤에는 맹렬한 비판에 시달리던 베른트 호프만이 퇴진하고 감독위원회 소속이던 칼-에드가 야르호프(Carl-Edgar Jarchow)가 신임 운영이사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리하자면, 2010-11 시즌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고, HSV는 8위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또 다시 대외컵 진출에 실패했다. 그해 재정 손실은 거의 5백만 유로에 근접했다. [[파일:Frank Arnesen.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HSV 몰락의 원흉이 된 프랑크 아르네센]] [[프랑크 아르네센]](Frank Arnesen)은 이렇게 무너져 가던 HSV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수렁 속에 완전히 가두어 버린 인물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적시장에서 막대한 금액을 쏟아붓고, 그 과정에서 기업가 퀴네까지 끌어들여야 했던 HSV는 정상적인 팀 운영을 위해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이에 2011년 2월, 과거 [[첼시 FC]]에서 유소년 정책을 담당했던 아르네센을 다음 시즌 단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유망주 육성을 통한 구단 건전성 회복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아르네센이 제1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물론 세대교체였다. 그는 이를 위해 주전과 비주전을 막론하고 고액 주급을 받던 다수의 베테랑들을 거침없이 내보냈는데, 그 결과 [[프랑크 로스트]], [[기 데멜]], [[뤼트 판 니스텔로이]], [[제 호베르투]] 등이 자유 계약으로 팀을 떠났고, 수비의 구심점이었던 [[요리스 마타이센]] 역시 175만 유로라는 헐값에 [[말라가 CF]]로 이적했다. 또한 [[에릭 막심 추포-모팅]](Eric Maxim Choupo-Moting)을 비롯해 기대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던 유망주들도 대거 팀을 떠나야 했으며, 이러한 공백은 모조리 [[첼시 FC|첼시]]에서 영입된 유망주들로 채워졌다. [[마이클 만시엔]](Michael Mancienne), [[괴칸 퇴레]](Gökhan Töre), [[야코포 살라]](Jacopo Sala), 그리고 임대생인 [[제프리 브루마]](Jeffrey Bruma)와 8월 말에 뒤늦게 합류한 [[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c)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명의 첼시 유망주들이 이 시기 HSV의 유니폼을 입었다.<ref>더욱이 아르네센은 단장 재직 당시 선수 영입 과정에서 뒷돈을 챙기면서 팀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카더라 소식통으로 알고 있을 뿐, 정확히 확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본문에 적지 않았다.</ref> 그러나 2011-12 시즌이 시작되자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첼시에서 온 유망주들은 시즌 초반부터 파격적일 만큼 전폭적인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정작 그에 걸맞는 활약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마이클 만시엔|만시엔]]과 [[제프리 브루마|브루마]]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비력을 과시하며 순식간에 팬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팀 순위는 문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6라운드까지 팀은 1무 5패라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하며 꼴찌에 머물렀고, [[미하엘 외닝|외닝]] 감독은 경질되었다.<ref>외닝은 HSV 감독으로서 리그에서 14전 1승 6무 7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이후 4년 반 동안 그 어떤 팀의 부름도 받지 못한 채 전설(?)로 남았다. 참고로 그가 거둔 1승은 감독 데뷔전인 쾰른과의 홈 경기였다. 즉, 그는 이후 13전 연속 무승을 기록했던 것이다.</ref> 이후 소방수로 선임된 [[토어스텐 핑크]](Thorsten Fink) 감독 하에서 HSV는 15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하기는 했으나, 이는 분데스리가 역사상 팀이 기록한 최악의 성적에 해당했다. 더욱이 팀은 벌써 세 시즌째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으며, 부채는 이제 무려 2,800만 유로에 육박했다. 2012-13 시즌에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DFB-포칼]]에서는 1라운드에서부터 3부 리그 소속의 [[칼스루헤 SC]](Karlsruher SC)에 2:4로 패하며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첫 경기부터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에 홈에서 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시 클라우스-미하엘 퀴네였다. 팀은 그의 투자에 힘입어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를 1,300만 유로에 다시 데려왔으며, <s>또 너냐...</s> 그밖에도 [[밀란 바델리]](Milan Badelj), [[페트르 이라첵]](Petr Jirácek)을 이적시장 마감 직전에 영입하였다. 