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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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스포츠 팀 정보
종목 야구
리그 KBO 리그
설립 1986년 3월 8일
연고지 대전광역시
경기장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
소유 한화 그룹
감독 카를로스 수베로
웹사이트 www.hanwhaeagles.co.kr

1986년 창단한 한국프로야구의 제7구단. 충청도 전역을 연고지로 삼는다. 홈구장은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전 한밭야구장)을 사용하고 있으며, 마스코트는 독수리(위니,비니,수리)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단 ~ 1993년 : 리그의 2인자 빙그레 이글스 시대[편집 | 원본 편집]

당시 한화그룹 산하 계열사였던 빙그레의 이름으로 창단하였다. 이 때도 빙그레는 한화의 소유였으며, 빙그레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일반 소비자에게 방산업체 한화는 익숙하지 않은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창단 후 첫 두 시즌(1986, 1987)은 신생팀의 한계로 하위권에 머물렀지만, 1988~92년의 다섯 시즌 중 1990년을 제외한 4년 동안 모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강호로 군림했다. 하지만 1988, 1989, 1991년에는 당대 최강팀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에게, 1992년에는 에이스 염종석을 앞세운 롯데 자이언츠에게 막혀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1994 ~2004년 : 한화 이글스로 개명 후[편집 | 원본 편집]

이후 그룹 계열분리가 일어나면서 빙그레가 떨어져나가자 1994년 팀명을 현재의 한화 이글스로 바꾸게 된다. 이후 1994~1998년 시즌 동안 중하위권을 전전하며 과거의 영광을 잊나 했으나 1999년에 매직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대망의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인 2000년에 바로 하위권으로 떨어졌고, 2001년을 제외하고 2004년까지 모두 가을야구에 실패하였다.

2005 ~ 2009년 : 명암이 공존하는 김인식 시대[편집 | 원본 편집]

2005년 새로이 부임한 김인식 감독은 부임 첫해 건강문제라는 악조건을 이겨내고 팀을 한국시리즈로 진출시켰다. 비록 삼성의 에이스 배영수에 막혀 V2는 좌절되었지만, 전년도 7위 팀을 준우승으로 이끈 김인식의 리더십에 모두 극찬했고, 이후 한화는 2007년까지 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다시 강팀의 면모를 되찾았다.

그러나 2008년 시즌에는 여름까지 상위권에 위치하다가 베이징 올림픽 브레이크 기간이 끝나고 거짓말처럼 부진한 성적을 보여주며 5위로 가을야구에 실패했고, 2009년에는 김태균, 이범호의 부상이라는 악재 속에서 8위로 내려앉고 말았다.

김인식 시대 한화는 초기에는 좋은 성과를 보여주었으나 이후 노장선수의 꾸준한 기용과 이로 인한 세대교체의 실패, 투수의 혹사, 신경현의 뒤를 이을 포수 육성 실패 등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며 결국 암흑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2010 ~ 2014년 : 하위권 탈출을 위한 몸부림 1, 한대화 시대[편집 | 원본 편집]

김인식 감독 이후 한화는 한대화 삼성 코치를 감독으로 영입하며 절치부심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2009년 시즌을 끝으로 FA가 된 김태균, 이범호가 동시에 일본으로 이적하고, 송광민이 시즌 중 군에 입대하여 중심타선과 내야수비의 핵심이 동시에 이탈하는 초대형 악재가 터져버렸다. 그나마 류현진이 분투하였지만 여러 악재 속에 한화는 최하위로 시즌을 맞이했다.

뚜렷한 전력보강 없이 맞이한 2011년 시즌, 한화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류현진이 부상으로 살짝 부진했지만 양훈, 안승민, 김혁민, 장민재 등 투수유망주들이 거의 동시기에 포텐을 터트려 용병선발 없이도 5선발 로테이션이 돌아갔다. 여기에 대체용병으로 영입한 마무리 데니 바티스타의 활약이 더해지며 무시할 수 없는 팀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초반의 부진을 이겨내지 못하고 최종 6위로 시즌을 끝냈다.

2012년 시즌, 한화는 FA로 송신영, 특별지명으로 박찬호를 영입했으며 일본에서 복귀한 김태균까지 가세하여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렸으나 11년에 포텐을 터트린 투수들이 하나같이 부진에 빠진 데다 송신영이 제 몫을 못 해주고, 타선과 수비진이 붕괴, 시즌 전의 기대를 무색하게 만들며 8위로 시즌을 마쳤다.

