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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지에서도 “신시대, 신사조에 접촉된 불교가 그 구폐를 개혁하여 개성의 존중을 인정한 유아독존의 사상과 대자대비를 주창한 박애관념으로 사회의 확장에 공헌하며 문화의 발전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개성의 존중은 불교의 유아독존의 사상에서 비롯되고, 박애관념은 대자대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한용운은 [[기미독립선언서]]에 덧붙인 '공약삼장'에서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가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하는 것에 있고, 조선독립의 원동력 또한 그 힘에 있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자유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진아(眞我)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자유이다. 이도흠 교수는 한용운이 추구한 자유에 대해 "타인의 자유와 평화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이자 무명(無明)을 탈피하여 진정한 자아와 궁극적 진리와 깨달음에 이르는 적극적 자유"라고 평했다.<ref>이도흠, <탈식민주의자로서 만해 한용운의 사상 읽기>, '만해학보' 제13집.</ref>즉 소극적 자유를 달성한 뒤 적극적 자유를 지향할 때 자존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자유를 '개인적 진아(자유)'와 '공유적 진아(자유)'로 분류했다. 그러면서 공유적 진아가 실현되지 못하면 개인의 진아도 실현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가 이렇듯 자유를 분리한 것은 량치차오가 음빙실문집에서 해석한 칸트의 '도덕적 진아'의 한계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람이 모두 시공을 초월하는 자유권에 의거하여 스스로 그 도덕의 성질을 만드는 것인데, 나의 진아(眞我)를 비록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 보면 엄연히 현상을 벗어나는 “활발 자유(活潑自由)한 것”이라 하였다. 량치차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용문2|‘인간은 진여와 무명의 두 종자를 지니고 있는데 칸트가 말한 진아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로서 자유성을 지닌 것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은 칸트가 말한 현상으로서 곧 비자유성’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하는 진아는 진여로서 불교와 가깝다.}} 량치차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는 일체 중생이 공유하는 체(體)이기에 칸트가 사람마다 모두 각기 하나의 진아를 가지고 있다고 한 것과는 다르므로, 칸트의 '진아'는 불교와 가깝지만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봤다. 그러나 한용운은 칸트와 량치차오 모두 타당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칸트는 개인적 진아만을 말하고, 량치차오는 공유적 진아만을 말하여 두 사람 모두 양자를 아우르지 못했다. 또한 진아는 진여뿐만 아니라 무명을, 자유성뿐만 아니라 비자유성도, 청정만이 아니라 망염(妄染)을 모두 포함하는 것30)이기에 양계초가 무명을 진아에서 제외시킨 것이나 칸트가 자유성만을 진아로 말한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붓다가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지 못한다면 중생 역시 붓다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하여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셋이면서 기실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 삼자는 는 상즉상리(相卽相離)의 관계여서 “하나가 곧 만이요 만이 곧 하나(一而萬萬而一者)”인 관계라 할 수 있고, 만약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경계를 긋는다면 이는 무의미한 것"이라 하였다. 자유란 붓다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각에서 오는 각유적 자유요, 공유적 평등이다. 유아독존<ref>'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없다'는 측면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독존(獨存).</ref>이기에 “구애(拘碍)될 것이 없는” 자유요, “존비(尊卑)가 없고, 자타가 없는” 평등인 것이다. 또한 만해의 자유는 평등을 수반하는 평화의 개념이다.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개인의 자유와 공유적 자유를 결합하여 진정한 인간해방과 사회해방을 이뤄내길 희망했다. 한용운은 1920년대 대세로 떠오른 사회주의 역시 참고했다. 그는 천도교와 사회주의 간의 사상논쟁으로 반종교 운동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불교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사회주의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불교는 계급에 반항하여 평등의 진리를 선양하며, 소유욕을 부인하고 우주적 생명을 취하는 걸 목표로 삼았으니, 사회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석가의 이상인 재산 축적의 부인, 경제상의 불균등 배척, 그리고 소유욕 없이 살자는 것이 현대어로 표현하면 불교사회주의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불교사회주의는 민족과 계급, 국경을 넘어 모두가 잘 살고자 하는 우주적 차원으로 보았다. 