리빌딩을 하고자 공격적으로 투자를 했지만 오히려 성적이 추락하면서 결국 더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름 이적시장에서 2,05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승점 3점 차이로 7위에 머무르며 또 다시 유로파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s>사실 이마저도 골키퍼 [[레네 아들러]](René Adler)의 갓들러 모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성적이었다.</s> 당연히 사태의 원흉이었던 프랑크 아르네센 단장은 해임되었고, 부채는 6천만 유로 가까이 치솟았다. 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단순 투자자로 남겠다던 퀴네는 2012년 여름에 이미 독자적으로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 영입을 추진했던 데 이어 2013년에도 [[토어스텐 핑크|핑크]] 감독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이사회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펠릭스 마가트]]와 접촉하는 등 점차 노골적으로 구단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가 이끄는 운영이사회는 그런 퀴네의 입김에 끌려다니며 우왕좌왕했고, 신중한 재정 관리와 장기적인 관점을 모토로 내걸었으나,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아르네센의 후임으로는 [[올리버 크로이처]](Oliver Kreuzer)가 새로운 단장으로 선임되었으나, 부족한 경력 탓에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2013-14 시즌은 출반부터 삐걱거렸다. 시즌 5라운드가 종료된 상황에서 구단은 15위까지 떨어졌고, [[토어스텐 핑크|핑크]] 감독은 야심차게 데려온 애재자 [[자크 주아]](Jacques Zoua)를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퀴네가 염원하던 대로 경질되었으며, 약 일주일 뒤에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준우승에 올려놓았던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Bert van Marwijk)가 새 감독으로 팀에 합류했다. 반 마르바이크의 지도 하에 HSV에는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났다. U-19 팀에서 콜업된 [[요나탄 타]](Jonathan Tah)가 단숨에 주전 센터백으로 발돋움했으며, 신입생 [[피에르-미헬 라조가]](Pierre-Michel Lasogga)와 임대에서 복귀한 [[하칸 찰하놀루]](Hakan Çalhanoğlu)가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요나탄 타|타]]는 전반기 이후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2군으로 내려갔고, [[막시밀리안 바이스터]](Maximilian Beister)와 [[슬로보단 라이코비치]](Slobodan Rajković)가 십자인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등 스쿼드 전체에 부상이 들끓은 결과 성적은 수직하락했다. 특히 20라운드 [[헤르타 BSC]]와의 홈 경기에서는 0:3의 스코어로 역사적인 6연패를 기록하자 분노한 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당시 주차장에 모인 300여명의 팬들은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야르호프 운영이사회장과 크로이처 단장, 그리고 선수들이 직접 나서서 팬들을 진정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계란과 쓰레기만 날아올 뿐이었다.<ref>빌트(Bild)지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주아는 팬이 던진 무엇인가에 맞고 울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벤피카에서 임대되어 온 [[올라 존]](Ola John)은 <s>눈치 없이</s> 차를 타고 유유히 떠나려다 팬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ref> 이에 감독이사회는 이튿날 비공개 긴급 대책 회의를 열어 현 운영이사회와 감독의 신임 여부에 대해 토의를 벌였고, 비록 당장에는 재신임이 결정되었으나, 이어진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과의 [[DFB-포칼]] 4강전과 리그 21라운드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원정에서 모두 패하자 [[베르트 반 마르바이크]] 감독은 마침내 경질되었다. 당시 언론들은 이때를 구단 역사상 최악의 위기로 일컬었다. 반 마르바이크 경질 직후 HSV는 발 빠르게 [[하노버 96]]에서 해임된 [[미르코 슬롬카]](Mirko Slomka)를 그 후임으로 선임하였다. 비록 첫 경기에서 슬롬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홈에서 3:0 완승을 거두며 산뜻한 출발을 했지만, 30라운드부터는 선수단의 줄부상 속에 마지막 다섯 경기를 모두 패하며 27점으로 16위를 기록했고, 팀은 가까스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ref>29라운드가 끝난 상황에서 강등권인 17위 뉘른베르크는 26점, 브라운슈바이크는 25점으로 승점 차이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으나, 남은 다섯 경기를 세 팀이 나란히 모두 전패로 기록하면서 극적으로 HSV는 16위를 유지하였다.