2013 ~ 2014년 : 하위권 탈출을 위한 몸부림 2, 김응용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이에 구단은 극약처방으로 야인이었던 명감독 김응용을 전격 영입하여 2013년 시즌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 양훈의 입대, 박찬호의 은퇴로 선발 3인방이 동시에 빠져 버리면서 총체적 난국에 빠져 개막 13연패라는 불명예 속에 끝내 반등하지 못하고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9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끝마쳤다.

2014년 시즌에는 이용규정근우를 FA로 영입하며 또다시 탈꼴찌의 희망을 품었으나 전체 전력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한 채 시즌을 마쳤다. 게다가 2014 시즌의 타고투저의 피해를 제일 많이 받아서,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나쁜 팀 평균자책점 6.35를 기록하였다.

2015년 ~ 2017년 : 한화 이글스 최악의 시기 김성근 시대[편집 | 원본 편집]

2014년 시즌에도 성적 부진이 계속되자, 김응용 감독의 사퇴 이후 구단에서는 김성근 감독과 3년간 총액 20억 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변혁을 꾀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 체제 하에 새로운 모습으로 2015년 시즌을 시작하였다. 초반에는 이른바 마리한화라 불리는 광풍을 일으키며 잘나갔으나, 시즌 중반부터 주축 투수들이 하나둘씩 지치기 시작하며 순위가 점점 떨어졌고, 결국 최종 6위로 시즌을 마쳤다. 결국 다시는 2015년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투수 혹사, 주전 노쇠화등의 문제만을 불러왔고 이로인해 한때 야신이라 불리며 각광받았던 김성근 감독은 추락했다 이후 2017년 시즌 중 경질되어 수석코치였던 이상군의 대행 체제로 돌입했다.

팀 컬러[편집 | 원본 편집]

전통적으로 한화는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대표되는 화끈한 팀컬러와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끈끈함으로 대표되었다. 90년대 초반에는 원조 홈런왕 장종훈이 있었고, 2000년대에도 김태균, 이범호, 김태완, 최진행, 김회성 등 거포자원은 매우 많았다. 그러나 거포 선수들의 이적과 부진, 홈구장의 펜스 확장공사(...) 등이 겹치면서 과거와 같은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보기 힘들어졌다.

프랜차이즈 스타를 특히 우대하는 팀으로 유명하다. 한화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선수는 총 3명(장종훈, 송진우, 정민철)으로 이는 한국프로야구 구단 중 가장 많은 숫자이다. 그 밖에도 구대성, 신경현 등 팀 프랜차이즈들은 성대하게 은퇴식을 열어주고 구단에서 코치 자리를 맡게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 눈밖에 나면 용서하지 않는 팀으로도 유명한데, 최영필이도형은 구단 제시안을 거부하고 FA 시장에 나섰다가 아무 팀과도 계약하지 못하고 그대로 미아가 되었다.

홈구장[편집 | 원본 편집]

1군은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구 대전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를 주 경기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상당히 오래된 경기장이지만 꾸준한 관리와 지속 투자, 시설개선으로 시설은 상당히 좋은 편. 외야 펜스도 MLB 급으로 호평받았고, 한국 프로야구 경기장 최초로 포수 후면석을 설치하기도 했다. 2012년까지는 타석에서 외야펜스까지의 거리가 짧아 홈런이 자주 나왔지만, 2013년의 공사로 홈플레이트에서 담장까지 이르는 거리가 상당히 멀어졌다.

1군의 제2홈구장인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은 규모나 시설 면에서 이글스파크에 비하면 열악한 편이지만, 시설관리는 잘 되고 있다. 하지만 그라운드 사정이 좋지 않아 비가 조금만 내려도 경기를 못 하는 경우가 다반수다. 보통 1년에 5경기 내외가 청주에 할당된다. 한국의 쿠어스필드라 불릴 정도로 작은 편이다.

2군 구장은 서산 야구장으로 2013년에 완공되었으며 2015년 현재 가장 최근에 지어진 2군 구장이니만큼 한국 프로야구 구단 중 가장 시설이 좋은 2군 구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수단[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