즉 계급질서가 아닌 평등을, 소유욕이 아닌 우주적 생명을, 무산자 혁명이 아닌 전 우주의 혁명으로서 산천초목, 우주만유를 모두 구제하자는 것이다. 불교사회주의는 불교가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산간불교로부터 불교의 ‘민중화’를 외치고 사회참여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전근대시기에 불교는 허무적멸교라 불렸지만, 이제 “창생의 구제는 세상을 떠나 세상을 구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들어와서 세상을 구하는 것”이고, 이는 마치 병자를 떠나 병자를 치유할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즉 민중의 삶을 배제하고는 붓다도, 정토도 없기에, 사회구조의 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해 각성하자는 것이다. 또, 불교의 민중화는 시대정신에 합류하는 사회의식의 각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봤다. 그는 <불교유신회>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인용문2|불교는 사찰에 있는 것도, 승려에게 있는 것도, 경전에 있는 것도 아니라 각인의 정신적 생명에 존재하고 그 자각에 존재한다. 민중과 접하고 민중과 더불어 동화해야 한다.}} 그는 각인의 자각을 통해 불교의 민중화와 참여로서 공익(公益)의 대아(大我)를 지향해야 한다고 봤다. 공익은 인간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국가가 갖추어야 할 공존공영의 상호협조를 지칭한다. 대아적 차원에서 보면 상호협조는 자조(自助)가 되고, 공익은 사익(私益)이 된다. 따라서 자연과 인류, 모든 국민은 같은 배를 탄 일원이니, 함께 힘을 모아 공익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한용운은 근대사상을 참고하여 불교유신운동을 전개했지만, 서양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회진화론을 반대하고, 비판적 성찰을 통해 불교 자체의 사상과 맥락으로 재해석했다. “우수하고 열등하고 강하고 약해지는 것은 세력 여하”에 있지만 그 세력은 곧 해탈의 힘이라는 것이다. 조선 불교가 유린된 원인도 세력의 부진에 있고, 세력의 부진은 가르침이 포교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으며, 가르침이란 궁극적으로 해탈의 힘이다. 또한 승자가 되는 것은 만물을 아끼고 기르는 자이지 약자를 먹는 자가 아니며, 패배한 자가 되는 것은 만물의 영장되는 권리를 포기하고 사회에 대하여 힘을 제공하는 임무를 소실한 자이지, 처음부터 승자와 패자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한용운이 대처승 금지 폐지를 촉구한 건 일본불교를 선진종교의 모델로 인식하여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 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ref>김용태, <근대불교학의 수용과 불교 전통의 재인식>, '한국사상과 문화' 제54집</ref> 또는 불교를 사회하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승려들의 결혼을 자유화하려 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ref>김광식, <한용운의 불교 근대화 기획과 승려결혼 자유론>, '개각사상' 제11집.</ref> 그러나 한용운이 대처승 금지 폐지를 촉구한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결혼이 불도를 이루는데 장애될 수만은 없는 것이고, 차라리 인간의 성적 욕망을 인정하여 음지로 모는 것보다 나으며, 오히려 성을 터부시하는 것 자체가 속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시 <선사(禪師)의 설법(說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용문2|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 주는 것입니다.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습니다 .}} 한용운은 승려가 아내를 두는 건 불도를 이루는 데 장애가 되는 게 아니며,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라고 봤다. 그러면서 사랑의 속박을 금욕으로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긍정하여 그 속박의 사랑을 통과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한용운의 주장은 일본 불교의 영향이나 근대화 기획으로 단정할 수 없다. 한용운은 문학을 분류하는 것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는 문학을 문예만으로 국한시키는 풍조에 대해, "시(詩), 부(賦), 삼국지・수호전・서유기・서상기 같은 사대기서(四大奇書)는 당연히 대 문학이라고 하려니와 이것이 어디에 포함될 것이며, 팔만대장경은 문학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모든 경전과 인문이 당연히 문학에 포함될 것인데 이를 문예로 축소하면 문예외의 것은 어디에 소속을 두어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그는 불교를 철학과 종교에 편입시켜 불교의 성질을 종교적 성질과 철학적 성질로 나누어 보았다. 불교의 종교적 성질이란 기독교처럼 지옥과 천당을 별도로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심의 진여를 깨닫는 것으로서, "지옥과 천당이 다 정토가 되고, 중생의 마음이 곧 정토"라고 주장했다. 