</ref> 다행히 여기에서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의 득점에 힘입어 팀은 원정 팀 다득점 원칙에 따라 [[SpVgg 그로이터 퓌어트]](SpVgg Greuther Fürth)를 꺾고 분데스리가에 잔류할 수 있었지만, 그 시즌 HSV의 승점이었던 27점은 승리팀이 승점 3점을 차지하는 규정이 도입된 이래 분데스리가에서 잔류한 구단이 확보했던 가장 낮은 점수에 해당했다. [[파일:Rickhoff.jpg|300픽셀|섬네일|왼쪽|HSVPlus를 발의한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 이처럼 HSV에게 2013-14 시즌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기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개혁의 시기이기도 했다. 2013년 9월,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Ernst-Otto Rickhoff) 전 감독이사회장은 <i>HSVPlus</i>라는 급진적인 개혁안을 발의했는데, 이는 프로 축구 분과를 전체 법인에서 독립된 주식회사로 스핀오프함으로써 구단 운영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제고하고, 동시에 총회의 동의 없이도 25% 미만에 해당하는 주식회사의 지분을 판매함으로써 부족한 자금을 유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물론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위르겐 훈케(Jürgen Hunke) 전 회장, 레전드 [[만프레트 칼츠]] 등 구단 내외의 일부 저명인사들은 이를 전통을 무시하고 영혼을 파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는데, 사실 이와 같은 비판에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다. <i>HSVPlus</i> 그 자체는 상당히 획기적인 대안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다름 아닌 클라우스-미하엘 퀴네가 있었고, 이들 반대자들은 바로 이 퀴네에 의해 구단이 좌지우지되는 비극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4년 1월 기준으로 법인의 부채가 무려 1억 유로에 육박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다수는 <i>HSVPlus</i>를 지지하였다. <s>못 먹어도 일단 고!</s> 결국 7,134명이 참가한 2014년 1월 19일의 정기 총회 표결에서 79.4%의 동의를 받아 운영이사회는 향후 <i>HSVPlus</i>의 실행을 위한 준비 과정을 위임받게 되었으며, 이어진 5월 25일의 총회에서 <i>HSVPlus</i>는 9,702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86.9%의 지지를 받아 최종 통과되었다. <ref>1월 총회 당시 HSVPlus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이를 좌절시키기 위해 보다 온건한 대안적 개혁 모델로서 "전통과 함께하는 미래"(Zukunft mit Tradition", "라우테의 심장"(Rautenherz) 등을 제안하였으나 실패하였고, 5월 총회를 앞두고는 이들 반(反) HSVPlus 세력들이 위르겐 훈케 전 회장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HSV 알리안츠"(HSV-Allianz)라는 또 다른 개혁안을 추진한 바 있었다.</ref> 이 개혁의 결과 프로 축구 분과는 HSV 전체 법인을 최대 주주로 하는 HSV 축구 주식회사(HSV Fußball AG)로 독립하였고, 이와 동시에 기존의 운영이사회는 해임되었다. 칼-에드가 야르호프를 대신할 새 운영이사회장으로는 2000년대 단장으로서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가 선출되었고, 페터 크내벨(Peter Knäbel)이 새 단장으로 임명되어 올리버 크로이처의 자리를 대신했다. 또한 유소년 정책을 담당할 '스포츠 관리자'(Direktor Sport)라는 새로운 직책에는 베른하르트 페터스(Bernhard Peters)가 임명되었다. 한편, 감독이사회장으로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칼 게르난트(Karl Gernandt)가 이름을 올렸는데, 그는 <i>퀴네+나겔</i> 사의 행정이사회(Verwaltungsrat) 회장직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퀴네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로써 HSV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 <i>HSVPlus</i> 이후의 HSV (2014-현재) ===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바이어스도르퍼]]를 주축으로 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린 HSV는 매우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였다. 비록 [[하칸 찰하놀루|찰하놀루]]의 이적은 뼈아픈 손실이었으나, 팀은 3천만 유로가 넘는 거액을 쏟아부으며 [[발론 베라미]](Valon Behrami), [[루이스 홀트비]](Lewis Holtby)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이러한 빅사이닝을 토대로 스쿼드를 대대적으로 보강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15 시즌은 시작부터 불안 요소를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신임 운영이사회장이 처음부터 [[미르코 슬롬카]] 감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때문에 프리 시즌 때부터 경질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첫 세 경기에서 겨우 승점 1점밖에 챙기지 못하자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슬롬카는 조기에 경질되었고, 여러 유명한 이름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팀은 결국 2군을 이끌던 무명의 [[요제프 친바우어]](Josef Zinnbauer)를 1군 감독에 임명했다.