즉, 불교는 타종교처럼 영생을 논하지 않고, 불생불멸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자기 마음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불교의 철학적 성질을 일체종지(一切種智)로 규정했다. 일체종지란 자심을 깨달아 “밝게 통하므로 장애가 없고(瑩徹無碍) 모르는 바가 없는 지혜"이다. 그는 불법을 통달하고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이끄는 것이 불교의 지향점이라 하였다. 이러한 불교는 근대 인류의 중추가 되는 이상주의, 인격주의, 평등주의, 사회진화론, 자유주의, 사회주의, 과학주의 등 모든 주의를 표방하고 있기에, 현대사조는 불교의 주석과 같으며, 불교는 도덕 문명의 원료품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류 전체의 완성을 구가하고자 하는 자는 불교의 의미를 먼저 체득해야만 할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불교가 모든 학문의 통섭으로서 근대 보통학을 겸비하면서도 진리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문학을 이끌어내는 종교라고 본 것이다. 한용운은 승려 교육의 세 가지 급선무로 보통학, 사범학, 외국 유학을 제시했다. 보통학은 사람의 의복이나 음식처럼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으로, 과학, 철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논리학 등 근대의 학문을 지칭한다. 그는 승려가 보통학을 겸비해야 민중의 삶과 사회로부터 유리되지 않으며, 인간과 사회, 그리고 사물에 대한 지식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사범학은 중생들의 모범이 될 사범을 길러내는 학문이다. 마지막으로 외국 유학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서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용운은 물을 맑히기 위해서 근원을 다스리고, 나무를 무성케 하기 위해 뿌리를 북돋우는 것처럼 사람의 행사를 정돈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수양이란 망념을 물리치려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본체를 그대로 보유하는 것이다. 그는 <조선불교 유신론>에서 기존 불교의 수행은 '참선'<ref>깨달음을 얻기 위해 한 자리에 앉아서 오래도록 금식하는 수행</ref>과 '염불당'<ref>사찰에서 정토왕생을 목적으로 염불 위주의 수행을 하기 위해 지은 불교건축물.</ref>의 폐단이 심하다며, 두 개념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참선 폐지'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참선 대신 공동으로 선학관을 설립하고 중생이 서로를 격려해 깨달음을 얻게 하자는 것이다. 염불당 폐지는 '유신론'의 주장에서도 가장 파격적인데, 중생들이 거짓 염불을 멀리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자는 것이지 염불당을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없애자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된다. 이와 함께 불교 의식(儀式)에 대해서도 많은 다라니(陀羅尼)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한용운은 산속의 사원은 사상적인 진보와 모험 및 구세, 경쟁을 자극하지 못해 퇴영적이기 쉽고, 사업적으로는 교육, 포교, 교섭, 체신, 단체, 재정 등에 모두 불리하므로, 사원을 도시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원의 흥망성쇠는 주지(住持: 절을 주관하는 승려)에 달려 있는 만큼 능력있고 훌륭한 사람이 주지의 직책을 맡기 위해서는 제도를 개혁하여 선거로 선출하고 월급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승려들은 외형적으로 단결된 것 같으나 정신적인 단결이 없음을 지적했고, 이 중에서 승려들의 방관자적 태도가 가장 문제라고 봤다. 승려들이 단결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한다면 부처님의 중생제도 정신을 배반치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지은 죄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듯 한용운은 서구 근대사조를 접하면서 불교 전통의 폐해를 성찰하는 동시에 불교사상을 근대적 담론을 재 개념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만해의 불교유신사상은 한국불교의 전통적 사유를 계승하면서도 서구 근대사조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토착적 근대화를 이끌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서구 근대 사상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고, 불교만의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그가 설파한 불교사회주의 역시 무산자 계급의 혁명을 추구한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전 생명의 우주혁명을 추구하였다. 그는 전통학문분류와 근대학문의 성격을 고려하여 보통학을 겸비한 인문학의 창도로서 불교학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정신(正信)의 수양을 주장했다. 그는 불교학의 학문적 재정립을 시도하고 보통학의 겸비와 더불어 마음수양을 우선시 하면서 주체적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