<ref>이는 HSV 2군이 8전 8승을 거두며 북부 레기오날리가에서 압도적인 1위를 질주한 결과였다.</ref><ref>흔히 줄여서 '조 친바우어'(Joe Zinnbauer)라고 부른다.</ref>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친바우어는 짧은 시간에 수비를 안정화시키며 나쁘지 않은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격이었다. 수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가 침묵하는 가운데 득점력은 바닥을 찍었고, 팀은 전반기 단 19골을 내주며 리그 최소 실점 4위를 기록해놓고도 득점에서 9골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하며 중간 순위 14위에 머물렀다.<ref>당시 최소 득점 2위 팀은 17골을 넣은 SC 프라이부르크와 1. FC 쾰른으로 HSV보다 거의 2배의 득점을 기록했다.</ref> 이에 팀은 겨울에 노장 공격수 [[이비차 올리치]]를 5년 반 만에 재영입함으로써 변화를 꾀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거기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까지 겹치면서 20라운드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언]] 원정에서 0:8이라는 재앙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초짜 감독은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HSV는 바이언 전을 시작으로 6경기 동안 2무 4패로 부진하였고, [[요제프 친바우어|친바우어]]는 해임되었다.<ref>그러나 HSV에 재직하는 동안 친바우어는 팬들의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시즌 종료 후에 다시 2군 감독으로 팀에 복귀하였다. 이후 스위스 리그의 FC 장크트 갈렌(FC St. Gallen)으로 떠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에 대한 HSV 팬들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ref> [[파일:Klassenerhalt.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잔류의 기쁨에 <s>미쳐 날뛰는</s> HSV 선수 및 관계자들]] 친바우어에 이어 지휘봉을 잡은 인물은 다름 아닌 [[브루노 라바디아]]였다. HSV 행이 유력했던 [[토마스 투헬]](Thomas Tuchel) 감독이 막판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행선지를 바꾸면서 2009-10 시즌에 이미 팀을 이끈 바 있었던 라바디아가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과의 친분에 힘입어 다시 소방수로 HSV에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라바디아의 복귀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팬들의 머릿속에는 2009-10 시즌의 악몽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이후에도 라바디아는 [[VfB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감독으로서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라바디아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일구어냈다. 측면 공격력이 살아나면서 득점이 물꼬를 틀었고, <s>실점도 물꼬를 틀었다는 것은 함정이다.</s> [[고이코 카차르]]의 부활에 힘입어 남은 여섯 경기를 3승 1무 2패로 마친 결과 팀은 꼴찌에서 16위로 올라서며 극적으로 다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칼스루헤 SC|칼스루헤]]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1차전에서 무승부를 거둔 데 이어 원정에서의 2차전에서 0:1로 끌려가며 팀은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으나, 후반 추가 시간에 [[마르셀로 디아스]](Marcelo Diaz)가 천금 같은 프리킥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연장전에서 <s>시즌 내내 계륵이었던</s>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가 역전골 <s>혹은 속죄골</s>을 터뜨리며 다시 한 번 잔류에 성공한 것이다.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첫 해에 쓰라린 실패를 겪자 팀은 대대적으로 선수단 체질 개선에 나섰다. 노쇠화가 두드러진 <s>그 놈의 지긋지긋한</s> [[라파엘 반 더 바르트|반 더 바르트]]와 [[하이코 베스터만|베스터만]]을 비롯하여 고액 주급자들이 대거 방출되었고, 그 자리는 유망주와 알짜 영입으로 채워졌다. 대형 영입이라고는 [[알빈 에크달]](Albin Ekdal)과 [[아론 헌트]](Aaron Hunt)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2015-16 시즌은 적어도 초반에는 긍정적이었다. [[레네 아들러]] 골키퍼의 선방과 새로 영입된 베테랑 센터백 [[에미르 스파히치]](Emir Spahić)의 안정된 수비, 나아가 살아난 [[피에르-미헬 라조가|라조가]]의 득점력에 힘입어 팀은 한때 대외컵 진출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불안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브루노 라바디아|라바디아]] 감독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정말 사람만 좋아서 선수단 관리자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했고,<ref>대표적으로 다혈질로 유명한 에미르 스파히치는 여러 차례 동료 선수들에 대한 욕설 및 폭력 행사로 구설수에 올랐으나, 라바디아 감독과 구단 측은 그를 두둔하며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스파히치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았다.</ref> 전술가로서의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s>[[마티아스 오스트르촐렉]](Matthias Ostrzolek)으로 대변되는</s>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과 무색무취의 롱볼 축구로 비난을 받았다. 거기다가 최전방 공격수들의 연이은 부진까지 겹치면서 시즌 막판에는 한때 다시 잔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s>드디어 각성한 초사이언</s> [[니콜라이 뮐러]](Nicolai Müller)의 활약에 힘입어 10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기는 했으나, 내용적으로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파일:Kuehne.jpg|300픽셀|섬네일|왼쪽|후원자인 듯 후원자 아닌 후원자 같은 그 남자,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축구 외적인 문제는 보다 명확했다. 야심차게 시작된 <i>HSVPlus</i>는 그 발의자였던 에른스트-오토 리크호프가 스스로 "<i>HSVPlus</i>는 죽었다"(HSVPlus ist tot)라고 선언할 만큼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ref>리크호프의 <i>HSVPlus</i> 비판은 다음의 칼럼을 참고할 것. http://www.goal.com/de/news/1025/kolumne/2015/10/06/16057762/jovanovs-hsv-vom-kurs-abgekommen</ref> 리크호프가 바랐던 <i>HSVPlus</i>의 목적은 지분 판매로 확보한 자금으로 빚을 갚아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면서 유망주에 투자하여 팀을 장기적으로 쇄신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이상은 철저히 실패했다. [[디트마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그 자금을 빚을 갚거나 유망주를 육성하는 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이적시장에 투자함으로써 강력한 선수단을 바탕으로 성적을 끌어올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입된 선수들의 활약은 대부분 기대 이하였고, 성적은 여전히 강등을 걱정해야 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팀은 또 다시 부채를 끌어와 이적시장에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구단은 HSV 축구 주식회사 출범 이후 무려 약 6천만 유로를 선수영입에 사용했음에도 재정난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악순환 속에서 퀴네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커질 뿐이었다.<ref>특히 2016년 여름, 퀴네는 최대 5천만 유로의 추가적인 대부를 약속하는 대신 개인 고문으로 폴커 슈트루트(Volker Struth)를 두고 선수를 영입할 때 팀이 자신과 사전에 논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퀴네의 지인으로서 과거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단장이었던 라이너 칼문트(Reiner Calmund)는 향후 HSV는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 겸 단장, 브루노 라바디아 감독, 클라우스-미하엘 퀴네, 폴커 슈트루트가 만장일치로 합의를 할 경우에만 선수영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ref> 결국 그 책임은 페터 크내벨 단장의 해임으로 이어졌다.<ref>페터 크내벨의 해임은 지난 두 시즌 동안의 실망스러운 성과와 배낭 분실 사건, 그리고 퀴네의 입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참고로 배낭 분실 사건은 2015년 8월, 분실된 페터 크내벨의 배낭이 한 민간인 여성에게 발견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선수단 연봉 정보가 외부에 유출된 사고를 일컫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를 참고할 것. http://www.mopo.de/sport/skandal-um-hsv-gehaelter-klaute-die--finderin--der-rucksack-von-sportdirektor-peter-knaebel--22461024</ref> 그리고 단장직을 겸임하게 된 바이어스도르퍼 운영이사회장은 퀴네의 후원과 왕년의 감각으로 2016년 여름 대대적인 선수 보강에 나섰다. 비록 총 지출은 3천만 유로를 상회했으나, [[필립 코스티치]](Filip Kostić), [[알렌 할릴로비치]](Alen Halilović)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했다는 점에서 일단 팬과 언론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17 시즌, 팀은 1라운드 잉골슈타트 전 무승부 이후 4연패를 당하면서 2011-12 시즌 이후 최악의 스타트를 보였다. 그 결과 라바디아 감독은 경질되었고, 과거 [[TSG 1899 호펜하임]]을 이끌었던 [[마르쿠스 기스돌]](Markus Gisdol)이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ref>재미있는 점은 기스돌은 호펜하임에서 2015년 10월, HSV와의 패배 직후 해임된 바 있었다. 그러니까 라바디아 감독의 HSV에 패해 경질된 기스돌이 그 라바디아의 후임으로 그 HSV의 감독이 된 셈이다. <s>자고로 인생이란 모르는 것..</s></ref>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